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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영공원 교사 길모어의 조선에 대한 다른 시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8. 15. 08:49

     

    1882년, 미국과 국교를 맺은 동양의 작은 나라 코리아는 선진국 미국에 영어와 근대교육을 가르칠 선생님을 요청했다. 이른바 육영공원의 서양인 교사 고빙이었다.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은 미 국무부는 교육위원장 죤 이튼에게 이를 위임했고, 이튼은 대학선배이자 버몬트주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이던 칼빈 헐버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가 잘 아는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칼빈 헐버트의 아들로, 그는 다른 2명의 지원자와 함께 1886년 5월 6일, 뉴욕을 출발했다.

     

    다른  2명의 지원자는 길모어(George W. Gilmore)와 벙커(Dalzell A. Bunker)였다. 당시 헐버트는 23살이었고 벙커는 33살이었으며 길모어는 30살 유부남으로 아내와 동행했다. 뉴욕을 떠난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요코하마와 나가사키를 경유해 (나가사키에서 한국 가는 배로 갈아탔다) 7월 5일 아침,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디딘 것이었다. 

     

     

    길모어가 본 조선의 장승

     

    헐버트는 일행을 마중 나온 둥근 차양의 모자를 쓴 조선 관리와 만나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성문이 닫히기 전 도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다른 교통편이 마련돼 있지 않은 까닭에 꼬박 26마일을 걷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6월 1일에 느림보 중국 배(뻬이징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경유해 도착한 1개월여의 힘든 여정이었음에도 잠시 쉴 새도 없이 서울을 향해 걸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짐은 조랑말이 실어주었고, 길모어의 부인에게도 조랑말 한 필이 제공되었다. 

     

     

    제물포항에 당도해 조랑말을 타고 이동하는 외국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

     

    이에 길모어 부인은 걷지 않을 수 있었으나, 그녀 역시 한국을 추운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걸친 옷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곧 땀범벅이 되었으며, (게다가 날씨는 무려 35º였다) 그 위에 흙먼지까지 달라붙어 꼴이 말이 아니었는데, 논두렁에 지날 무렵 조랑말이 엎어지는 바람에 설상가상 도랑에 처박히는 불상사마저 치러야 했다. 

     

    이와 같은 고생 끝에 일행은 해가 지기 전 서울 어귀에 도착했으나, 서둘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고 또다시 걸음을 바삐 해야 했다. 곧 성문이 닫힌다는 몹시도 공포스러운 재촉 때문이었는데, 그 덕분인지 가까스로 남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행은 안내된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서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볏단 쓰러지듯 뉘었다. 육영공원의 선생님들은 이와 같은 힘든 여정 속에 서울에 닿았다. 

     

     

    길모어가 본 남대문

     

    일행의 한양입성기(記)는 앞서 호머 헐버트를 소개했을 때와 같다. 같이 왔으니 같을 수밖에 없겠으나 길모어가 조선 땅에서 본 8년 동안의 시각은 헐버트와 사뭇 다르다.(배재학당 선생 등으로 향후의 길을 찾은 헐버트나 벙커와 달리 길모어는 육영공원이 폐교되자 1894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의 경험을 <서울풍물지(Korea from it’s Capital: with a Chapter on Missions)>라는 책으로써 출간했는데, 조선을 마냥 좋게 보고 안쓰럽게 생각한 헐버트와 달리 길모어는 냉정히 조선 사회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에 대해 기분 나쁜 감정을 지니고 있다거나 적대시하려는 마음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느낌 그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피사체를 보고 적었는데, 그래서 그의 시각은 더욱 폐부를 찌른다. 그가 인트로듀스에서 소개한 조선의 대강은 이러했다.

     

    한반도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이 무표정하고, 복장은 한결같이 단조롭고, 집들은 빈약하며 치장이 전혀 없고, 농사는 낙후되어 있으며 (정원을 꾸미는) 조경술은 아예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양반들의 거드름을 본받으려 어설프게 노력하는 어떤 유별난 장면이라도 보게 되면 나는 상대를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아야 한다. 때로는 넋을 잃을 때도 있다. (※ 아마도 아전들의 갑질을 말하는 듯하다) 

     

    조선의 정부와 관리(官吏)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내가 본 가장 비극적인 경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어느 날 아침에 하인 하나가 나를 찾아와 시골에서 올라 온 한 사람이 나를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에서는 외국인들이 정부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어떤 관념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그 시골 사람은 그러한 소문을 듣고 내게 그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는 얼마 전에 결혼한 것 같았다. 그와 그의 아내가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이 마을 근처 양반의 집을 지나게 되었을 때 하인들이 달려나오더니 그의 아내를 붙잡아 감금시키고 그 양반의 수청을 들도록 했다. 그의 남편은 그가 접근할 수 있는 관리들의 도움으로 석방시키도록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제에 개입할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하인들을 시켜 죄를 범한 사람은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의 지위는 그를 비호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의 항의에 대해서도 처벌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물론 그가 들려준 이 이야기는 나의 의분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그를 동정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나는 어떤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정확히는 내가 연루되어 있지도 않은 그 일에 개입함으로써 학교의 이익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다. 그 결과에 대해서 나는 아직 들은 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람에게 병사 하나를 딸려서 교육 부서의 장에게 보내어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정장한 조선의 관료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실이 아닐 리 없겠지만) 당시의 조선은 가히 무법천지의 나라이며 미래가 없는 나라이다. 나아가 조선의 관리들은 권력의 오·남용을 넘어 불법 특혜 또한 굉장하다.

     

    관리들은 위에서 지적한 방식으로 권력을 남용할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친인척들을 벼슬에 등용시키기도 한다. 성년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고위 관리의 자손들이 예외 없이 공직에 진출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들 가운데는 고인이 된 영의정의 아들이면서 26세가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굉장히 높은 벼슬인 참의 벼슬을 얻었다. 또한 18세도 안되었는데 주사의 벼슬을 이미 차지한 어느 영의정의 아들인 또 다른 학생도 있었다. (※ 육영공원 학생은 고관의 자식들이 우선 선발됐다)

     

    이 어린 사람의 경우는 특기할 만하다. 그는 매우 명석했고 그의 능력은 매우 비범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게을렀으며 영어 학습에 흥미가 태만해졌고 학습에 거의 주의를 쏟지 못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왕 잎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을 때 그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 고종은 육영공원에 관심이 지대해 가끔은 직접 시험장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러한 경우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영의정의 아들은 사태가 어찌 도어 가는 바를 알려고 처음에는 학생들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그의 아버지가 영의정이라는 구실로 그에게는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요청하려고 교육부서의 한 관리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직책이 이 문제를 뒤집을 수 없으며 그가 쓴 오답은 그에게 불리하게 기록될 것이라고 우리는 대답했다. 그 결과, 그 젊은이는 최하 등급으로 분류됨으로써 위신을 크게 손상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 외국인 교사에 국한된 일이었고) 그를 우수한 학생으로 합격시켜 공직에 승진토록 하는 것이 학교 관리들의 목적이었다. 

     

    길모어는 관리 선발 시험에 있어서도 부정이 공공연히 행해짐을 지적했다.

     

    시험은 정부의 시정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학생들을  선발하려고 치러지지만, 그러한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관리의 자제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시험관들은 뇌물을 받고 뇌물 제공자의 답안지를 찾아 임금에게 우수 답지라고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선망되는 영예를 가져다줄 수 있다. 

     

    길모어는 여기에 자신을 조선어 선생을 비교한다.

     

    나의 선생님은 박식할 뿐만 아니라 예외적으로 존경할 만한 분이다. 그는 매우 벼슬을 얻고 싶은데 거기에 필요한 돈도 없고 영향력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내게 말했다. 능력 있는 자를 뽑고자 시험이 치러지는 때에 돈과 권력이 필요하다니 그것이 어떻게 그리 되는가를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오. 많은 답안지가 작성되지만 왕은 아주 극소수의 답안지만을 봅니다. 그리고 왕의 근신들이 나머지를 선발합니다. 내가 그 사람 가운데서 어느 한 명을 안다면 그에게 나의 답안지를 보고 그것을 왕에게 보여주라고 설득할 수 있거나 또는 얼마만의 돈으로 그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합니까?"

    "약 10만냥쯤(약 50달러)이 필요합니다."

    "만일 제가 선생님께 그만큼의 돈을 빌려 드린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대는 매우 친절하시군요. 그대의 제의를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벼슬을 얻는 것은 나의 양심에 맞지가 않소."

     

     

    길모어의 조선어 선생 부부

     

    지금은 채용에 있어 이와 같은 부정이 거의 행해지지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를 이끌어가도 있는 것은 대다수 복지부동의 엘리트가 아니라 소수의 양심적 엘리트와, 길모어의 선생님 같은 자존심 있는 다수의 바른생활 국민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상의 글이 길모어의 책 <서울풍물지>의 에센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데, 그는 덧붙여 다음과 같이 탄복하고 있다. 

     

    교양 있는 계급과의 교류를 통해 우수한 재능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한 번에 1천 명이 넘는 과거에서 경쟁하고, 수험 과목인 중국의 고전이 얼마나 방대한가를 고려한다면, 시험관의 눈이 번쩍 뜰만큼의 돈을 가져다주어야 벼슬길이 열린다는 그 선비의 말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에서 과거제도가 법망을 빠져나가는 기술은 미국의 정치꾼들을 경탄시키기에 충분하다.

     

    육영공원 / 맨 왼쪽 건믈로 추정된다. 가운데 넓은 길이 지금의 덕수궁 돌담길이다.
    육영공원 수업 광경 / 이 사람이 길모어로 추정된다. 길모어는 귀족들의 자제인 학생들의 얼굴에서 조국의 미래를 고뇌하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의 육영공원 터 표지
    육영공원 자리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 육영공원이 있던 곳에는 후일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세워졌다가 일제가 1928년 경성재판소를 지었고(현 건물) 광복 후에는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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