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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극기는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0. 23. 08:55

     

    2020년 중국의 ‘一站到底’라는 퀴즈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태극기를 설계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왔고, "마젠중(마건충)"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정답이었다는 이야기를 앞서 한 바 있다. 이후 중국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또 한 바탕 한국 비하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하지만 태극기의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니, 현재까지도 대다수의 중국인은 중국에서 제작해 하사했다고 믿고 있고, 심지어는 한국 블로거들 중에서도 마건충이 제작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차제에 이 문제를 차근차근 짚어보도록 하겠다. 

     

     

    예를 들자면 이런 반응 / 대충 해석하자면, "한국인은 시건방지다. 자신들의 국기를 중국인이 디자인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들이."

     

    태극기를 말하려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중국 정치가 황준헌(黃遵憲, 황쭌셴)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책부터 다시 짚어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조선책략>은 1880년(고종 17)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홍집이 당시 청국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으로 근무하던 황준헌이 지은 <내가 생각하는 조선의 방책(私擬朝鮮策略)>이란 책을 기증받아 귀국한 후 고종에게 바치며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 책이다. (이후 책의 제목을 줄여 <조선책략>이라 불려졌다)

     

    그 내용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것은 러시아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결론은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하여 자강(自强)하라"(중국을 더 가까이하고, 일본 미국과 손을 잡아 조선 스스로 강해짐으로써 러시아를 막으라)는 것이었다. 사실 황준원의 속내는 막강한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조선도 끌어들여 대항하려는 중국의 바람을 대변한 것이었지만, (황준원은 중국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엉뚱하게도 조선의 조야에서는 황준원을 나쁜 놈으로 성토하는 분위가 일었다.

     

    황준원과 <조선책략>

     

    그것이 중국이 우리나라를 이용하려는 수작임을 간파했다면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실상은 그 정반대로, "조선이 어찌 감히 상국(上國)인 중국을 저버리고 일본·미국 따위의 오랑캐와 손을 잡느냐", "만일 중국에서 이런 것이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문책하려 든다면 어떻게 해명하겠느냐"고 따진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책략>이라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서적을 들여온 김홍집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들끓었다.

     

    이것이 '우물 안 개구리' 조선의 현실이었다. 중국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열강에 무릎을 꿇은 지 오래이건만 여전히 애오라지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드는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이 팽배하고, 성리학만이 학문의 전부인 조선인 것이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황준원이 제시한 방아책(防我策)은 물 건너가게 되었는데, 다만 그가 <조선책략>에서 말한 국기 제정의 필요성은 인정받았다. 그때 조선은 나라를 대표하는 국기가 없었던 바, 당장 논의되고 있는 미국과의 수교회담에 있어서도 국기 없이 임해야 되는, 세계의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여야 했다. 

     

    그렇다면 황준원은 조선 국기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 그는 조선에도 국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후, 중국의 국기인 용기(龍旗=황룡기)를 모방한 국기를 만들어 전국에 걸라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황색(黃色=황제의 옷색깔)을 그대로 따라 하면 안 되니 조선국왕의 복색문양과 조야복색 등을 참고해 흰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이 나는 '청운홍룡기'(靑雲紅龍旗)'를 만들라고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즉 중국은 황제국이니 황제의 옷 색깔인 황룡기가 타당하고, 조선은 종속국이니 임금의 붉은 옷색깔을 배경이나 문양으로 삼은 용을 만듦이 옳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황준원 역시 중국인의 사고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인데, 만일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 제정에 관여했다면 그도 틀림없이 황준원의 주장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 정계의 제1인자를 제멋대로 체포해 중국으로 압송시킨, 조선을 제 발바닥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위인이었기에.(☞ '흥선대원군이 붙잡혀간 동관왕묘')

     

    이쯤에서 당시 청국의 국기를 보자면 아래와 같다. 청나라도 본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국기의 개념이 없었던 바, (어차피 서양에서 건너온 제도이기에) 1862년까지는 국가의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1862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의 함선을 사오면서(중국 세관 총세무사 로버트 허트의 권유에 의해) 국기의 제정이 요구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함선을 운행할 인력이 없었기에 함대의 운용은 영국 기술자와 중국 군대가 어우러진 청나라·영국의 연합함대식으로 이루어졌는데,(일명 오스본함대) 영국측 함장인 레이 넬슨이 함선에 게양할 국기의 제정을 요구함과 동시에 자신도 도안을 냈다. 영국국기와 중국의 용을 함께 그린 디자인이었는데, 이 가운데 용(龍)만 채택되었던 바, 그것이 황룡기의 원조인 삼각형 형태의 금룡기(金龍旗)였다.  

     

     

    Lay Horatio Nelson (한자명 李國泰)
    1862년 10월17일부터 사용된 삼각형의 금룡기(金龙旗) = 황적남용창적주기(黃底藍龍戲紅珠旗) / 노란색 삼각형 바탕 안에 붉은색 여의보주를 바라보는 파란색 용이 그려져 있다.

     

    금룡기는 1862년부터 1889년까지 게양되었으나 그리 활발히 쓰이지는 않았다.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되면서 오스본함대가 곧 해체된 것도 원인이었다. 그러다 아시아 최대 함대인 북양함대가 조직되고, 1889년 북양대신 이홍장이 해군기와 국기를 따로 구별하며 사각형의 황룡기가 만들어져 쓰이게 되었다. 배의 국적와 용도를 식별함에 있어 깃발의 효용은 절대적이었던지라 이홍장은 적극적으로 국기와 군기를 사용할 것을 명했다. 이홍장이 채택한 황룡기는 앞서의 금룡기와 별반 다름없었으나 삼각형이 서양의 국기들과 너무 차별적이라 하여 서태후에게 사각형으로 바꿀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1889년부터 쓰인 황룡기

     

    조선이 미국의 슈펠트 제독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1882년 음력 4월 6일(양력 5월 22일), 그 회담장에 조선의 국기가 등장했는지의 여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마건충이 외교고문으로서 묄렌도로프와 더불어 조선에 건너오는 것은 1882년 음력 10월 경이다. 따라서 만일 그가 조선의 국기 제정에 관여했다 하더라도 그 모양은 중국의 황룡기를 모방한 삼각형의 청룡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온라인 상에 아래와 같은 깃발도 떠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깃발

     

    그런데 1882년 미국과의 수교 이전, 이미 태극문양과 4괘를 갖춘 태극기가 출현한 증거 자료가 있어 관심을 모은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Navy Department) 항해국(Bureau of Navigation)이 출간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책에 수록된 COREA의 국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라고 하는 데니 태극기와 4괘의 방향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쩌면 이 태극기는 1882년 5월의 조·미수호통상조약 현장에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박영효가 일본 가는 배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교과서 상의 최초 태극기보다도 앞선다.

     

    그렇다면 이 태극기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제작자는 누구일까? 그 비밀을 2편에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1882년 미 해군성 자료의 중국 국기와 태극기
    최초의 태극기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 / 데니(Owen N. Denny)는 1886년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외교고문이 된 미국인이나 고종의 뜻에 따라 한국 편을 들다 청나라의 미움을 받아 1890년 파면돼 축출된다. 이 태극기는 그때 고종이 데니에게 기념으로 준 것이다. (2021년 대한민국의 보물 제 2140호로 승격됐다)
    위 자료 속의 태극기와 다른 나라 국기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에 세워진 표석 / 2013년 조약체결지가 확인되어 2019년 6월 송학동 자유공원 입구에 기념 표석을 세웠다. 그러다 2021년 표지 제목과 안내문에 영문이 빠져있다는 시민 의견이 제기되어 2021년 11월 새로운 표석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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