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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안영(모택동 아들)과 팽덕회의 死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0. 28. 05:56

     

    지난 25일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 중국인민지원군열사릉 소재 모안영(毛岸英, 마오안잉)의 묘에 헌화하고 참배한 사실을 보도했다. 10월 25일이 중국의 항미원조기념일(한국전쟁 참전기념일)이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19일 소리 소문 없이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제15연대를 기습공격해 패퇴시켰는데, 중국은 한국군에 첫 승리를 거둔 이 날을 항미원조기념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북한과 중국이 불편했던 시기인 문화혁명기의 어느 때, 그래서 김일성이 모안영 무덤 앞의 비석을 치워버렸던 그 시절(1965~70년)을 제외하고는 북한은 늘 이맘때 중국인민지원군열사릉과 모안영의 묘에 헌화하고 참배한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평양의 중국인민지원군열사릉, 특히 모안영의 무덤은 북중우호의 상징 같은 곳이다. 한국전쟁 때 중국이 위험한 참전을 결행했던 것을 무엇보다 모택동의 결단이었는데, 그때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전사한 모택동 아들의 무덤인 까닭이다. 

     

     

    7월 27일 정전 65주기를 맞아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와 중국인민지원군열사릉원을 찾은 김정은
    모안영의 묘

     

    그래서 북한의 모안영에 대한 사랑은 지대하다. 중국 중앙방송텔레비전(CCTV)은 지난 2010년 한국전쟁 참전 60주년을 맞아 모안영의 일대기를 담은 <모안영>이라는 36부작 드라마를 제작해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후 북한 조선중앙TV는 <모안영>을 3번이나 방영하였다. 보지 않아서 모르기는 하지만, 한국전쟁에 임해서는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을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 중공군은 1950년 10월에 18개 사단 26만여 명, 11월 초에는 12개 사단 12만여 명이 우선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 단교 위의 항미원조 기념물 /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을 조형했다. 가운데가 사령관 팽덕회, 오른쪽이 모안영이다.
    참전 무렵의 모안영(1922~1950) / 그는 당시 결혼한지 1년 된 신혼이었다.
    YTN에서 보도했던 드라마 <모안영>

     

    하지만 그는 적과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것이 아니라 동창군의 제 거처에서 계란볶음밥을 해 먹다 미공군의 공습에 폭사했다. (이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모안영은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彭德懷,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했으므로 일선에서 싸울 일도 없었다. 혹자는 그가 일선을 자원해 투입될 예정이었다 말하기도 하지만, 죽기 전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것이 사실이었다 해도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모안영은 미군 공습 중에는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명령도 이행하지 않았고, 특히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어기고 계란볶음밥을 위해 불을 피웠으며, 결국 그 연기가 표적이 되어 죽었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당시 사령부의 중요지시는 첫째, 미공군의 공습이 예상되니 새로운 방공호를 구축할 것, 둘째, (공습이 없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끝내고, 당직자 외에는 4시 전 지정된 방공호로 옮겨 대기할 것, 셋째, 새벽 4시 이후로는 모든 거처에서 연기를 피우는 일을 엄금할 것 등이었다.

     

    그런데 모안영은 이 모든 것을 어겼으니, (3시에 일어나 밥을 먹은 것만 빼고) 당직 임무가 없음에도 방공호로 피신하지 않은 채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다시 잠을 자다 오전 9시경 깨어나 난로를 피우고 계란에 밥을 볶아먹었다. 바로 전날 저녁 북한군 차수(대장 위 계급) 박일우가 팽덕회의 사령부에 계란을 갖다 준 게 화근이었다. 전시였던 당시로서는 계란은 귀한 보양식이었기에 나름 선물을 해준 것인데, 그것이 표적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었다. 

     

    그날 11월 24일 모안영의 거처를 공격한 전투기는 F-80 슈팅스타(Shooting Star)로, 아침에 비행에 나갔다가 동창군 대유동의 움막 같은 데서 피어나는 연기를 보고 4개의 소이탄을 투하했다. 그중 하나가 모안영이 있던 사무실에 명중해 사망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군 전투기 F- 80 슈팅스타
    미군 정찰기 P-61 블랙 윈도스
    방공호로 쓰던 대유동 갱 앞의 팽덕회(왼쪽)와 김일성 / 이 갱도는 구한말 미국이 금광을 채취하던 곳이다.

     

    나인문(羅印文)이 집필한 지원군 제1부사령관 등화(鄧華) 장군의 전기에서는 당시의 상황이 보다 자세히 나타나 있다. 당시 사령부의 팽덕회, 등화, 홍학지(洪學智)는 전날 저녁 출몰한 미군의 정찰기(P-61 Black Windows)를 보고 지원군사령부가 발각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혹시 공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와 같은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모안영은 지시를 어기고 연기를 피웠고, 이를 본 양적(楊迪) 장군이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모안영과 당직참모 고서흔(高瑞欣), 그리고 팽덕회의 당번병 성보(成普), 세 사람이 계란에 밥을 볶아먹고 있었다.  


    "지금 뭣들하는 거야?  빨리 난로불을 끄고 방공호로 가!"

     

    양적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상대가 모택동의 아들인지라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사무실을 나왔고, 당번병 성보가 사태를 수습하려는 듯 어정쩡하게 그 뒤를 따라 사무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미군이 발사한 소이탄이 터졌다. 성보는 불붙는 몸으로 뛰쳐나와 재빨리 옷을 벗고 땅에 뒹굴어 불을 껐다. 하지만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던 모안영과 고서흔은 숯이 되고 말았다. 모안영의 시신은 팔목의 소련제 손목시계를 통해 식별됐다.

     

    모안영은 참전한 지 34일 만에 죽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명령 불복종이 사망의 원인이었다. 모안영은 모택동과 두 번째 부인 양개혜(楊開慧) 사이에서 난 맏아들이다. 그는 모친 양개혜 밑에서 자라다가 모친이 국민당 정부에 처형된 후 부친 모택동에 의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이후 모스크바 군사학원을 졸업하고 기갑부대 중위로서 제2차세계대전 독일전선에도 참전했던 바, 알만한 것은 다 알 나이와 경력이었음에도 자신의 뒷배를 믿고 개별행동을 하다 참사를 당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죽을 때까지 절대 권력을 유지하였으므로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모택동의 뒤를 이어 대권을 세습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사무실이 불타는 것을 본  팽덕회는 모안영을 살리려 뛰어들려 했으나 부하들이 필사적으로 잡고 늘어졌다. 그는 모안영의 죽음을 곧바로 부주석 주은래에게 통고했지만, 주은래는 바로 모택동에게 알리지 못한 채 끙끙대다 한 달 이상이나 지나 보고했고, 모택동은 또 며느리 유송림에게 전쟁이 끝난 후에 알렸다고 한다. 모택동은 보고를 접한 후 담배를 물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팽덕회는 그의 시신을 중국으로 운구하려 했지만, 모택동은 다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 다른 전사자와 함께 묻히는 것이 도리라며 반대했다. 그리하여 그의 유해는 평양에 묻히게 되었다. 

     

     

    모안영과 유송림 / 유송림은 1962년 재혼하였고 유사제(刘思齐)라는 이름으로 살다 올해 1월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임에도 중공군의 참전 이후로는 지휘권을 팽덕회에게 넘겨야 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에 대한 각각의 지휘권을 갖기를 희망했던 김일성의 생각은 스탈린이 11월 16일 "중국측에서 통일된 지휘하는 데 동의한다"고 밝힘으로써 무산됐다. 그리하여 결국 1950년 12월 3일 '조선·중국 연합지휘부 성립에 대한 조·중 쌍방 협의문'이 체결되었고,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원하던 대로 전쟁에 관한 단독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김일성은 1951년 5월 춘배산 전투에서 작전을 원활히 이행하지 못한 북한군에 대한 책임으로 팽덕회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 춘배산 전투에서 미군과 국군(미 제24사단, 미 제7사단, 한국군 제6사단)의 공격에 밀린 북한군 제1군단이 일방적으로 후퇴를 하는 바람에 중공군 제180사단은 7,000명이 사상당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화가 난 팽덕회가 김일성을 불러 싸대기 두 대를 날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50년 12월 대유동 갱도 안에 조·중연합지휘부가 설치됐다.
    당시의 김일성과 팽덕회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었던 팽덕회는 모택동과 더불어 한국전쟁 참전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주은래와 임표는 반대함)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모택동이 참전 직전인 10월 13일 10시 주은래에게 보낸 편지, 이른바 '출병결정통지서'가 결정적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강(高崗)과 팽덕회 두 동지 및 기타 정치국 동지들과 논의한 결과, 전원이 우리 군대가 조선으로 출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괴뢰군(한국군)하고만 싸운다. 우리 군대는 괴뢰군과의 싸움에는 자신이 있다. 조선의 평양-원산 이북의 넓은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조선인민을 분발시켜 인민군을 재조직할 것이다. 2개월 후에는 소련 공군의 지원이 가능하며 6개월 후에 소련이 제공한 대포와 탱크로 훈련을 마치면 그때에 미군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전쟁에는 우리가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면 이익이 아주 크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아주 크다."

     

    하지만 팽덕회는 그날 논의에 참석한 적이 없으니, (정확한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팽덕회는 바쁘다는 이유로 회의에 불참했고 대신 그의 참모였던 습중훈(習仲勳,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이 참석해 찬성을 표했다. 팽덕회라면 어쨌을지 몰라도 그는 감히 모택동에게 반대 의사를 표할 깜냥이 못되었다. 그 결과가 반전론자인 부주석 주은래에게 전달됐고 결국 참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참전을 하게 된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일시에 전황을 역전시켰고, 결국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팽덕회는 전선이 교착 상태이던 1952년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953년 중반에 돌아와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에 중국 대표로 참석했다. 덕장(德將)으로 알려진 그는 회담장에서도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로 유엔군 대표들을 맞아 미군 및 유엔군 장교들에게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그는 휴전을 성사시킨 후 돌아가 그 공로로서 국방부장 겸 부총리가 되었고, 1955년에는 군 서열 2위의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수여받았다. 

     

     

    정전협정문에 사인하는 팽덕회
    정전협정문에 사인하는 마크 클라크 / 정전협정은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간에 체결되었다. 이때 클라크는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 휴전에 반대했으나 미국 정부의 압력에 눈물을 머금고 사인을 했다.
    정전협정 후 만찬에서 팽덕회와 김일성이 축배를 들고 있다.
    국방부장 겸 부총리 시절(1954-1959)의 팽덕회

     

    하지만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그 발단은 모택동이  추진한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귀결되던 1959년, 루산(廬山) 회의에서 한 발언이었다. 그는 그해 7월~8월 중국을 시찰한 후 고향 후난성을 비롯한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했다. 그는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모택동에게 노선 전환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로서는 그야말로 조국과 인민을 위해 쓴 충정의 편지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그 편지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팽덕회 편지를 공개회의에 토론 의제로서 올리고 당간부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도록 하였다. 모택동의 의중이 어디 있는가를 간파한 당간부들은 팽덕회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고 팽덕회는 공적(公敵)이 되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됨과 동시에 홍위병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1966년 12월 27일 강청(江靑, 모택동의 3번째 부인이자 문화대혁명 4인방의 한 사람)이 파견한 홍위병들이 팽덕회의 집으로 몰려왔다. 홍위병은 칠순에 가까운 늙은 팽덕회를 몹시도 괴롭혔으니, 마구 구타하여 얼굴과 가슴을 짓이겼고, 그 바람에 늑골이 부러져 폐까지 상할 정도였다. 어떤 여자 홍위병은 달려들어 코를 비틀고 얼굴을 물어뜯기까지 했다. 그러한 상태로 다음날 베이징역에 도착한 그는 홍위병들로부터 군인들에게 인계되었고, 군인들은 만신창이의 노인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조리돌림했다.

     

     

    '반혁명수정주의분자' 팽덕회

     

    그럼에도 그는 의연하였으니 조리돌림 후 군부대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드디어 한 마디를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눈부터 붙이자. 며칠간 한잠도 못 잤다." 광기에서 차단된 군막사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팽덕회의 위엄에 눌린 탓인지 다행히도 막사 안에서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고, 개중에는 훌쩍이는 병사도 있었다. 그를 본 팽덕회가 다시 한마디 했다. "내 걱정 말고 감기약이나 챙겨 먹어라." 그리고 담요를 뒤집어쓰고는 이내 코를 골았다.

     

    팽덕회는 베이징의 감옥에서 거의 10년을 보냈다. 그는 습기 찬 감옥에서 내내 병마에 시달렸으나 치료는 고사하고 물 한 잔도 제때 마시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알았는지 어느 날 모택동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마지막으로 경례를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옥 의무실로 이송되었다가 1974년 11월 29일 암으로 사망했다. 열여덟 살 때 군문에 들어와 장정(長征)을 함께 하고 항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까지 33년 동안 전쟁터를 누볐던 역전의 용사이자 대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였던 팽덕회는 그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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