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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봉암이 사형당한 이유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1. 4. 00:40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씨가 지난 10월 26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8년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빈소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현대사 비극의 1세대를 지나 2세대마저 저무는 것을 보며 더욱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분은 1991년 이후 부친 조봉암에 대한 사면 복권을 줄기차게 청원한 결과 20년 만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으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유족에게 24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던 바, 원 풀이는 하고 가신 셈이다. 

     

     

    조봉암(曺奉岩, 1898~1959)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한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이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던 그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더욱이 1심에서 불리하게 증언했던 사람(양명산)이 기관의 강압에 못이긴 허위 자백이라고 밝혔음에도 2심에서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5개월 뒤 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이름은 조봉암,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과 혁신정당 진보당의 당수를 지낸 사람이다. 

     

     

    재판정에서의 조봉암

     

    1898년 강화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강화에서 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강화군청 급사로 일하다가 상경해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했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간 복역했고, 1920년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 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후 사회운동에 뜻을 두고 참여하여 처음에는 아나키즘 계열에 속했으나 이후 사회주의에 경도돼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후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활동했다. 

     

     

    강화도 대명포구
    강화읍 구도심의 성공회 성당
    조봉암 생가 터 표석 / 강화읍 구도심의 조봉암 생가 터는 그동안 위치가 오락가락해 오랫동안 명시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강화읍 관청리 강화읍사무소 옆에 표석이 세워졌다. 나는 매년 탐방했지만 못 찾았는데 어떻게 단박에 찾았는지 신기하다. 내가 생각하는 곳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그는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루었고, 출옥 후 중국공산당과 연락을 취했다는 혐의로 1945년 2월 다시 투옥되었다가 광복과 더불어 풀려났다. 조봉암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 중앙간부로 활동하였으나 1946년 남로당 박헌영의 노선에 반대하는 반(反) 박헌영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조선공산당을 탈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공산당과 결별했을 뿐, 반(反) 이승만 계열의 진보정치 노선을 견지했는데, 놀랍게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농림부장관에 취임했다. 지금도 종로구 대학로 부근에 건재한 이화장 조각당(組閣堂)에서 이승만과의 독대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 위원 / 오른쪽 끝이 조봉암
    이화당 조각당 /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조각이 이루어졌다는 곳이나 실제로 가보면 서너 명이 들어가기도 비좁은 작은 방이다.

     

    어쩌면 구색맞추기라고도 할 수는 있겠으나 어찌 됐든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는 민주정부라는 포장에 성공하였고, 해방 후 농지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한국민주당의 격렬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한민당은 지주 세력 중심 개혁을 주장한 반면 조봉암 장관은 '경자유전’(耕者有田: 농사 짓는 이에게 땅을 내줌)을 내세운 농민중심의 강력한 농지개혁을 추진했고 그에 대한 지지로서 한민당에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 농지개혁 정책은 한미상호방어조약 체결, 독도 영유화, 6.25 반공포로 석방 등과 더불어 이승만 정부의 몇 안 되는 업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유당 정부의 농지개혁법령

     

    조봉암은 성공적 농지개혁은 자연히 대중적 인기를 업게 되었다. 그는 이와 같은 지명도를 바탕으로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재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6년 발족한 가칭 진보당의 대표로서 제3대 대통령 선거(1956년 5월 15일)에 출마했다. 앞서 '우리 근대사의 변곡점 신익희 후보 서거'에서 말했듯 이때는 한민당 신익희 후보의 돌풍이 거세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선거를 열흘 앞둔 시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때 진보당 조봉암은 216만 표로 2위(득표율 30%)를 기록하는 놀랄 만한 결과를 내었다.

     

     

     

    우리 근대사의 변곡점 신익희 후보 서거

    서울 강동구 강동역에는 구리빛 찬연한 동상이 하나 서 있다. 해공(海空)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다. 지금 세대에게는 무척 낯선 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선생은 격동의 시기 1894년에 경기도

    kibaek.tistory.com

    3대 대통령 후보 조봉암 선거 포스터

     

    조봉암은 그 여세를 몰아 1956년 11월 10일 정식으로 진보당을 창당했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이승만이 내세운 북진통일에 반대해 '평화통일'을 내세웠고, 자유당 정부의 횡포에 시달리던 사람들('피해대중')을 위한 '수탈 없는 경제 정책'을 표방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크게 불안감을 느낀 자유당 정부는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조봉암을 체포하였다. '북한이 공작금을 보내 조봉암의 대통령선거 자금 및 진보당 창당 자금으로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1심 재판에서 위와 같은 ‘양명산’의 진술이 있었음에도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5개월 뒤인 1959년 7월 31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법살인’으로 불려지는 대사건이기도 하다. 다음 대선에서 조봉암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자유당 정부가 그를 간첩죄로 몰아 죽였기에 이렇게 불려지는 것이다. 형장에서의 그의 마지막 말은 "술 한 잔을 달라"는 것이지만 청(請)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에서 무고함을 호소하는 조봉암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 자료

     

    조봉암은 재심청구 기각 하루만에 전격 처형되었는데, 그에게 돈을 줬다는 남파간첩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절이 얼마나 불우했는지 그는 가족들에 대한 유언에서 "아들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 달라"고 했다. 아들 조규호가 연좌제로 인해 화(禍)가 미치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망우리에 가매장되었다가 홋날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그전에 북한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가묘가 먼저 세워졌다. 이미 공산당과 결별한 조봉암이었음에도 남남갈등을 유도하려는 북한 공산정권의 획책이었다. 

     

     

    조봉암에 사형, 진보당 피고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된 재판 결과
    조봉암 재심청구 기각 보도
    조봉암 사형집행 보도
    망우리 역사공원묘지 조봉암의 묘
    무덤 앞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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