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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과 한미수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30. 01:58

     

    '우리 것을 기본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東道西器)는 19세기말의 조선이 청나라  양무운동(洋務運動)의 구호인 중체서용(中體西用)을 흉내 내 위정척사파의 반발을 무마하고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표방한 구호로서, 청나라의 중체서용, 일본의 근대화 구호인 화혼양재(和魂洋才)와 궤를 같이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청·일은 성공했지만 조선은 실패했다.

     

    일본이 화혼양재로써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막차를 타는 과정은 앞서 '조슈 5걸과 이와쿠라 사절단,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에서 약술한 바 있다. 그리고 중간에 개혁의 동력을 잃기는 했지만 서양을 배우자는 청나라의 양무운동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서구의 과학 지식을 도입해 근대화된 무기를 제조하고, 유럽식 군대 양성과 도로의 정비, 근대식 항만과 철도 부설, 통신망 정비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인프라도 적극 구축하였으며, 서구 제국에도 많은 국비 유학생들을 파견하였다.

     

    리하여 이를 바탕으로 공업 발전과 국력 배양에 힘썼던 바, 제사(製絲)·방직 공장이 설립되고 조선소가 만들어져 북양함대(北洋艦隊)와 같은 서구식 함대를 갖출 수 있었다. 이 시기인 1863년, 이홍장은 상하이에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이라는 군수공업단지를 을 설립하고, 1865년에는 난징에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을 설립해 대포와 화약을 생산했다. 1866년에는 좌종당에 의해 대규모 군함 생산하는 선정국이, 1867년에는 승후에 의해 천진군사기지 공장이 설립되었다.

     

     

    좌종당이 건립한 마미조선소
    상하이 강남제조총국
    금릉기기국에서 제작된 화포와 개틀링 기관총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는 참으로 경이로운 일로, 그들의 화혼양재를 초지일관 밀어붙여 선진화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무려 500년 간이나 주자 성리학에 찌들었던 우리나라가 깨어나는 일은 요원했으니, 조·일수교 후 외교사절을 겸해서 근대화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자 떠난 1차 수신사(1876년 4월 27일 73명이 부산을 출발해 고베를 거쳐 5월 6일 도쿄 도착)의 대표 김기수는 도쿄에서 일본 측이 베푼 환영 무도회 행사에서 남녀가 엉겨 왈츠를 추는 광경에 기겁을 했다. 

     

    그리고 육군장교의 딸이라는 젊은 처자가 다가와 김기수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자 기절할 듯 놀랐다. 김기수는 양풍(洋風, 서양바람)에 동양의 예의규범이 무너져 땅에 떨어졌다며 개탄했다. 김기수는 또 서양식 의학교에 시찰을 갔다가 해부실에서 시신을 해체하는 광경에 또 한번 경악했다. 그의 눈에 서구화란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 못되었다. 이후로 그는 모든 것에 눈을 질끈 감았으니 20일간의 조사시찰 기간 동안 숙소에 틀어박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서구화된 공장과 생산시설, 군수공업단지에서 생산하는 선진무기들을 눈에 담아야 할 최소한의 임무마저 해태했다. 

     

     

    1876년 6월 9일 김기수가 도쿄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꼰대 냄새 팍팍나는 1차 수신사 김기수의 일본 행차도
    72명의 일행 중 가마꾼이 30명인 조선대표단에 일본인들은 놀라고 비웃었다. 김기수는 수신사 임무를 마친 후 황해도 곡산부사를 지내다 퇴역했던 바, 수신사로서 보고 배운 것이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2차 수신사(1880년 7월 6일 도쿄 도착)의 대표 김홍집도 별 다를 게 없었다. 그는 김기수보다는 더 보고 익히기는 했으되, 외교감각은 전혀 없었으니 주일 영국공사가 정식으로 초대한 만찬을 거절했고, (어쩌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의 부름에는 응했다. 그리고 공사관 참찬관(參贊官)  준헌(黃遵憲, 황쑨셴)으로부터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책을 받아가지고 돌아와 조선의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고종 17년 김홍집이 받아와 임금 앞에 내민 <사의조선책략> '내가 생각하는 조선의 외교 방책'이란 뜻으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저작이었다. 이는 곧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제목으로 필사되고 간행되며 조선에 일대 혼란을 불러오게 되는데, 내용은 사실 별 게 아니었다. 그 내용인즉  러시아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결론은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하여 자강(自强)하라"(중국을 가까이하고, 일본 · 미국과 손을 잡아 조선 스스로 강해짐으로써 러시아를 막으라)는 것이었다.

     

     

    황준원과 <조선책략>

     

    책의 저의를 말하자면 이는 황준헌의 뜻이 아니라 청나라의 실력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 리훙장)의 뜻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리훙장은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극동 진출을 위한 부동항을 찾고 있었다. 이미 러시아는 1860년에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빼앗아 그 가장 남쪽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건설했지만 그곳도 겨울에는 얼었다. 이에 더 남쪽으로 가기를 원했고, 그곳에 조선이 있었다. 반면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에도 조선만은 속방으로 두기를 강력히 희망하였으니,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과의 수교를 조선에 권했던 것이었다.

     

    즉 러시아에 직접 맞설 힘이 없었던 청나라 리훙장은 이른바 균세론(均勢論, POWER OF BALANCE)을 이용해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을 막으려 했던 바,  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하여 나라를 지키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홍장의 뜻은 조선 내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으니, 영남 유생들로 대표되는 위정척사파들이 이른바 영남 만인소를 올려 이 사문난적의 책을 가져온 김홍집을 처벌하라며 생난리를 피웠다. 우리 조선은 오로지 저 중국만을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모셔야 하거늘,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 같은 서양오랑캐와 연맹을 맺으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두쪽 나도 결코 해서는 안 될 금수 같은 행동이라는 항의였다. 


    그들은 더 나아가 지금 불고 있는 동도서기론마저 가당치 않다고 비판하기 이르니,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은 영남 만인소를 대표하여 서명하였고, 이항로의 제자인 홍재학은 관동 대표로서 서울에 올라와 대표 상소문을 올렸다. 조선에서는 유생들의 상소를 막거나 처벌하는 법이 없었다. 즉 그간의 국왕들은 유생들의 상소를  유학 존중과 언론 자유의 의미로써 처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재학은 상소의 망언이 지나치다는 이유로써 붙잡혀 서소문 형장에서 처형당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고작 34세였다. 늙다리 꼰대라면 혹 이해가 가겠으나 젊은 유생마저 그 지랄이었으니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꼴통짓이 전개되고 있음을 모르는 이홍장은 속이 타들어갔다. 이에 그는 친중파인 어윤중과 김윤식을 통하여, 그리고 영의정 이유원에게 계속 미국과의 수교 압력을 넣었지만 조선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급기야 이홍장은, "그러면 내가 자리를 마련할 테니 천진(톈진)으로 조선 전권대표단을 파견해달라"고까지 하였지만 그럼에도 조선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였다. 지금 조선 내에서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쳐 대표단을 파견할 분위기가 아니니, 정 그러시면 북양대신 이중당(李中堂) 대인께서 알아서 체결하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북양대신 시절의 리훙장

     

    이에 이홍장은 1882년 5월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슈펠트를 초청해 천진의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함께 한 후 조미수교조약을 체결했다.(물론 그 자리에 조선측 대표는 없었다)  미국은 앞서 1881년 7월  아시아함대 사령관 슈펠트에게 미국 아서 대통령이 사인한 전권대사 임명장을 보낸 상태였다. 당시 영토의 욕심은 전혀 없이 오로지 통상만이 목적이었던 미국은 자국과의 교역량이 0.01%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 조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영국이 하도 닦달하고 나서는 바람에 과거 제너럴셔먼호 실종 사건 조사를 위해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는 슈펠트 제독에게 수교를 일임시켰다. (영국은 자신이 먼저 조선과의 국교를 체결해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었지만, 그러할 경우 러시아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던 바, 미국을 끌어들여 조미수교를 맺게 하고 자신은 그 한 달 후인 6월에 미국을 따라 했다는 식으로써 슬그머니 조·영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독일도 같은 장소에서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1~1895) 제독

     

    이렇게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1882년(고종 19) 음력 4월 6일(양력 5월 22일), 이홍장의 부하 정여창과 마건충이 미국대표 슈펠트 일행과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선 측 대표(전권대사 신헌과 전권부관 김홍집)를 불러내 이미 작성된 조약문에 사인을 하게 했는데, 그에 앞서 마건충은 조선대표에게 중국 쪽을 향해(즉 중국황제를 향해) 3번 절하고 머리를 9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표하라고 시켰다. 이는 조선의 사신들이 통상하는 일이었던 바, 신헌과 김홍집은 거부감 없이 이를 행했다. (이 꼴을 바라보는 슈펠트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마건충은 앞서 이홍장이 넣지 못한, 조약체결문의 문장 하나를 다시 꺼냈다. 사실 이 조약문을 작성한 사람이 국제법 전문가 마건충으로 그는 다시 이 자리에서「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다」라는 문구는 넣고자 했다. 그는 그 뜻을 조선대표에게 전했고 역관 이응준이 이를 통역해 전달했다. 조선 대표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건충이 슈펠트에게 이 뜻을 영어로 전달하자 슈펠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슈펠트는 이미 이홍장과의 회담에서 얘기가 끝난 일이거늘 왜 자꾸 재론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건충(馬建忠,마젠중, 1845~1900) /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 법학사 출신으로 돌아와 이홍장의 휘하에서 양무운동을 주도했으며 조미수호통상 조약의 막후로 활약했다.

     

    슈펠트는 앞서 천진 회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미국의 목적(조미간의 직접 통상)에 방해가 될 이 문구의 삽입을 완강히 반대했다. 만일 이 문구를 넣는다면 향후 조선과의 통상에 일일이 중국의 허가를 받아야 되는 번거로움이 따를 것이 뻔할 터, 용인할 리 만무했다. 그는 더 나아가 마건충과 정여창을 회담 장막 밖으로 내보냈다. 이미 얘기는 다 끝났고 양국(조선과 미국) 대표 간에 사인할 일만 남았으니 당신들은 나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중국 대표는 쫓겨나고 신헌과 슈펠트가 조약문에 조약을 마침으로써 비로소 한미수호조약이 성사되었다. 오후 2시경이었다.  

     

    이상이 그간 한국의 역사에서 감추어져 왔던 조미수교의 전말이다. 슈펠트는 조약문 체결을 전후하여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겠지만 알아듣지를 못하니 내내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뭐 이런 나라도 있는가 싶었을 것이다. (마건충은 슈펠트와 영어로 대화했고 이응준은 마건충의 중국어를 받아 통역하는 방법으로 회담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슈펠트가 이에 앞서 의사를 분명히 한 일이 있다.

     

    다름 아닌 회담장에 양국 국기의 게양을 요구한 것이었으니, 이에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만들 것을 명하였고, 이응준이 미국 함정인 스와타라(Swatara) 호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하여 이 국기가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나란히 걸리게 됐다는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이다. (☞ '태극기를 만든 이응준은 응징되었나?'

     

     

    그 한달 후에 체결된 조영수호조약 체결 장면 / 조미수호조약 체결 광경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회담장에 걸렸던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 2018년 8월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슈펠트 문서 박스' 속에서 벌견됐다.
    인천 중구 제물량로 자유공원 입구에 세워진 조미수호조약체결지 표석 / 체결지에 관해서는 그간 여러 장소가 설왕설래되다 2019년 6월 최종 확정되어 표석이 세워졌다.
    조미수호조약체결지에서 본 청일조계지 계단과 인천 앞바다 /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메워졌으나 당시는 바다가 훨씬 가까이 있었다.
    1950년의 청일조계지 입구와 인천 앞바다
    1904년의 청일조계지 입구와 제물포항
    1888년의 청일조계지 입구와 제물포항
    1883년 개항직후의 제물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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