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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극기를 만든 이응준은 응징되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0. 24. 23:01

     

    * 1편에서 이어짐

     

    먼저 우리나라 태극기가 만들어질 무렵의 청나라 국기 금용기(金龍旗)를 다시 게재하고자 한다. 이 그림을 싣는 이유는 설령 중국이 주장하는 마건충 론(청나라 외교관 마건충이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이론)을 제고한다 해도 절대 지금과 같은 사각형에 태극 문양과 4괘를 가진 국기가 만들어질 수는 없으며, 만에 하나라도 마건충이 조선 국기를 만들었다면 금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1862년부터 1889년까지 사용된 삼각형의 금룡기(金龙旗) = 황적남용창적주기(黃底藍龍戲紅珠旗)

     

    이와 같은 추정을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조선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최초로 언급한 황준원(황쭌센) 저(著) <조선책략>의 내용에 따름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조선에도 국기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 후, 중국의 용기(龍旗=금룡기)를 모방한 국기를 만들라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외람되게) 중국의 황색(黃色=황제의 옷색깔)을 따라 하면 안 되고, 조선국왕의 복색(服色) 등을 반영해 흰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이 그려진 '청운홍룡기'(靑雲紅龍旗)'를 만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한미수교 장소(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에서 중국을 생각하다'에서도 언급했지만 황준원이 <조선책략>을 써 의도적으로 조선에 반입시킨 것은 이홍장의 계략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에도 조선만은 속방으로 두기를 원했기에 <조선책략>을 통해 '친중국(親中國)하고 결일본(結日本)하며 연미국(聯美國)해야 제국주의 러시아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다'는 수작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노려 조선을 칩입해도 청나라가 이에 대항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홍장은 부하인 황준원에게 이와같은 방책을 실은 책을 써 일본에 온 조선사신에게 전달하게 만들었음이었다. 

     

    이때가 1880년이니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 제정에 관여했다면 필시 금용기의 아류를 만들었을 터이지, 생뚱맞게 중앙 태극에 8괘나 4괘를 배치한, <태극도설>에 입각한 복잡한 디자인을 제안했을 리 없을 것이다. (<태극도설>이란 책 자체가 접근이 쉽지 않은 복잡한 책이다) 아래는 다른 블로그에서 마건충이 디자인했다고 주장하는 팔괘태극기를 옮겨온 것이나 당시는 이와 같은 태극기가 등장할 계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팔괘태극기 / 우주 음양의 원리를 '태극도설'로써 설명한 송나라 주돈이의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뜻은 좋으나 당시 이와같은 태극 8괘가 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생뚱맞다.
    우주만물의 생성과 소멸 원리를 설명한 주돈이의 <태극도설>
    <주역>을 새롭게 풀이한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자연과학의 이론을 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척 사고까지 피력했던 바, 송대 주자(朱子) 성리학의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 블로거들 중에서는 고종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분의 주장인즉 고종 임금께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 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일본에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가는 박영효에게 내렸고, 이에 의거한 국기를 박영효가 대한해협을 건너가는 메이지마루(明治丸) 배 위에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최소한 2004년 전까지) 1882년 9월 21일(이하 양력) 일본에 (임오군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가 메이지마루 선상에서 그려 1882년 9월 25일 일본 숙소에 게양했다는 것이 정설로서, 교과서에까지 그렇게 수록돼 있었다.

     

    위의 고종 디자인설은 친일파 박영효가 우리나라의 태극기 제작자라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근거나 개연성은 전혀 없다. 무엇보다 고종은 얼리어답터로서 새로운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은 좋아했으나 무엇에 집착해 연구하는 성격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갑자기 태극기 도안에 천착했을 리 만무하다.

     

    박영효의 태극기 제작설은 그의 일기인 <사화기략(使和記略)>의 내용에 의거한 것으로, 거기에는 분명 자신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新製國旗縣寓樓旗等白質而從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四卦會有受命於上也)  그리고 이 태극팔괘도를 영국 영사 아스톤에게 제시했는데 영국인 선장 제임스가 "너무 복잡해 식별이 어렵다"는 의견을 내 8괘를 4괘로 고쳤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내용은 1882년 9월 이전에 제작된 태극기가 발견됨으로써(앞서 말한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 항해국 출간 서적) 진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다만 아예 생판 거짓은 아니니, 그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태극·8괘 도안의 디자인이 나와 있었고, 박영효는 그것을 상기해 국기를 만들어 게양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무튼 태극·4괘의 태극기는 이듬해 6월 조선의 국기로서 정식으로 반포됐다.  

     

     

    일본 중요문화재로서 도쿄해양대학에 전시된 메이지마루 호

     

    박영효의  것이 최초의 태극기가 아님은 2004년 1월, 한국의 고서점에서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 항해국(Bureau of Navigation)이 출간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책이 발견되며 밝혀졌다. 거기에 위의 조선(COREA) 국기가 태극기의 형태로서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당시 제작된 다른 나라의 국기도 함께 있었고, 3000부를 제작해 각 기관에 분배하기로 1882년 7월 19일 상원에서 결의되었다는 내용도 실려 있었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Navy Department) 항해국이 출간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에 수록된 태극기

     

    즉 이 책은 세계 국기 식별법에 관한 책으로서 그해 5월 미국과 수교한 조선의 국기도 들어가게 됐던 것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1882년 음력 4월 6일(양력 5월 22일), 조선이 미국의 슈펠트 제독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현장에 양국의 국기가 게양되었음은 거의 확실하고, 슈펠트 제독이 사전에 그것을 요구했다는 풍문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이 책의 발견은 위대한 것이었는데, 그 사실을 제보받은 조선일보는 특종을 쳤다.

    가장 오래된 태극기 발견을 보도한 조선일보 2004년 1월 27일자 기사

     

    이후 태극기 제작연도 등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여러 진척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것을 종합하면 황준원의 <조선책략> 소동 이후 조선에서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공주부윤과 충청도 관찰사(1895년)를 지낸 수여재(隨如齋) 이종원(李淙遠, 생몰년 미상)1881년 고종에게  태극팔괘 도식(圖式)에 의거한 디자인을 제출한 것이 태극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식 국기로 만든 사람은 역관(譯官) 이응준(李應浚, 1832 ~ ?)이었다고 공통적으로 서술한다.

     

    나아가 조·미수교 당시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 국기와 비슷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는 주장도 나왔다.(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

     

    * 슈펠트 제독이 수교조약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라는 문구를 명시할 것을 요구한 이홍장을 배격하고, 자국(自國)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 호혜평등에 입각한 조약문을 체결하였다는 사실을 '격동기의 미국공사대리 조지 포크' '청일전쟁에 내몰려 청·일로 나뉘어 싸운 조선군'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슈펠트가 양국 국기의 게양을 요구한 날이 5월 14일이라는 것, 이때 슈펠트의 의도를 알아차린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만들 것을 명하였고, 이에 이응준이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에 미국 함정인 스와타라(Swatara) 호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하여 이 국기가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나란히 걸리게 됐다는 연구 발표도 나왔다. (마찬가지로 김원모 교수의 학설로, 이상의 사실은 당시의 태극기가 '1882년 9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가 만든 국기보다 4개월 앞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위키백과'에 실렸다)  

     

    * .김원모 교수는 <해양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 속 태극기 4괘의 좌우가 바뀐 것에 대해서 "미국측에서 조인장에 내걸린 조선 국기를 반대편에서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그런데 이후 2018년 8월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슈펠트 문서 박스' 속 '한국 조약 항목'에서 김원모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태극기 그림을 발견했다.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와 동일한 그림으로 태극기 위에 ‘COREA’, 아래에 ‘Ensign(깃발)’이라 적힌 것까지 똑같았는데, 여기선 손으로 쓴 글씨였다. 말하자면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의 원본인 셈이었다.

     

    그리고 문서 말미에 (태극기 그림에 날짜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이 문서가 1882년 6월 11일 작성된 것임을 밝혔다. 슈펠트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다시 조선을 방문한 일이 없으므로 이 태극기는 조인식 현장에 게양됐던 바로 그 태극기인 셈이다. (이 사실을 보도한 조선일보는 다시 특종을 냈다)  

     

     

    이태진 교수가 발견한 태극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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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때도 (슈펠트의 요구에 의해 이응준이 국기를 만들 때도) 마건충이 대단히 불쾌히 여겼다는 설이 있다. 당시 마건충은 북양대신 이홍장을 대신해 회담장에 나온 대표였고,(마건충은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 졸업자로 불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능했다) 이응준은 조선측 역관이었다. (마건충은 슈펠트와 영어로 대화했고 이응준은 마건충의 중국어를 받아 통역했다) 이 당시 마건충은 국기 제작의 임무를 맡은 이응준에게 청나라 국기를 모방한 국기를 만들되 크기를 작게 하고 사조룡(四爪龍)의 용을 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했으나 이응준이 이를 무시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나오자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  발톱이 4개인 사조룡(四爪龍)은 제후를 상징하고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은 황제를 상징한다. 

     

    그래서였을까, 1889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던 이응준은 귀국 즉시 체포돼 의금부에 구금되었는데, 실록에 적혀 있는 사정은 다음과 같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북경 예부(禮部) 자문(咨文)을 보니, '지금 돌아가는 사신 편에 따라왔던 역관 이응준이 독자적으로 자문을 올리는 일까지 있었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문제는 조정에서도 알지 못하는 것인데 저 하찮은 역관이 제 딴에 구실을 대고 큰 수치를 끼쳤으니 일의 체모로 생각하더라도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응준이 돌아오길 기다려 의금부에서 나핵(拿覈)하여 엄히 감처(勘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자문 중에는 조선에서 망령되게 말한 것을 조사하여 황제에게 보고한 문건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의 대략에,

     

    "원세개(袁世凱)가 보낸 전보에서, '조선국왕이 이응준에 농락을 당하여 2만여 금(金)의 뇌물을 예부에 주고, 사신 파견을 그만두기로 윤허를 받았다' 하였습니다. 특사 등의 말이 한편으로는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 전보를 치고, 한편으로는 이어 원세개를 신칙하여 진지하게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이번 조사 보고에 근거하면 이응준은 왕을 속이고 재물을 가로챘으며 본래 뇌물을 먹인 사실이 없으니, 이것은 사실 4역관(譯館)의 사원(司員), 서리(書吏)들과는 모두 관련이 없고, 이응준이 협잡을 부려서 제 뱃속을 채운 것입니다. 원래 근본을 따져야 하겠지만, 이 문제 때문에 깊이 파고들어 다른 문제에서 말썽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미 원세개에게 신칙하여 그 나라 정부에 통지해서 국왕이 금지하도록 전달하였습니다"고 하였다. (<고종실록> 26권, 고종 26년 3월 30일 기사)

     

    조선의 다른 관리나 역관은 아무도 연루되지 않았다 하고 오직 이응준만을 지목해 독직의 죄를 씌우고 있는 청나라의 처사..... 그 죄를 고발한 자는 다름아닌 위안스카이로 마건충 이상으로 조선에 횡포를 부린 바로 그자였다. 전황을 살펴보면 이응준이 청나라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라는 밀명을 받은 뒤 미처 실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횡령죄를 뒤집어 쓴 것으로 보이나, 이 사실을 청나라 조정에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세세히 알고 있는 것이 몹시 수상쩍다. 이응준의 죄는 독직이 아닌 괘씸죄가 아니었을까?

     

    무엇이 괘씸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응준은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이후로는 그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이응준은 1850년 증광시 역과에 2위로 합격해 역관이 된 뒤 일선 외교관으로 조선의 권익을 위해 뛰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국기를 제작하였던 바, 그것이 우리의 태극기다.  

     

    * 태극기에 관한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태극 문양이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삼국시대부터 사용돼 온 우리 고유의 문양이라는 해석과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분은 신라 682년에 세운 감포 감은사지 장대석에 새겨진 태극문양이 송나라 주돈이의 태극도설보다 388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음양의 괘(掛) 또한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고 했다. (문화재청의 설명으로는 2009년 나주 복암리 고분 출토 목간에 그려져 있는 태극이 원삼국 때의 것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몇 번이나 감은사지에 갔어도 몰랐는데,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수학자인 백인수 부산외대 교수와 김태식 경주대 교수는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의 수리천문학적 의미'(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제11권 제3호)라는 논문에서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은 7세기 신라인들의 응집된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오래된 천문교과서"라고 해석과 함께 이와 관한 상세한 도해(圖解)를 올린 바 있다. 두 교수는 논문에서 "사찰에서 책력 및 위도와 관련된 천문학적인 도형을 가지고 있는 석조물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라고 밝혔다.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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