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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먼저 이등박문을 저격한 원태우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4. 11. 24. 22:11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문에 서명 날인함으로써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해서는 앞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과 고종'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당시의 분위기만을 다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17일 밤 8시, 덕수궁 중명전에 는 참정대신 한규설 · 외부대신 박제순 · 내부대신 이지용 · 법부대신 이하영 · 학부대신 이완용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 군부대신 이근택 ·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대한제국의 대표로, 일본국 전권특사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일본국의 대표로 마주 앉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제한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을사조약에 관한 협상을 하기 위함이었다. 
     
    협상은 자정을 넘긴 18일 새벽 1시,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지휘하는 착검한 일본군들이 중명전을 포위한 가운데,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문에 서명 날인함으로써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 사실상의 식물국가로 만든 이 조약은 이틀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이 보도함으로써 세간에 알려졌다.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사설은 매우 유명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에 재현된 그날 / 가운데가 이토 히로부미다.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였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대한제국 대신들을 크게 꾸짖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앞서도 말했지만 이등박문(이하 이토)은 이 조약의 체결을 위해 11월 9일 서울에 왔다. 그리고 이튿날 고종을 알현하고 일왕의 친서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화근이 돼 온 대한제국의 대외 관계를 일본이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가져온 300만원 중 먼저 고종에게 2만원을 주었다. 2만원은 당시 도시노동자의 100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기타 이완용에게 1만원, 이지용과 이근택 등에게 5000원을 주었다.
     
    뇌물의 덕분인지 불가능할 듯했던 조약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국민들은 이 비극을 까맣게 모르다가 이틀 후 <황성신문>의 보도로 비로소 인지하였다. 백성들은 울분을 터뜨리며 경운궁(덕수궁) 앞에 모여 조약 파기와 조약 체결자의 처단을 주장하는 군중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저 거기까지 였으니, 이토는 11월 22일 방문 기념차 여유롭게 수원 나들이에 나섰다.
     
    그런데 그날 안양에서 경운궁 집회에 대한 뜻밖의 메아리가 있었다. 안양에 사는 청년 원태우,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이 이토를 처단하려는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이토는 22일 오전 9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특별열차로 남대문역(서울역)을 출발하여 수원에 도착한 후 수원 화성을 둘러보고 팔달산 구경을 하였다. 그리고 안양으로 이동하여 오후 나절 사냥을 즐긴 후 저녁 6시 15분경 안양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탔다.
     
    한편 그 시각, 신문을 통해 이토의 일정을 습득한 원태우 일행은 이토가 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열차를 전복시키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서 였다. 즉 일행은 경부철도 안양역 서북방으로 약 800m 떨어진 서리재 고개(현 안양 석수동)의 선로에 큰 돌을 옮겨놓고 마음 졸이며 열차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로 인해 열차가 전복하거나 탈선하게 되면 이토와 하야시는 적어도 치명상을 입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목숨을 내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으니, 이미 작년(1904년) 8월 27일 서울 용산 부근에서 일본군 군용철도를 파괴하려던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의 3인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한 전례가 있었다. 
     
     

    헐버트의 <대한제국 쇠망사>에 실린 3인 의병의 처형 사진 / 1904년 9월 21일 마포가도 철도건널목 산기슭에서 일본군에 총살되었다. 아직 대한제국의 국권이 살아 있을 때였음에도....

     
    그래서일까, 서리재 고개에서 지켜보던 일행 중의 한 명이 돌출 행동을 보였다. 멀리서 기차의 출발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이만여가 갑자기 선로로 뛰어가 옮겨 놓았던 돌을 밀어내고 달아난 것이었다. 일행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술을 나눠 마신 상태였음에도 이만여는 시시각각 밀려드는 공포를 못내 극복하지 못한 듯싶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지만 선로에 다시 돌을 올려놓기에는 시간이 턱없었다.
     
    하지만 원태우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 던지기 적당한 화강암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열차가 고개를 통과하는 순간, 승객이 보이는 차장을 겨냥해 힘껏 투척했다.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원태우가 돌을 던진 장소는 선로 위의 언덕이었다. 까닭에 열차의 창을 정확히 겨냥할 수 있었고 또한 파괴력도 가중될 수 있었다. 시각은 열차가 출발하고 2분 여가 지난 오후 6시 17분 경이었다.   
     
     

    안양시 석수동 거사 장소의 기념비
    기념비 아래의 표석
    내려보이는 선로
    현 전철이 지나는 상황
    이등박문이 탔던 열차 / 안양박물관의 전시 사진

     
    원태우가 던진 돌멩이는 정확히 목표에 명중해 이토와 하야시가 탄 객차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이토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렸으나 왼쪽 눈꺼풀을 비롯한 여덟 곳에 깨진 유리조각이 박힌 후였다. 객실이 아수라장이 되자 열차는 곧 멈춰 섰고 이토를 호위하던 일본 헌병대장과 헌병들이 서둘러 내렸다. 이후 열차는 현장에서 1시간 가량 머물다 오후 8시 경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원태우를 비롯한 일행은 열차에서 내린 헌병과 급거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오후 9시 30분경 체포되었다. 철도 근로자들이 일행이 도주한 방향을 가르쳐준 탓에 쉽게 붙잡힌 것이었다. 이후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은 조사 후 무혐의로 풀려났고 원태우는 철도방해죄로 징역 2개월을 선고받았다. 사건에 비해 조사와 처벌은 의외로 가벼운 감이 있었는데, 그 뒤에는 이들을 경범죄로 처리하라는 이토의 지시가 있었다. 곧 조선통감으로 오게 될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고픈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처벌이 가볍다 뿐 체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태우는 배후를 밝히려는 일본 헌병의 혹독한 매질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성기에도 심한 고문이 가해져 후손을 둘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태우는 영등포감옥에서 두 달을 보내고 이듬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해방 후에도 그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어렵게 살다가 1951년 한국 전쟁 중 69세로 사망했다.
     
     

    안양 전철역 입구의 원태우(元泰祐, 1882~1951) 의사 상
    오류가 기재된 원 의사의 석판 기록

     
    차제에 항간에 잘못 알려진 사실 몇 가지를 바로 잡고자 한다. 위 석판 등의 기록과 달리 원 의사는 1951년 7월 7일에 사망했다는 것이 유족들의 증언이다. 그는 사망 40년이 지난 1990년 뉘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그리고 위 석판이나 석수동 기념물에는 늙은 원 의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마치 그가 노익장을 과시한 듯 여겨진다. 65세에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처럼.
     
    하지만 원 의사가 거사를 벌인 1905년, 그는 당 23세의 팔팔한 청년이었다. 따라서 늙은 모습으로 기억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울러 아래의 그림은 1905년 12월 8일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에 속한 삽화로서 우리가 쉽게 빌려 쓰고 있는 그림이지만 이 또한 오류 투성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인데, 그저 소문만을 듣고 그렸던지라 원 의사는 흰 도포에 갓을 쓰고 칼을 찬 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선인이 일본 사무라이처럼 패검한 것도 이상하지만  원 의사는 당시 농부였던지라 도포에 갓을 썼을 리 없다. 그리고 그림에서처럼 평지에서 투척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던졌다.
     
    아울러 원태우의 손자가 삼성 라이온스의 에이스 원태인이라는 말도 있으나 사실이 아닐 것이다. 올해 다승왕에 오를 정도의 배어난 투구 실력에 비슷한 이름이 오류를 불러온 듯한데, 앞서 말한 바대로 원 의사는 심한 고문으로 후손을 두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원 의사의 의거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보다 4년을 앞섰다. 나이는 1882년 생 원 의사가 1879년 생의 안중근 의사보다 3세 아래다. 하얼빈 의거 당시 안 의사의 나이는 30세였다. 이상 여러 가지를 미루어 원 의사는 안중근 의사보다 훨씬 젊은 모습으로 투영되어야 하며, 그의 의거 또한 단순한 돌팔매가 아닌 선로 탈선 작전과 함께 묶어져 알려져야 한다. 만일 그때 열차가 탈선되었다면 이토와  하야시 곤스케는 최소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다승왕 원태인 투수
    늙은이로 묘사된 원태인 의사 상 / 안양박물관 모니터에서 캡처
    화가 기무라가 그린 원 의사 모습 / 안양박물관 모니터에서 캡처
    <일로전쟁 사진화보> 속의 삽화
    안양 만안교 야경
    만안교 사진을 담은 이유는, 원태우 의사의 아버지가 "만안교 축조 당시 이를 감독하는 관리였다"는 유족들의 증언과, 원 의사가 "의거 당시 향교에 다녔다"는 증언이 있어서 이다. 그렇다면 그는 농민으로 알려진 사실과 달리 선비였을 가능성도 있다. 기타 생가(生家) 등에 대한 증언도 혼재되어 있는데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별로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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