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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세종·문종·단종·예종·폐비윤씨 태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1. 15. 00:51

     

    태실(胎室)은 왕손(王孫)의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태아의 생명도 귀중히 여기는 인본주의 정신이 강해던 바, 태어날 때부터 바로 한 살을 부여했다. 모태 안에 있었던 10개월의 기간을 1살로 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태 또한 생명력이 부여되었다가 상실한 육체로 간주하여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특히 왕실에서는 신생아의 태를 국운과 관련 지어 소중히 여겼던 바, 태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안치했다.

     

    이와 같이 태를 안치하여 묻는 것을 장태(藏胎)라고 하는데, 장태의 풍습은 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다. 충북 진천 태령산 정상부에 있는 김유신 장군 태실은 경남 함안 진평왕 태자 태실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실 유물로서 우리나라의 태아 존중 문화를 증거한다.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경주가 아니라 진천으로, 만노군(진천군) 태수로 부임한 부친 김서현이 그곳에서 자식을 보았다.

     

     

    충북 진천의 김유신 사당 길상사 / 문화재청 사진
    진천 태봉산 김유신 태실 / 문화재청 사진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출생하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고 길일·길지를 택해 장태하였다. 태실의 관리 또한 엄격히 하였으니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과 벌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였다. 지금은 훼손된 곳이 더 많지만 조선시대의 태실은 왕릉만큼이나 귀중한 장소였던 것이다.

     

     

    세종대왕 왕자태실 / 성주군 월항면 태봉 정상에 세종의 19왕자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훼손된 안평대군 태실 / 19왕자 태실 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훗날 세조에 의해 훼손되었다.
    태실의 구조 / 성주군 생명문화공원 태실문화관
    태 항아리(내/외 항아리)

     

    하지만 조선의 망국과 더불어 전국의 태실은 황폐화되었으니 여러 곳이 도굴당했고, 그곳이 명당이라 하여 민간인이 태실을 파내 제 가족의 시신을 묻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는 이를 핑계로 1929년 전국에 산재한 태실 중  54기의 태실을 발굴해 태 항아리를 옮겨 서울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당주동 임시 보관소나 창덕궁 후원에 묻었다가 서삼릉에 공동묘지와 같은 태실을 만들어 보존했던바, 실상인즉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욕보이려는 의도였다.

     

     

    서삼릉 태실

     

    이후로는 전국 태실의 황폐화가 더욱 가속화되었으니, 어떤 곳은 일제에 의해 팔려 친일파의 무덤들이 들어서기도 하고, 어떤 곳은 깨진 석물들만 나뒹굴고, 또 어떤 곳은 아예 형체를 잃어버린 곳도 있다. 다만 그중 몇 곳은 수습되어 옛 모습이 보존되어 있으니, 왕과 왕비의 태실 중 꼽아 보자면 아래와 같다. 그것이 총 12기에 불과해 그저 무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데, 그나마 대부분이 제자리를 이탈해 엉뚱한 곳에 재건되었으니 그저 가슴만 아플 뿐이다.

     

     

    ▼ 태조태실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만인산 휴게소 뒤편에 있다. 그 모양이 제법 갖춰져 있어 태조 이성계의 것이라 유달리 잘 보존되었나 싶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원래 태조대왕 태실이 있던 곳은 오래전 민간인 묘가 조성됐고, 현재의 석물은 그 묘를 조성한 토지소유주가 35년 전 당시 석물을 반출하려다 주민들이 저지해 현재 위치에 복원된 것이다. 게다가 일대가 그 자의 땅인지라 태조태실을 보기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나 뭐라나.....

     

    태조태실과 원래 위치에 자리한 민간인 묘 / 중부매일 사진

     

     세종태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다.  태실지의 위치는 본래 그곳이 아니고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개인의 묘가 들어서 있다. 세종대왕의 태실지는 정유재란 때 사천에 주둔했던 왜군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현재의 것은 1734년(영조10)에 다시 비석을 세우면서 정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었으니 일제가 서삼릉으로 태실을 옮기며 그 부지를 일반인에게 팔아버렸고 이후 석물들은 버려졌다. 현재 남아 있는 유구는 그때 버려진 석물들을 주워 모아둔 것이다.(산 주인이 태실에 관한 일체의 복원을 불허하고 있다)

     

     

    세종태실지

     

    ▼ 문종태실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있다. 원래 태실은 명봉명봉사 내에 온전한 모습으로 자리했었으나 일제가 태실을 무너뜨리고 태항아리를 파 간 뒤 빠르게 황폐화되었다. 지금의 문종태실은 2016년 명봉사 뒤쪽 봉우리로 옮겨 복원된 것으로 장태(藏胎)석물은 모두 없어지고 비석만 남았다. 지금의 장태석물은 2016년 복원 당시 옛 사진을 참고해 재현한 것이지만 그나마 닮지도 않았다.  

     

    일제시대 엽서 속의 문종태실
    현재의 문종태실


    ▼ 단종태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으며 세종태실지와 1 km 거리이다. 얕으막한 구릉에 소나무가 울창해서인지, 혹은 규모가 작아서인지 세종태실지와 달리 왜군으로부터의 화를 면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훼철은 피할 수 없었으니 태실을 파 서삼릉으로 이전시킨 뒤 일대의 땅을 친일파 최연국에게 팔아버렸다. 최연국은 이완용과 같은 레벨의 중추원 칙임 참의를 지낸 자로 현재 단종태실지에 있는 무덤이 바로 그의 무덤이다. 으~ 미친다. 

     

    단종태실
    단종태실에 쓴 최연국의 무덤 /오마이뉴스 사진

     

    ▼ 예종태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태봉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태항아리가 옮겨진 후 버려졌다가 1970년 비와 석물이 수습되어 전주시 경기전 내로 옮겨졌다. 다행히 석비와 장태석물은 원형이 보존됐다. 

     

    예종태실 / 전북일보 사진

     

    ▼ 성종태실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 산에 있었으나 1928년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겨왔다. 성종의 태실은 드물게 경기도에 마련되었는데 그 가까움이 이전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태실이 궁궐 내에 있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높지만 원래 있던 곳을 알지 못해 아직도 창경궁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창경궁은 성종임금 살아 계신 세 분의 왕비(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만든 곳이니 나름 의미가 있을려나....?

     

    성종태실

     

    ▼ 폐비윤씨 태실 

     

    예천 용문사 내에 있다. 1478년(성종 9)에 조성된 성종의 妃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태실이다. 윤씨가 왕비가 된 지 2년이 흐른 시점에 가봉(可封, 비와 장태석물이 만들어짐)되었는데, 왕비로서 가봉태실비가 세워진 유일한 사례이다. 다만 비석만 보일 뿐 장태석물은 흔적을 찾기 어려우니 이 역시 일제의 태실 개봉 후 훼철되었을 것이다. 현재  태실은 서삼릉에, 태항아리의 외호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태항아리 내호와 지석 등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박복했던 팔자가 사후까지 전이된 듯해 마음 아프기 그지없다. 

     

    폐비윤씨 가봉태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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