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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평양 전쟁의 유일한 지상전 오키니와 전투와 주민 집단자살 사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8. 7. 06:11

     

    태평양 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중의 아시아 지역 전투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일본이 대(對)아시아 침략 전쟁을 벌임으로써 시작됐다. 이 태평양 전쟁을 일본은 대동아(大東亞)전쟁이라고 부른다. '대동아공영권(아시아 나라들이 공공번영을 위한 권역)을 구축하기 위한 일본의 행보를 귀축영미(鬼畜英米/きちくえいべい/귀신 가축 같은 영국과 미국)가 방해하므로 이를 반격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라는 뜻이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이라 일컬었던 점령지

     

    이 단어는 1945년 8월 일본의 점령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 GHQ (General Headquarters)에 의해 금지어가 되었음에도 습관이 되어 버린 일제의 잔재로써 윗 세대에 의해 오랫동안 쓰여 왔는데, 지금도 일본에서는 공공연히 쓰인다. 하지만 그 말에 치를 떤 일본인도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어난 오키나와 집단 자살 사건을 법정에서 증언한 긴조 시게아키 같은 사람이다. 지난달 말, 긴조 시게아 씨가 93세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포털 뉴스를 통해 뉘늦게 접했다.

     

    태평양 전쟁은 남태평양 미드웨이 환초 상에서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4일~ 6월 7일)에서의 미군의 승리 이후 연합군 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이후 일본은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레이테, 루손, 이오지마, 사이판, 괌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패배하며 막바지로 몰리게 되었는데, 1945년 3월 하순에는 드디어 본토인 오키나와(沖縄)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된 중순양함 미쿠마 호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 섬의 서해안에 상륙한 미군은 6월까지 82일간 일본군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라 일컬어지는 이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20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왔다. 당시 오키나와의 총 인구가약 45만 명이었으니 전체 주민의 삼분의 일 정도가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전쟁이 끝난 뒤 마부니 언덕에 건립된 '평화의 초석'에 새겨진 희생자 수는 다음과 같다.  

    오키나와 주민 14만9000명
    일본군 7만5000명
    미군 1만4000명
    영국 82명
    대만 8명
    북한 82명
    한국 263명

     

     

    마나부 평회기념공원의 평화의 초석
    한국인위령탑도 있다. / 제주불교신문 사진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전사자가 나온 것은 극히 유래가 드문데, 오키나와 전투에서 대규모 사망자가 생긴 이유는 일본 정부가 이른바 '본토 결전'을 앞두고 시간을 벌기 위해 오키나와를 희생시키는 사석(捨石) 작전을 썼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들 가운데에는 미군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들뿐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죽은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에 의해 식량이나 물을 강탈당해 굶어 죽거나, 일본군의 위협으로 전장에 나가 탄약과 식량, 물 등을 나르다가 포탄에 희생된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또 일본군은 주민들이 피난 장소로 사용하던 '가마(자연동굴의 일종)'로부터 주민들을 내쫓아 전장으로 내몰거나, 오키나와 방언을 사용하는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군에는 "오키나와어로 대화하는 자는 간첩으로 취급해 처분하라"는 상부명령이 하달돼 있었다.

     

     

    오키나와의 위치
    오키나와 제도의 가장 큰 섬 오키나와 섬/ 캐피탈 나하 시가 있다.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주민들사이에서 일어난 강제적인 집단자결이었다. 이 집단사(集団死)는 미해병 6사단이 가장 먼저 상륙한 게라마(慶良間) 제도 도카시키(渡嘉敷)섬에서 약 300명, 자마 미(座間味)섬에서 135명, 게루마(慶留間)섬에서 수십 명이 발생했다. "미군에게 붙잡히면 여자는 강간을 당한 뒤 죽임을 당하고, 남자는 팔다리가 잘리고 갈기갈기 찢겨서 죽는다"는 일본군의 사전교육으로 인해 섬 주민들은 미군이 섬에 상륙하자 친족이나 이웃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자살극을 감행한 것이었다.

     

    형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인 것이 아니라 대다수 어른이 아이들을, 남성 가족 구성원이 여성 가족 구성원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앞서 말한 긴조 시게아키 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과 죽창을 들고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형과 함께 어머니를 돌로 내리쳤고, 여동생과 남동생도 때려죽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 청년이 외쳤습니다. '이대로 죽느니 미군을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 그런데 저를 포함해 5명의 청년들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군관민 공생공사(軍官民 共生共死)'라고 했는데, 일본군은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집단자결이 일어났던 가마(자연동굴) 모형 /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법정에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긴조 시게아키

     

    오키나와는 본래 유구국(流求國)이라는 나라가 있던 곳으로 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섬이었다. 유구국은 독자적 해양문명을 꽃 피우며 중국과 일본에 조공을 하고 우리나라와도 교류하던 독립국가였으나 1879년 3월 27일 일본이 전격적으로 점령해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 때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황민화(皇民化) 주입식 교육이 실시됐고, 주민 집단자결의 비극은 그 바탕 위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본토인과는 생각이 좀 다르고 일본 천황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이들에게 천황은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가해자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지난 1975년에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지금의 천황)에게 오키나와 청년 2명이 화염병을 투척한 사건이나 일장기를 불태운 사건은 이와 같은 인식에서 기인한다. 990년대 천황이 초청한 피로연에 참석했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 국가이자 천황 찬가인 기미가요를 끝내 부르지 않았다.

     

     

    2017년 은퇴를 선언한 아무로 나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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