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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조명해본 윤봉길 의사 순국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2. 9. 20:55
오는 19일은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지 90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 무렵 고인이 느꼈을 고립무원의 절망감이 사무친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성공시킨 후 붙잡혀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5월 25일) 그곳 감옥에서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후 삼엄한 경비 속에 우편선 '타이요마루'에 실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로 옮겨졌고, 그곳 연병장에서 19일 총살되었다.
그 8개월 동안 외부인의 접견과 접근 또한 일체 불허되었으니, 그는 죽을 때까지 오직 일본군인들에게만 둘러 싸여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5개월 후 순국하였는데, 그동안 안 의사는 가족과 빌렘 신부 등의 접견이 이루어졌고 변호사의 변론을 받을 기회도 있었다. 그가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미완성)과 많은 유필들은 옥중 생활에 비교적 자유가 주어졌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는 모든 것을 제약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굴함이 없이 당당하였으니 배후를 밝히려는 일본군의 고문에도 전혀 입을 열지 않았으며, 사형 당일 집행관이 마지막 할 말을 물었을 때도 "사형을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데 따로 할 말이 뭐 있는가?" 반문하며 주위를 비웃었다. 1932년 거사를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남겼다는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 대장부가 집을 나섰으니 어찌 살아 돌아오리오)의 기백 그대로였다. (상하이파견군헌병대 육군사법경찰관 육군헌병대위 오이시 마사유키의 취조 녹취록이 전한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시절 월진회를 조직해 야학과 강습회를 열며 농민 계몽운동에 힘썼다. 당시 그가 저술한 <농민독본> 등의 책이 고향 충의사(윤봉길 의사 사당)와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교육 운동으로서는 광복의 쟁취가 요원하다고 생각한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자식들을 뒤로하고 중국 상하이로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다.
그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선생을 만났고 한인애국단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김구에게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이 벌인 사쿠라다몽 사건(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에서 이봉창이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과 같은 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군 상하이 공병창 주임 김홍일이 중국인 왕버사우에게 의뢰해 만든 도시락과 물병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일왕의 생일 천장절(天長節) 행사장을 찾았다.
당시 상하이를 점령해 고무돼 있던 일제는 천장절을 맞아 홍커우 공원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가졌는데, 윤의사는 그 행사장의 단상에 물통폭탄을 던져 명중시켰다. 단상에서 폭발한 폭탄의 위력은 가공할만했으니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를 거덜내 죽였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었다.(이후 상태가 악화되어서 죽었다)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육군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 겐키치는 왼쪽 다리를 잃었고,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 역시 중상을 당했으며, 해군 제3함대 사령관 해군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오른쪽 눈을 잃었다. 기타 단상을 호위하던 일본군 수십 명도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안타깝게도 나머지 도시락 폭탄은 불발됐다)
윤 의사 의거 직후 상하이타임스는 4월 30일 자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폭탄이 터진 뒤)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 땅에 떨어졌다. 잠시 뒤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또 상해일보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는 제목을 달아 윤 의사의 거사를 칭송했고, 이 소식을 접한 국민당 장개석 총통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윤 의사의 거사는 또한 대내외의 독립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바,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이 다시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윤 의사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안중근 의사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시신은 다행히도 해방 후 재일한인거류민단의 박열, 이강훈 등에 의해 발굴되어 고국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중국의 유명 작가 샤녠성(夏辇生)은 그의 죽음을 기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는데, 시 속의 윤봉길 의사의 한시는 발췌되어 매헌 윤봉길 의사기념관 옆의 동상과 함께 서 있다.
영원한 기념비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에게
어릴 적부터 한시 신동이었던 당신에게
시를 써 줄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1915년 그해 단오
고향 어른과 작별할 때 즉석에서 지었던 시,
'부후성명사기명 (不朽聲名士氣明)
사기명명만고청 (士氣明明萬古清)
만고청심도재학 (萬古清心都在學)
도재학행부후성' (都在學行不朽聲)
이라는 그 말이
일본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그땐 아무도 몰랐으리라
어린 시절의 외침이 영웅의 일평생을 담았음을
정신이 인생의 영혼이고
영혼이 살아남으면 나라를 지키리라
23살에 고향과 어머니를 떠날 때 당신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로
당신의 목숨을 걸고 민족의 존엄을 지킬 것을 결정했노라
당신의 시는 민족 각성을 일으키는 시집을 통해
조국의 마음에 아로히 새겨져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영원히 머물고 있다
그대는 한국의 영웅
나아가 중국과 아시아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영웅이다
83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내고도
평화를 갈망하는 이 정의로운 외침은
여전히 선명하게 울린다
변치 않는 영원을 향한 소원이
미래에게 알려준다
평화가 영원하길
不朽聲名士氣明
불후한 명성으로 선비의 기개 밝고
士氣明明萬古靑
선비의 기개 밝고 만고에 맑으리라
萬古晴心都在學
만고에 맑은 마음 모두 학문에 있으니
都在學行不朽聲
모두 학행이 있으면 명성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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