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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탑골공원과 원각사지에 관한 알쏭달쏭한 썰 정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7. 28. 05:32

     

    1. 파고다공원인가 탑골공원인가?  

     

    종로 파고다공원은 '서울 탑골공원'이 정식 명칭이다. (2011년 7월 28일 ‘서울시 고시로 명칭 변경)  하지만 뜻은 같다. 파고다는 탑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인데, 범어(梵語)나 팔리아어(동남아시아 언어)에서 유래된 말 같지만 의외로 이탈리아어라고 한다. 마르코폴로의 차대세 이탈리아 상인들이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스투파(Stupa)를 파고다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이후 유럽에서는 탑을 파고다라고 불렀다. 발음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이런 예는 사실 무척 흔하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스투파가 탑이 된 것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스투파→탑파→탑)  그리고 그것이 파고다공원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개화기 때 탑 일대를 공원으로 꾸미도록 고종에게 건의한 영국인과 관련이 있다. 그 외국인은 운종가(종로)의 인상적인 흰 거탑을 보고 자기네 식으로 '파고다(가 있는) 공원'으로 불렀던 것이다. 

     

     

    1960년대의 최고급 담배 파고다 / 이때 공원명칭은 파고다공원이었다.
    그 시절 삽화 / 1967년 8월 22일 담뱃값이 대폭 인상되어 파고다는 35원에서 40원으로 올랐다.

     

    2. 브라운이 설계한 것이 맞나?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책에서 '당시 개항장의 해관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고빙되었던 영국인 총세무사 죤 브라운(Brown, J. Mcleavy)이 1897년 탑골공원 조성을 건의하였고 설계까지 맡았다는 썰'을 정설처럼 말하고 있지만, (한국사능력시험에서조차)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브라운은 1897년 후반 친러노선으로 전환한 정부에 의해 해관 총세무사에서 해촉되고 러시아인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바, 공원개설의 건의까지는 몰라도 설계를 맡을 개제는 못되었다. 

     

     

    브라운이 보았을 파고다
    청나라 외교관과 브라운 (●) / 1868년 10월에 미국 뉴욕에서 찍은 사진이다.

     

    3. 언제 만들어졌나? 

     

    공원 입구 안내판에는 탑골공원의 조성 연대에 대해 1890년대라고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1899년 4~5월에 발행된 신문기사에서는 공원 조성을 위한 민가 철거와  보상금 문제로 생긴 정부와 주민들 간의 마찰을 보도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1899년 5월까지는 공원부지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보면 공원 공사는 1900년 들어 시작되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1902년 일본인 세키노의 사진, 1903년의 촬영자 미상의 사진, 그리고 1904년 호주 사진작가 조지 로스가 찍은 사진을 보면 공원 공사는 1903년 시작되어 1904년에 이르러 중앙의 팔각정 공사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사가 끝났음을 짐작케 해준다. 즉 탑골공원의 조성 시기는 1900년대 초가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면적은 지금과 비슷한 11,000㎡ 정도였다. (현재 공원 면적은 15,720.9㎡이다) 

     

     

    1902년 세키노가 찍은 사진 / 주변으 민가는 거의 철거됐지만 공사는 시작된 것 같지 않다.
    1903년 공사중인 파고다공원을 찍은 사진
    1904년 조지 로스가 찍은 사진

     

    4. 탑을 일본에 반출하려 했는가?

     

    위의 사진을 포함한 당시의  모든 사진에서 탑 상층부 3개 층이 바닥에 내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공원 내에 있던 원각사지 석탑을 개성  경천사지석탑처럼 일제가 일본으로 반출하려 했다거나, 같은 의도를 가졌던 임진왜란 당시의 왜놈(구체적으로는 카토 기요마사)의 소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래 2장의 사진을 보면 적어도 일제의 소행은 아니다.  

     

     

    1898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모델을 세워놓고 찍은 사진
    1884년 외교관 퍼시벌 로웰이 인근 민가 지붕에서 찍은 사진
    비슷한 시기에 찍은 상층부 사진
    해방 후에도 상층부가 바닥에 놓여져 있다가
    1946년 2월 17․18일 양일간 미군 제24사단 소속 공병대에 의해 기중기로 올려졌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한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해방 직후의 일이니 장안 사람들이 놀랬을 법도 하다.
    마지막 얹기 성공!

     

    5. 상층부가 해체된 것은 언제일까? 

     

    탑골공원은 국초(國初)의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였다. 불교를 신봉했던 세조가 1464년(세조 10) 이곳을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이때도 근처의 가옥 200여 호가 철거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때 대종(大鐘)과 개성 경천사석탑을 본뜬 대리석의 백색 거탑이 만들어졌다.

     

    성종 때 이르러서는 숭불(崇佛)은 안 했지만 절에 대한 보수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억불(抑佛) 드라이브 모드로 전환되었던 바, 1504년(연산군 10)에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가 벌어졌다. 유교의 나라에서 도성 가까이 대규모 사찰이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에 철거되지는 않았고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이 원각사로 옮겨졌다. 이후 그곳은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연산군 놀이터가 되었다. 연산군 실각 후에는 이곳의 건물들이 한성부 청사(서울시청사)의 부속건물로 쓰이다가 1514년(중종 9) 중종이 원각사 재목을 공용건물의 부자재로 쓰겠다는 호조(戶曹)의 주청을 허락하고부터는 건물의 철거가 급속도로 진행돼 옛 자취는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의 인사동·仁寺洞은 원각사가 있는 동네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나아가 중종은 남은 탑도 양주 회암사로 이건 시키려 했다. 생각 같아서는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동티가 무서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해체 이건의 대역사(大役事)를 시행했는데, 그때 우연찮게도 구름이 몰려들며 하늘이 으르렁거렸다. 기록은 따로 전하는 게 없으나  중종과 신하, 그리고 해체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을까 짐작이 간다. 이후 탑의 이건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탑은 상층부가 내려진 채로 400년을 지내게 되었다.  

     

     

    1999년 유리 보호각 안으로 들어간 원각사탑

     

    6. 탑은 원래 몇 층이었을까?

    탑의 상층부는 비록 땅에 내려졌지만 워낙에 독보적인 건물이었던 바, 원각사지 석탑은 오랫동안 한양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조선말 이 땅을 찾은 이방인들 거의가 언급한 이 탑은 서양인들에게 있어 한성의 유일한 볼거리였다. 그래서 여러 서양인들이 탑을 사진과 글에 담았는데, 1884년 서양 선교사로 최초로 이 땅에 온 호레이스 알렌은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선물한 것"이라는 제법 연구한 듯 보이는 글을 남겼다. 아마도 경천사 십층석탑을 비롯한 여러 스토리가 혼재된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1893~1894년 조선을 여행한 영국 왕립학회 소속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역시 원각사지 석탑을 서울의 첫인상의 하나로 언급했다. 그녀는 다섯 번이나 사진을 찍으러 탑을 찾았으며, 갈 때마다 신선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아울러 "700년 전 세워진 이 인상적인 대리석 파고다는 서울에서 가장 더럽고 좁은 지역의 집 뒤뜰에 감추어져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정교한 조각을 부수어 조각을 팔고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적었다. (Isabella B.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이들 외국인들은 예외 없이 이 탑을 13층으로 기술했다. 기단부를 제외하고 상층부(땅에 내려앉아 있는)까지 세어보니 모두 13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도쿄제국대학 건축학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연구 후 이 탑은 10층이 됐다. 세키노는 1902~1904년 한국 고대건축물을 조사한 후 펴낸 보고서에 "이 탑은 10층으로서 삼중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이후 정설이 되었고, 해방 후 한국 고고학의 태두 김원룡이 답습하며 지금껏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가 공개한 선교사 그리피스가 찍은 원각사탑

     

    세키노는 1913년 자신의 주장을 바꿔 13층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정확한 층수를 획정짓기 어려운 다층석탑으로 결론 내렸다. 이후 1934년 5월 일제가 이 탑을 보물 제4호로 지정하면서 (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3호  보신각종) '원각사지다층석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명칭 역시 해방 후까지 사용됐다. 대한민국의 학자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따른 탓이다. 

     

    그러나 이는 엄연한 오류이다. 무엇보다 탑과 같이 남아 있는 원각사의 유이(有二)한 유물인 원각사비(1471년)에는 세조가 원각사탑을 ‘13층탑’으로 건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각사비 비문 중 층수와 관련된 구절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데, 문헌 자료로 층수가 확인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내용이 안내문에 명시돼 있다) 이 탑은 원래부터 13층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린 '원각사비'에서도  ‘십유삼층(十有三層, 10+3층)'이라는 구절이 나오며, 우리가 십층석탑이라고 부른 경천사탑도 <동국여지승람>에는 13층탑으로 기술돼 있다. 당시에는 이 탑들을 모두 13층으로 인식했다는 얘기다. 조선 지식인들 역시 원각사탑을 13층탑이라고 인식했으니 한국미술사 개척자인 고유섭(1905~1944) 선생도 처음에는 다층설을 받아들였다가 13층설로 정정했다.

     

    다만 이렇게 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경천사탑과 상충한다. 국보 제86호인 그 탑은 여전히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인데, 원각사탑은 경천사의 것을 충실히 모방한 것이다. 뭔가 정리가 필요할 듯 보인다. 원각사탑은 1962 국보 제2호 지정되었는데, 명칭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다. 먼저 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할 듯싶다. 앞서 말한 세케노 다다시는 원각사탑과 경천사탑을 같은 시대에 동일한 집단에 의해 제작된 탑으로 잘못 이해했는데, 그 오해가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과 이웃 나라들> 속의 원각사비
    서울역사박물관의 원각사비 사진 / 언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주위 집들과 사람들의 복색이 결코 초라하지 않다.
    지금 비는 보호각 안에 있다.
    오른쪽 안내문에 1467년(세조 13) 13층 탑을 완성한 후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한 사실을 적었다. 이 비(대원각사비)는 1471년(성종 2)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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