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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대에서 세상 떠난 이재명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4. 11. 25. 22:02

     

    앞서 원태우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양 석수동 현장을 찾아보았다. 언급한 대로 이 일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를 처단하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그런데 안중근에 앞서 이토를 처단하려는 또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던 바, 그가 바로 이재명이다.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날(1910년 9월 30일) <동아일보>는 '교수대에서 세상 떠난 이재명'이라는 제목으로 아래 사진과 함께 그의 의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실었다. 

     

     

     

    하지만 이재명 의사가 처형을 당한 것은 이토를 단죄하려는 사건 때문이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기 때문으로, 이에 관한 내용을 당시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전북 진안 마이산도립공원 입구에는 이재명 의사 기념관이 있다. 2001년 진안 이씨 종친회와 정치인들이 이재명 의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조성한 시설이다. 이재명 의사의 본관이 진안 이씨인 것이 연고가 됐다. 하지만 진안이 이재명 의사의 고향은 아니니, 그는 1887년 10월 16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8살 때 평양으로 이사 가 성장했다. 이후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한 이재명은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해 미국 하와이로 갔다.

     

    1902년 12월 22일 101명의 한인을 실은 이민선이 인천을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된 미국 하와이 이민은 1903년에서 1905년 사이 7,226명이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감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05년부터는 일본의 제지로 미국 이민 길이 막히게 되니 1904년 하와이로 건너간 이재명은 사실상 막차를 탄 셈이었다. 미국 하와이주(州)가 한인을 대거 받아들인 것은 사탕수수 밭을 경작할 노동력을 필요로 해서였던 바, 거의 대부분의 한인이 사탕수수 밭에서 중노동을 했다. 

     

    그것은 당시 17살의 이재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보다 큰 뜻이 있었던 듯 2년 동안 저축한 얼마간의 돈을 품고 1906년 3월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학업이 목표임은 두 말할 나위 없을 터인데,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공립협회에 가입하면서 진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립협회는 1899년 미국에 온 도산 안창호가 1905년 결성한 민족운동 결사체로서, 미주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1907년 일본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 및 내정권 장악을 목적으로 한 이른바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에 처해졌다. 이에 비교적 온건노선을 걷던 공립협회도 표변하여 무력 노선을 표방하였던 바, 정미7적을 비롯한 매국노 처단을 목적으로 한 실행자를 모집하였다. 이재명은 서슴지 않고 지원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도 보다 큰 뜻을 품었으니 정미7적보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결심을 했다. 

     

    이재명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08년 10월 9일 안창호와 함께 국내로 잠입했다. 그리고 기회를 살피다 1909년 1월 조선통감 이토의 제안으로 결행된 순종황제의 서북(평안도) 순시를 택하여 평양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다. 하지만 거사를 실행하지 못했다. 안창호가 이토와 함께 다니던 순종 황제의 안전을 위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서북순행 내내 이토는 순종과 붙어 다녔던 바, 결국 이토를 처단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북 순행 중인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

     

    서울로 돌아온 이재명은 계획을 바꿔 정미7적을 비롯한 매국노들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을 디-데이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날 아침 천주교당 앞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한 채 내내 기다리다가 드디어 인력거를 탄 이완용과 마주하게 되었다. 오전 11시 30분쯤이었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비롯한 정미7적의 얼굴을 익히 숙지하고 있었고 또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에 이완용임을 단정했다. 그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준비했던 8촌(약 25cm)의 단검을 빼어 들고 이완용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이완용에게 휘두른 첫 방은 실패하였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아서려다 대신 칼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가슴을 깊게 찔린 박원문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이재명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이완용을 쫓아가 왼쪽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 돌아서는 이완용의 어깨와 가슴 3곳에 거푸 칼을 꽂았다.

     

     

    명동성당 앞의 이재명 의거 터 표석

     

    이재명은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자신을 붙잡는 일경에게 저항하지 않은 채 "오늘 우리의 공적(公敵)을 죽였으니 정말로 기쁘고 통쾌하다"고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이완용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완용은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돼 일본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이후 무사히 퇴원했지만 당시의 자상(刺傷) 감염으로 인해 죽을 때까지 흉통과 폐렴으로 고생했다. 모르긴 해도 수명도 꽤 단축되었을 것이다.

     

    이완용은 급히 떠나고 대신 현장에 있던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다그쳐 물었다. 이를 이재명이 여유롭게 되받았다.

     

    "네가 흉행(兇行)을 한 자냐?"

    "흉한 짓을 한 자는 너 조중응이지 내가 아니다. 어찌 흉한 짓을 한 놈이 귀중한 일을 한 인사를 하대하려 드느냐?"

     

    재판에 임해서도 이재명 의사는 시종 의연했다. 그는 1908년 4월 열린 재판에서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이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당당히 답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히 비판했다.

     

    이듬해인 1910년 8월 29일 이완용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고, 즈음하여 순종 황제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금척대수장을, 농상공부 조중응 등에게는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더불어 이완용이 53일 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 순종과 고종은 이완용이 퇴원하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종을 보내 안부를 물었고 거액의 위로금을 보냈다.

     

    순종에게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10명으로 훗날 예외 없이 매국노로 불린 자들이다. 매국노는 이렇듯 어리석은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애국지사 이재명은 경섬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수로 복역하다 한일합방 한 달 후인 9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형장에서의 그의 마지막 말은 전하지 않으나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의  최후 진술은 이러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이니 슬프지는 않다. 다만 생전에 일을 못 이루고 가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나는 죽어 원귀(怨鬼)가 되어서라도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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