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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마리의 십자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9. 3. 23:25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는 신라와 당나라가 싸운 곳이다. 668년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마저 멸망시킴으로써 대망의 삼국통일을 이루어냈지만 이번에는 당나라와 싸워야 했다. 신라의 원군으로 왔던 당나라 군사는 실은 삼국을 모두 들어먹기 위해 온 놈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나라와의 전투가 파주 칠중성, 연천 매소성, 금강 기벌포 등에서 벌어졌는데, 신라는 그 싸움에서 당나라 50만 대군을 물리쳐 한반도를 지켜냈 수 있었다.

     

    신라군은  675년 연천에서는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당+말갈의 20만 대군과 싸웠고, 672년 파주에서는 설인귀 (薛仁貴)가 이끄는 비슷한 숫자의 당나라 대군과 싸웠다. 설인귀는 파주 전투에서 왕창 패해 퇴각했는데, 설인귀가 말을 타고 정신없이 도망갔다는 고개가 설마치(薛馬峙) 고개다. 근방에는 설인귀봉이라는 산 이름도 남아 있다. 높이는 675m로 부근의 감악산과 똑같다.

     

     

    파주시 적성면의 칠중성 흔적
    감악산 정상의 몰자비 / 풍화로 글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오랫동안 설인귀비(碑)로 알려져왔다. 최근에는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로부터 약 1300년이 지나서 이번에는 이곳에서 중공군과 영국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1951년 4월 공세(제5차 공세)의 주 공격선으로 서부전선을 택한 중공군은 유엔군 4개 사단 섬멸과 서울 점령을 목표로 3개 병단을 투입했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북한군 1군단이 추가 배치되었던 바, 이곳 파주 연천 지역에서의 중공군+북한군의 병력은 국군+유엔군 병력의 거의 10배에 달했다. 다른 어떤 전선보다 가장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보이는 곳이었다.

     

    당시 파주 지역을 지키던 영국군 29여단 1대대(일명 글로스터 대대) 800명의 군사는 산 중턱의 칠중성에 진지를 구축했다. 칠중성이 있는 곳은 149m에 불과한 낮은 야산이었지만 임진강과 그 너머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지였다. 영국군도 그곳의 지리적 이점을 한 눈에 알아보고 칠중성에 진지를 만든 것이었으나, 당시 옛 성채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성 터만 있는 상태였다.(다만 진지 구축에 옛 성채를 활용한 흔적은 있다)

     

     

    칠중성에서 바라본 임진강

     

    4월 22일 저녁, 드디어 중공군이 임진강을 건너 캐슬고지로 진격해왔다. 영국군 29여단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끊임없이 총을 쏴댔지만 적들은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영국군은 결국 진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군은 감악산 설마치 계곡 쪽을 택해 도망갔다. 그리고 다음날인 23일 감악산 능선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군에게 SOS를 보냈다. 하지만 중부전선의 미군도 중공군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던 바, 답이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지원을 거절하고 영국군에게 빨리 빠져나올 것을 지시했다. 

     

     

    임진강을 건너 캐슬고지로 진격하는 중공군
    방어하는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설마리 전투 전황도 / 붉은 화살표가 중공군 공격로
    중공군이 밀려온 설마치 계곡

     

    그러나 그때는 이미 후퇴도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계곡으로 밀려드는 중공군들과의 사투를 벌어야 했는데, 그것이 무려 이틀, 그리고 상대한 병력은 중공군 주력부대인 제63군 3개 사단 4만2천명이었다. 반면 아군은 배속된 벨기에·룩셈부르크군을 포함해 800명 정도였다. 무려 50:1의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는 총 사흘을 버텼다. 그리고 그동안 일곱 차례의 공세를 막아냈으나 결국 4월 25일 각개 후퇴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야포 공격을 하는 글로스터 대대
    제임스 칸(1906~1986) 중령

     

    글로스터 대대는 이미 탄약, 식량, 구급약도 바닥난 상태였으니 사실 자력 철수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하지만 전선을 책임지려는 대대장 칸(J. P. Carne) 중령의 결심이 후퇴를 막은 것인데, 그도 마침내 최후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제군들도 알다시피 미군도 적의 공격을 받아 우리를 돕지 못하는 상황이다. 제군들은 알아서 이 사지를 벗어나길 바란다. 나는 부상병들과 함께 여기 남아 제군들의 철수를 엄호하겠다. 모두 건투를 빈다."

     

    이렇게 후퇴가 결정되었으나 그들이 사지를 여하히 벗어나게 될 지는 의문이었다. 부대원 800명 중 무사히 귀환한 자는 겨우 59명이었고, 칸 중령은 포로가 되었다. (장교 21명 사병 509명, 전체 530명의 포로 중 153명은 부상자였다) 영국군 29여단 1대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흘간의 필사적 저항으로 인접 전선의 유엔군들은 후퇴할 시간을 벌었고, 미군과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서울을 지킬 수 있는 귀중한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결국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는 뜻을 못이루었고 서울 재점령의 꿈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살아 남은 글로스터 대대의 부대원

     

    즉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이 중공군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던 바, 영국군(벨기에 소총부대 및 룩셈부르크 야포 지원군 포함)의 설마리 전투는 6.25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시행된 고립방어의 대표 전례로 기록되었으며, 글로스터 대대는 6.25전쟁 기간 가장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부대로서 귀감이 됐다. 

     

    * 벨기에는 한국 전쟁에 3172명의 군인이 자원해 참전했고 이중 101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500명이 부상을 당했다. 룩셈부르크는 85명의 군인이 참전했는데 2명이 전사했고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국 전쟁은 룩셈부르크가 전투병을 파병한 유일한 전쟁이다.

     

    아래 설마리 계곡에 조성된 영국군 전적비의 절벽 뒤에는 원래 동굴이 있었다. 영국군은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을 이 동굴에 감추고 돌을 메워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은 후 퇴각했다가 이 지역을 수복한 후 시신을 수습해 가져갔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군은 그때처럼 돌벽을 세우고 그 위에 4개의 비를 새겨 부착시켰다. 위쪽에 있는 비 2개는 왼쪽에는 유엔기를 새기고 오른쪽에는 희생된 글로스터 대대의 부대 표지를 새겼으며, 아래쪽은 한글과 영문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기록하였다.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

     

    포로가 되었던 칸 중령은 종전 직전 포로 송환으로 풀려났다. 그는 붙잡혀 있는 동안 희생된 부대원들을 기리며 주변의 돌을 소재로 5인치(13cm) 높이의 켈트 십자가 3개를 조각했다. 켈트 십자가는 영국 켈트족 고유의 십자가로서 세로축이 훨씬 길며 가운데 둥근 원이 있는 십자가였다. 따라서 새기기도 매우 난해했을 것이나 그는 오직 못 하나로 십자가들을 조각했다. (이 십자가는 실제로 포로 수용소 예배에 사용됐다고 한다)

     

     

    칸 중령이 새긴 켈트 십자가
    십자가를 새기는 칸 중령의 모습
    영국 글로스터박물관이 소장했다가 2014년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 기증된 칸 중령의 권총
    포로 송환으로 풀려나 글로스터 대대 소총수 로날드 그린이 1953년 사우스햄스턴 항구에서 가족들과 재회하는 장면

     

    고국으로 돌아온 칸은 이 십자가를 코츠월드(Cotswold) 글로스터 대성당(Gloucester Cathedral)에 기증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의식 같은 것일 터이다. 그 십자가는 성당의 신도들과 관람객들에게 전시되다 지금은 '영예로운 보물'로서 글로스터 대성당 금고에 보관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십자가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에 기증되었고, 그 대형 복제품이 파주시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건립됐다. 

     

    영화 해리포터의 무대가 된 글로스터 대성당
    글로스터 대성당의 내부
    설마리의 십자가

     

    아래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은 영국의 유명한 디자이너이자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아놀드 마틴 슈워츠먼이 1957년 조성한 영국군 전적비를 바탕으로 2014년 파주시에 의해 건립되었다. 추모공원이 설립된 곳은 한국전쟁 때 글로스터 대대와 중공군과의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다. 

     

    한국전쟁 당시 영국 미국 다음으로 많은 56,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장진호 전투와 가평 전투를 치렀으며 약 5,000명이 사망, 부상, 실종, 포로가 되는 희생을 치루었다.(전사 1,078명 부상 2,764명 실종 179명 포로 978명) 이는 이후 영국이 치른 포틀랜드 전쟁,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전사자 숫자보다도 많았다. 

     

     

    평화의 문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 입구
    글로스터 대대의 베레모를 형상화한 추모 조형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모뉴먼트
    영국군 동상
    영국군이 후퇴한 설마치 계곡
    추모공원 진입로에서 보이는 감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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