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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리전투와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0. 26. 05:45

     

    한국전쟁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 ~ 5월 22일 동안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縣里)에서 중공군+북한군과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임진왜란 때의 칠천량해전, 병자호란 때의 쌍령전투와 함께 한국 역사 3대 패전으로 불릴 정도로 참패를 당한 싸움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 밀려 하(下)진부리까지 후퇴했는데, 그저 '걸음아, 날 살려라'라는 식의 무분별한 도주로써 병력 60%가 상실되었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현리지구 전적비

     

    이 전투에 대해서는 훗날 수많은 변명이 뒤따랐으나 지휘관 유재흥(당시 소장)의 무능과 무책임이 빚어낸 참사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 오후 4시에 시작되었고 그 이튿날 아침, 국군 3군단이 지키던 오미재(오마치) 고개를 중공군 1개 중대의 공격에 탈취당했다. 오미재 고개는 인제군 기리면과 상남면 31번 국도에 있는 완만한 언덕으로 인제 현리, 홍천, 정선을 이어주는 관문이자 당시 동부전선의 보급로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길이었다. 당연히 주요 거점이었으나 상대적으로 방비가 취약했던 바, 중공군의 공격에 쉽게 빼앗긴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중공군의 공격은 1개 중대였지만 이에 앞선 야포 공격에 아군은 거의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후 중공군이 밀려오자 당연히 대군일 것이라는 생각에 일시 후퇴를 한 것이 당시까지의 전황이었다.

     

    당일 17일 오후 국군 쪽에서도 곧바로 반격도 감행되어 3군단 예하 3, 9사단의 각 1개 연대급 규모가 오미재 탈환에 나섰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많은 수의 중공군이 내려온 상태여서 일대는 사방이 중공군이었다. 이에 적에게 포위당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국군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까운 방태산(1436m)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면 끝장난다"는 강박관념이 빚은 무질서한 후방 철수였다. 

     

    앞서 '국군이 중공군에 첫 승을 거둔 용문산 전투'에서도 말했지만 중공군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 참전 직전, "유엔군보다는 전력이 약한 한국군을 집중공격하라"는 모택동의 지시를 받았고 사령관 팽덕회는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이에 그해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제15연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예의 인해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니, 평안북도 온정리까지 진격했던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2연대가 몰살에 가까운 타격을 당한 것을 필두로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면 끝장난다"는 트라우마가 작용할 법했다. 

     

    다만 문제는 그 철수가 너무 무분별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에 철수가 이루어진 것도 문제였다. 중공군은 한국전쟁 참전 이후 주간에 행해지는 미공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에 싸웠다. 따라서 야간 바이오리듬이 상승된 상태였고 국군은 상대적으로 야간 전투에 취약했다. 국군이 후퇴하는 것을 본 중공군은 곧 대규모 추격을 시작했고 이후 한국군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살육당했다. 그리고 이어진 공격에 현리 후방 지휘부마저 무너져 70㎞나 후방인 하진부리까지 후퇴해야 했다.

     

     

    중공군의 야포 공격
    현리전투 전황도

     

    현리전투의 참패해 대해 유재흥 장군은 1994년 나온 자서전 <유재흥 회고록-격동의 세월>(을유문화사)에서 자성의 태도를 일부 보였으나 불가항력이라는 식의 자기합리화로 일관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는 오미재 고개가 보급로이자 요충지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국군의 사전 병력 배치를 요구했으나 그곳이 미 제10군단 관할지역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나의 잘못은 차선책으로서 오미재 고개에 가장 가까운 곳에 부대를 배치해놓은 방안을 강구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후방 철수에 대해서도 변명을 늘어놓았던 바, "미 제10군단과 철수(후퇴) 방향에 대한 협조 부족으로 양 군단 사이에 넓은 간격이 발생하여 적의 진격을 용이하게 한 것을 자성한다"라고 전제한 뒤, "다만 중공군이 단 하룻밤 사이에 국군의 전선을 뚫고 30㎞나 되는 원거리를 주파하리라 예상치 못했다"며 중공군이 공격 전술이 뛰어났다는 식의 변명을 했다. 

     

    리고 자신이 중공군의 공격에 도주를 한 일에 대해서는, "후일 내가 현리에 남아 직접 양 사단을 지휘했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까 자성해보기도 했다"면서도 "그러나 대대 내지는 연대 공격 목표에 불과한 오미재 고개 하나를 놓고 사단장, 군단장 등 별 셋이 달라붙어 지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며 논점을 흐리는 소리를 해댔다. 

     

    국군은 현리전투로 병력 60%를 잃은 채 창설 8개월 만에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변명과 달리 3군단장 유재흥은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작전지역에서 도주하고, 최석 9사단장 등 군지휘관들도 허둥지둥 탈주하는 군기문란을 저질렀던 바, 나머지 군인들이 처참한 지경에 이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나>에서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혀, 유재흥 이하 지휘관들의 무책임한 도주가 증명됐다)  

     

    결국 나흘간 70㎞를 도망친 3군단 병력은 5월19일 오후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평창 하진부리에서 겨우 수습됐다. 집결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현리 전투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의 다음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키백과')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시오!"

     

     

    한국전쟁 중의 유재흥 장군(가운데) / 일본 육사 출신인 까닭에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대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재흥(1921 ~ 2011년) / 5.16 군사 정변 후 등용되어 이탈리아 대사,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고, 퇴임 후에는대한석유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다 91살을 일기로 숨졌다. 예비역 육군중장으로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며, 청천강전투와 현리전투의 참패, 일본육사 출신(25기)으로 학병을 권유해 친일사전에 등재된 일,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사건 때 민간인 학살을 명령 또는 관여한 일 등이 함께 묻혔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노병과 학도병들은 현리전투에 대해 “패전이 아니라 처참한 패주”라고 기억하고 있다. (2010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 내용)

     

    "당시 지휘부가 연락기로 탈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 "전황이 급박하다 보니 박격포 등 중화기는 방태산 바위 밑에 숨긴 채 몸만 빠져나왔다." ㅡ 현리전투 생존자 정병석

     

    "지휘부가 먼저 도주하자 지휘체계를 잃은 병력은 중대, 소대 단위에서 10명 규모로 뿔뿔히 흩어졌고 소총을 버린 병사도 부지기수였다."/ "일부 장교들은 수치스럽게도 계급장을 떼고 달아났다." ㅡ 현리전투 생존자 박한진

     

    "악전고투 속에 낙오된 국군 상당수는 중공군의 추격으로 희생됐거나 포로로 잡혀 북한군으로 전선에 재투입돼 아군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겪었다." / "배고픔과 탈진으로 죽어간 전우도 태반이었다." ㅡ 현리전투 생존자 박한진

     

     

    강원도 인제군 현리전투 위령비

     

    또 이때 많은 국군이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으니, 1994년 탈북했던 귀환 국군포로 1호인 조창호 역시 현리지구 전투에서 붙잡혔다. 당시 국군 소위였던 그는 이후 북한군에 인계되어 국군포로로서 갖은 노역에 시달렸다. (하루 10시간씩 43년 동안 강제노동을 했다)  그는 13년간 노역소에 있다  중강군 중강진면의 광부로 보내지게 되는데, 이때에 알게 된  중국상인으로부터 구한 목선을 타고 압록강에서 서해로 탈출했다. 이후 해상을 표류하던 그는 1994년 10월 23일  새벽 한국 선박에 구출되어 극적인 가족 상봉을 이루었다. 

     

    * 그는 탈출 후 유재흥과의 면담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나 2006년 사망할 때까지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창호 소위가 생환했을 때 유재흥은 퍽 난감했을 것 같다.

     

     

    현리지구 전투에서 붙잡힌 국군포로
    조창호(1930~2006) 소위의 영결식 사진 (연합뉴스)

     

    1998년 중국을 경유해 탈출한 국군포로 장무환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그는 정전 협정을 불과 일주일 앞둔 1953년 7월 20일 강원 철원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북한군에 인계되었고 이후 함경북도의 탄광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그는 1990년대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내 통제가 느슨해지자 탈출을 결심했고 1998년 드디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으니 아래는 1998년 한 방송에서 보도돼 큰 파문을 일으켰던 대사관 직원과의 전화 통화 내용이다.  

     

    대사관 직원: "말씀하세요."

    장무환: "난, 국군 포로 장무환인데...."

    대사관 직원: "네, 그런데요."

    장무환: "거기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게 아니라...."

    대사관 직원: "여보세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장무환: "한국대사관 아닙니까?"

    대사관 직원: "맞는데요."

    장무환: "맞는데....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에 와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없는가 이래서 묻습니다."

    대사관 직원; (한숨 쉬며) "하.... 없죠~."

    장무환: "북한 사람인데, 내가...."

    대사관 직원: "아, 없어요."

    "뚜뚜...." (전화 끊어짐)

     

    결국 그는 주중 한국대사관이 아닌 낯선 중국인의 도움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과 연결될 수 있었고, 가족들의 도움으로 중국 암시장을 통해 만든 불법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한국에서 가히 충격적인 말을 했다. 

     

    "북한에는 나 말고도 많은 국군포로가 있는데 대부분 나처럼 탄광에서 노동을 한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방문했을 때 국군포로들은 이제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런데 국군포로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안 나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장무환(1926~2015년) 병장의 전역식


    이후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때도 국군 포로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안 나왔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한 사람도 돌아올 수 없었다. 2016년 통일연구원에서 발간한 ‘<2020년 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1953년 정전 당시 유엔군 사령부가 집계한 국군 실종자는 8만 2000명에 이른다. 그러나 1954년 1월까지 포로교환으로 남한에 돌아온 인원은 8,343명에 불과했다. 남한은 북한군 7만 5000명을 돌려보냈다. 

     

    민간 통계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 포로가 돼 북한에 억류 중인 국군6만명 정도이다. 그들은 대부분 탄광에 징집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제 노역을 했고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차별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산다고 한다) 이들 중 휴전 이후 자력 귀환한 국군 포로는 단  81명에 지나지 않으며  2011년 이후에는 탈출자가 없다.(2010년 1명이 마지막)

     

    휴전이 1953년 7월 27일이었으니 올해가 69주년이다. 북한의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현재 국군포로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다. 통일부자료에 의하면  함경남도 치덕산에 헤진 옷을 입고 밤에만 나타나는 귀신 이야기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흥남철수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잔류한 미귀환 국군이라고 한다. 아마 그 귀신도 이제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동안 정부에서는 남북교류를 수없이 시도했고 또 일시적인 성과도 거두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국군 포로의 송환 문제는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북대화의 걸림돌로 여겨 회피했다. 이게 과연 국가인가? 미국은 수십 년이 걸려도 이역에서 죽은 미군의 유해를 찾아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군인도 데려오지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남한 땅에서 죽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유해는 잘 관리되고 있으며(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적군묘지) 매년 국군의 손에 의해 발굴된 중공군 시신이 정성껏 반환되고 있다.

     

    올해도 88구가 중국측에 전달되었는데, 2013년 반환 합의 이후 한해도 빠짐없이 총 913구가 인도되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올해 유해 송환식을 보도하며 "민족의 기대를 짊어진 채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반대하는 깃발을 들고 전쟁에 참전했던 영웅들의 귀환"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우리는 과연 북한 땅에서 숨진 우리 영웅들의 유해를 찾아올 날이 있을까.... 아니 지금이라도 포로 송환의 노력을 할 수는 없을까.... 더 늦기 전에....

     

     

    202년 9월 1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군 전사자 유해 88구에 대한 인도식이 진행되고 있다. (국방일보 사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의 적군묘지 안내문
    북한군 묘지인 제1묘역
    북한군&middot;중공군 묘지인 제2묘역
    제1묘역에는 이런 무덤도 있다. '남해안 침투 반잠수정 시체' (연합뉴스 사진)
    2021년 최고령 탈북 국군포로 이원삼 씨가 향년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를 보도한 BBC 코리아 사진)

     

    * 유엔은 지난 2014년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를 통해 6.25 전쟁 중 최대 7만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당시 기준 500여 명이 북측에 억류돼 있다고 추산했다. 아울러 2021년 BBC는 "북한에 아직 국군포로 170여 분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하며 "지금처럼 이분들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반인도적 범죄인 동시에 제네바 협정과 포로송환 및 대우에 관한 협정에 모두 위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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