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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전차 종점과 돈암동 전차 종점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9. 2. 01:32
유행가가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라서 대한민국 여러 곳 구석구석에서 노래비를 볼 수 있다. 그 전부를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마주한 것 중 가장 와닿은 노래비는 서울 정동 미국대사관 입구 근방에 놓인 이영훈의 노래비로, 거기에는 그가 생전에 작곡한 광화문 연가, 옛 사랑, 붉은 노을, 사랑이 지나가면, 난 아직 모르잖아요, 소녀, 깊은 밤을 날아서,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시를 위한 시, 이별 이야기 등의 그야말로 주옥 같은 노래들의 제목이 새겨 있다. 그는 48세인 2008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와 같은 노래비의 효시는 어떤 노래였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 공원에 세워진 서울의 찬가 노래비(패티김 노래/길옥균 작사 작곡)와 마포어린이공원에 있는 마포종점 노래비(은방울자매 노래/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가 원조를 다툰다. 둘 다 1997년에 세워졌다. 노래는 마포종점이 먼저 나왔을 것인데,(1968년) 당시 은방울자매(박애경, 김향미)에 의해 불려진 이 노래는 정말로 옥쟁반에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와 가락을 타고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였다.
이 노래의 노래비는 2020년에 서울 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됐다. (서울시 미래유산 1호는 2014년 지정된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의 서울 강북구 수유동 자택) '마포종점'의 노래비가 세워지고 서울 미래유산으로도 제정되었다는 것은 분명 그 노래에 특별함이 있다는 뜻일 게다. (건축물이 아닌 노래비가 서울 미래유산으로도 제정된 예도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그 특별함이란 대체 무얼까?
여기서 말하는 마포종점은 20세기 서울 시내를 달렸던 노면 전차 서대문~마포 노선의 종점을 가리킨다. 당시의 전차는 요즘의 전철과도 비견할 수 있는 중요 교통수단으로 다른 대중교통수단이 없었던 서울 시민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말(馬)과도, 발(足)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전차의 역사는 대한제국 광무 3년까지 올라간다. 한성의 전차는 의외로 얼리 어답터였던 고종황제에 의해 1899년 5월 17일 서울 경희궁 앞에서 첫 운행을 개시했다. 1894년의 교토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도쿄보다도 3년 앞선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전차는 인기만점이었으니, 그해 발전소와 함께 건립돼 서울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개통시킨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의 한성전기회사는 대박을 쳤다. (75㎾ 600V의 직류 발전기 1대가 설치된 발전소가 흥인지문 근방에 세워졌다)
이 노선은 총 길이 약 8 킬로미터의 단선궤도로서 평균 시속 5마일(8㎞)로 운행되었다. 전동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전용 귀빈차 1대로 편성되었으며 운전수는 교토(京都)전차회사 출신의 일본인 경력자를, 차장은 조선인을 고용했다. 이 같은 전차의 운행은 당시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니 남녀노소 누구나 타보고 싶어 난리가 났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불상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통 10일째 되는 날 종로2가에서 다섯 살된 아이가 치어 죽는 등) 노선을 늘여가 이듬해인 1900년에는 남대문에서 구용산까지 연장되었으며 용산의 포구에서부터 성내까지 화물 수송도 개시하였다.
하지만 어느 선에 오르자 수익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콜브란은 슬슬 발을 뺄 궁리를 했던 바, 1909년 통감부의 공작 하에 조선정부의 합자회사였던 한미전기회사를 일본측에 팔아 넘겼다. 이에 고종은 격노하여 펄펄 뛰었으나 콜브란은 이미 영국으로 튄 후였다. 이에 조선 철도산업과 더불어 전차 운행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으니 한일합병조약 이후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노선을 대폭 증강시키며 운영을 개선했다. 그리고 이때 노선 증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서 경복궁의 서십자각 및 한양도성이 파괴되었다.
일본인의 전차 사업은 1920년 이후 서울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며 번창을 거듭하였으니 신용산, 왕십리, 노량진 등 외곽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서대문~마포 구간은 1907년 개통) 부산에서도 1915년 11월 1일 전차 노선이 개통돼 부산역~온천장 구간을 운행했으며, 이듬해 대청정선(부산역-부산우체국-대청동-보수동-부평시장-토성동)이, 1917년에 장수통선(부산우체국-광복동-토성동)이 개통했다. 이어 1923년에는 평양에서도 전차가 운행되었다.
1929년에 이르러서는 처음 개설되었던 서울 노선은 모두 복선화되고, 1936년 서대문~마포 간 복선화에 이어 한강교~노량진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1938년에는뒤늦게 창경원~돈암동네거리 간의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혜화문이 헐리고 혜화동 고개의 레벨도 7m 정도가 깎여 낮아졌다. 그때까지 혜화동이 종점이었던 전차노선을 돈암동까지 연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서, 돈암동 노선이 늦게 개설된 건 이 고개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이 서울의 노선은 해방 이후까지 이어진다)
1941년 완공된 이 노선의 돈암동 전차 종점은 성신여대 앞 올리브영 건물 자리로, 이곳에 차량기지 사무실도 있었다. 서쪽의 마포 종점은 마포구 마포대로 20길 불교방송국 자리로, 지금 그곳에는 '마포전차종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표석에 '3·1독립운동기념터'가 병기돼 있는 이유는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군중 천여 명이 다시 이곳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기 때문이다.
혹시 "왜 돈암동종점 노래는 없고 마포종점만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답을 한다면 의외로 간단하다. 당시 돈암동에는 유행가 작사가가 살지 않은 까닭이다. 반대로 당시 마포에는 정두수가 살았으니 그는 자신이 보아온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과 '여의도 비행장'과 '당인리 발전소'를 갈 곳 없던 어떤 여인의 실화와 버무려 슬픈 노랫말을 썼고,* 박춘석이 이에 걸맞은 애절한 곡을 만들었던 것이다.
* 작사가 정두수는 마포의 설렁탕집주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가난한 젊은 부부의 사연을 듣고 노래 가사를 썼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부부는, 남편은 박사 코스를 밟으며 학비를 위해 대학강사 등의 일을 하였고 아내 역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자정이 가까워지면 마포종점에 나가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사망하게 되고 아내는 실성하여 밤만 되면 마포종점에 나가 돌아올 리 없는 남편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나무위키>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 하나
첫사랑 떠나 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 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그런데 얄궂게도 '마포종점' 노래가 발표된 1968년은 서울에서 전차가 운행된 마지막 해가 되었다. 어느덧 늘어난 버스와 승용차로 인해 전차는 오히려 교통의 장애물이 되었고, 시설의 노후화로 승객도 격감했던 바, 1968년 11월 29일 종로행 왕십리발 전차를 마지막으로 운행이 영구히 중단되었다. 부산에서도 1968년 5월 19일을 마지막으로 전차 운행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서울의 전차는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어린이과학관에서 보존 중이며 부산의 것은 동아대석당박물관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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