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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은 부서진 배" -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원세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5. 4. 22:58

     

    전편에서 말한 대로 북양대신 이홍장이 원세개에게 하사한 직함은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서, 조중 무역협정인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에 입각한 통상 업무만을 관할하는 자리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나라 중국에 많은 이익을 남겨 주었다. 다만 그것이 위의 불평등조약에 기인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를 테면, 원세개는 화상(華商, 중국상인)들의 밀수를 군함을 이용해 도왔으며, 이를 적발한 조선 해관(海關, 세관)을 습격해 위협 총질을 가했다. 청국 상인들은 주로 조선 홍삼을 밀수출했으며 영국산 값싼 면직물 등을 밀수입해 조선에서 수십 수백 배의 이윤을 남겼다. 세관이 적발하면 그들을 또 윽박질렀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원세개의 비호를 받는 무역상들이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동순태(同順泰)·광대호(廣大號)·금성동(錦成東)·조공순(兆公順)·쌍성태(雙盛泰)·서성춘(瑞盛春)·영래성 (永來盛)·동흥성(東興盛) 같은 회사들이었다. 

     

    서울대 소장 동순태(同順泰) 관련 문건 / 동순태는 담걸생이 조선에 설립한 회사로 원세개의 비호 아래 중개무역과 밀무역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측척하였던 바, 담걸생은 조선총독부가 있던 1923년 납세 1위의 실적을 기록하였으며, 사옥인 동순태루는 명동에서 거장 큰 건물이었다.

     

    그들보다 무서운 건 개항장을 피해 다른 바닷길로 들어오는 중국인 밀무역상들이었다. 이른바 잠상(潛商)들로, 그들 잠상들의 배는 미곡 1,000 섬 이상의 선적이 가능한 큰 선박에서부터 400~500 섬을 실을 수 있는 작은 선박까지 다양했는데, 이들은 40~50척씩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서해안을 휩쓸었다. 이들의 주요 타깃은 쌀이었으니 영국산 면직물과 서구의 잡화, 중국산 비단을 쌀과 바꾸기도 하였고, 청나라 은화를 주고 사들이기도 했다.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홍삼과 쌀은 이렇게 중국상인들에 의해 중국으로 빠져나갔던 바, 조선의 국가경제는 피폐해졌고 세수(稅收)는 바닥이 났다.  

     

    당시 영국영사보고서(British Consular Reports)에 의하면 1890년 인천 개항장에는 청국 범선 14척과 증기선 18척(총 7,660톤)이 정박했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배들이 인천을 통해 드나들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배들을 타고 들어온 화상들은 인삼·곡물·소가죽·해산물 등을 거두어 갔는데, 나아나 원세개와 진수상(陳樹裳)의 지원 아래 조선에서의 내지통상권, 연안 무역 및 연안운송권, 국경무역권, 서울의 상점개설권을 획득하여 호황을 누렸다. 반면 조선은 선박 운항도 청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남별궁 터에 지어진 환구단 / 1883년 10월 20일(음력 9월 20일) 조선의 상업을 간섭하고 화상을 지원하기 위한 총판조선상무위원 진수상(陳樹裳)이 내한해 남별궁 내에 상무공서를 개설하고 지방에 분서(分署)를 설치했다.

     

    1883년, 청국상점이 19개에 99명이던 화상은 1884년에는 상점이 48개, 화상 352명으로 불어 수표교와 소공동 일대는 그들의 집단 거주지인 차이나타운이 생겨났다. 그들은 차이나타운을 본거지로 급속히 세를 불리었으니 서대문에서 영국공사관에 이르는 이른바 외교관 거리(Regency Street)에 청국상점이 늘어섰고 남대문 일대에도 상권을 형성했다. 더불어 평양, 부산, 인천 , 대구 등지에도 차이나타운이 생겨났다.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

     

    조선상인들은 속된 말로 쪽도 못썼으니, 목이 좋은 곳은 어김없이 가게를 빼앗겼다. 그것은 일본상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항의하면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던 바, 아예 짐을 싸 본국으로 가는 일본상인들도 속출했다. 그 무렵 서울에 거주했던 일본인 혼마 큐스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 경성에서 일본인과 청국인의 세력 강약을 싸움을 예로 들어 말하면, 우리 일본인은 늘 패배하는 쪽이다. 이는 청국인의 쪽수가 많은 데다 일본인을 적대시하기 때문이니,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남대문 근처에 노점을 펴고 잡화를 팔려하면 근방의 청국상인들은 바로 원수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소한 일에도 싸움을 걸고 몰려와 방해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상인들은 매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조선잡기>)

     

    쉽게 생각하자면 청나라 관청에 항의하거나 일본공사관에 하소연하면 해결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1883년 남별궁 내에 총판조선상무위원국을 설치한 진수상은 그곳이 좁다며 이듬해 낙동(駱洞)에 있던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의 집을 헐값에 강제매수하였는데, 이에 반대한 이경하는 진수상에게 뺨을 맞고 원세개 부하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진수상은 이경하의 집에 중국풍의 조선상무국 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갑신정변 후 조선에 장기주둔하게 된 원세개는 좁다는 이유로써 그것을 헐고 새로 큰 건물을 지어 자신의 처소를 마련하고 군대도 주둔시켰다. 이것이 현 중국대사관의 기원이다. 원세개의 처소는 광복 후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아래 <동아일보>의 기사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위용을 자랑한 그 건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본정(本町) 1정목 15번지. 남촌의 심장지대인 진고개의 어귀에 있는 경성우편국의 옆골목을 약 백 미터쯤 들어가면 한 채의 광활한 저택이 있다. 그 안에는 하늘 높이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달려, 찬바람에 휘날리고 있으니 그곳이 곧 한말 풍운의 진원지이던 중국총영사관이다.”(동아일보 1936년 1월 3일자)

     

    (그 집 터를 빼앗긴) 이경하가 누구인가? 그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관평대군의 후손으로 구한말의 권력자 조대비와도 인척 간이었다. 그는 포도대장을 지낼 당시 천주교인들을 무던히도 많이 죽여 세인들로부터 '낙동 염라'(낙동에 사는 염라대왕)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나운 세력가였지만 청국인들의 횡포에는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한 지경이었으니 일본인들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이후 세수가 바닥난 조선은 지속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차관을 빌려와 국가를 운영했던 바, 조선의 식민지화는 가속회되었고 이는 청일전쟁을 불러오는 원인이 됐다)

     

     

    그 무렵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자세의 원세개
    남대문 상가 위로 보이는 중국대사관 / 조선상무국 설치 이후 칠패시장(남대문시장)은 화상 천지가 됐다.

     

    다시 말하지만 원세개의 공식직함은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로서 엄격히 따지자면 그의 권력은 상행위에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조선 주재 10년 동안 감국대신(監國大臣, 조선을 감시·감독하는 대신) 혹은 원대인(袁大人)이라 불려지며 사실상 현대적인 의미의 식민지 총독 노릇을 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조선의 자력갱생을 방해하고 갖은 차관으로써 조선의 경제를 피폐화시키고 근대화를 가로막았는데, 이미 망국의 기미가 드리워진 조선이기 때문이었는지 이를 근심하는 관료의 상소 한 장 없었고, 그저 화상인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조선상인들의 생계형 시위가 세 차례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동안 조선의 경제는 한없이 피폐해졌다. 세입의 확대를 위한 재원을 늘려도 부족한 판에 화상과 잠상에 의해 그나마 들어오던 세수마저 끊겨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조정은 그 부족한 예산을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그리고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과 미국계 타운젠트 양행 등에서 빌려와 국가를 운영했다. 그런데 외국 차관은 원세개의 허가사안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외국계 회사의 차관 제공이나 불리한 차관에는 브레이크를 걸었으니, 조선은 그나마의 세수가 보장되는 것들을 차례로 담보로 제공하고 (예를 들면 1차 담보는 관세, 2차 담보는 홍삼세, 3차 담보로 광산세) 중국에 연 8%의 고율의 이자를 지불하며 돈을 빌려와야 했다. 

     

     * 1889년 5월 민영익은 외교 고문 오웬 데니, 주한 프랑스 공사 콜린 드플랑시(Collin de Plancy)와 함께 비밀스럽게 차관 교섭을 진행한 끝에 프랑스 은행(公達銀行)에서 200만 냥을 차관하기로 약속받았다. (당시 1년 예산은 280만 냥 정도였다) 이 200만 냥 가운데 130만 냥으로 각국의 대소 차관을 원리금 합해 청산하고 나머지 70만 냥을 광산 개발과 철도 부설을 위한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한 것이었다. 외아문 독판서리 조병직(趙秉稷)을 통해 이를 전해 들은 원세개는, 이 차관이 해관 담보임을 알게 되자 즉각 조병직 등에게 압력을 넣어 중지시켰다. (이양자 저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인천 개항장거리 한중문화관
    개항장거리의 인천해관 터 표석 / 1883년 6월 16일 조선 총세무사 묄렌도로프가 창설한 조선 최초 세관이 있던 곳이다.
    해관운용자금 차용사실 확인서 / 인천 개항장박물관
    인천 자유공원 내 세창양행 사옥 초석 / 세창양행은 조선 총세무사 묄렌도로프의 지원을 받던 독일계 회사로서 무역 등의 상행위 외에도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 지원으로(1866년) 조선 내 세미운송권을 획득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부동산 왕 칼 폴터는 '제물포의 왕'으로 불렸다.
    세창양행 사옥 / 독일에서 파견된 직원들을 위해 지은 집이다. 응봉산 꼭대기, 현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화단 자리에 위치했다. 이 건물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었다.
    세창양행 앞에서의 칼 볼터 (왼쪽) / 세창양행은 현 신포로 근대문화거리에 위치했다.
    덕상(독일 상사) 세창양행의 조선 최초의 광고 (당시는 광고를 '고백'이라고 했다) / 1896년 <한성주보> 4호에 실린 광고로서 호랑이 단비가죽 외 여러가지 물건을 사고 판다는 내용이 실렸다.

     

    리홍장은 차관을 이용해 조선정부를 요리하는 이와 같은 원세개의 활약(?)을 매우 기특히 여겨 그를 3번이나 연임시켜 도합 12년간이나 조선에 주재케 했다. 리홍장은 원세개의 정책에 대해 "쓰다듬는 가운데 제어의 뜻을 두고, 조선의 이권을 조정하여 속번을 지배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상찬하고, "그로 인해 종속국이 주제넘게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막고, 열강이 호시탐탐 엿보는 것을 막으며 충성을 다하고 있다"며 크나 큰 만족감을 표했다. 원세계의 이와 같은 전략은 현대 중국 세계경제화의 일환으로써 개발도상국에 차관을 제공하고 빚을 못 갚을 경우 담보로 제공된 광산, 항만, 철도, 공항 등의 운영권을 빼앗는 이른바 일대일로 전략의 예고편을 보는 듯해 흥미롭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 흥미로만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니 이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 자주화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 당시는 디폴트가 도래했을 때가 아닌 차관계약서 체결과 동시에 관세징수권·산림벌채권·어로채취권 등의 이권을 차관제공의 대가로 탈취해갔던 바, 민족자본이 형성되려야 형성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고종은 정신을 못 차리고 이 돈을 흥청망청 썼으니 (요망한 무당 진령군의 말에 혹해) 그 귀한 쌀들을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국태민안을 빈답시고 묻고, (몇 군데만 묻고 나머지는 전부 뒤로 새어나갔다) 한강의 물고기들에게 고기밥으로 보시되었으며 기타 왕실 사치에 이용되었다.

     

    1882~1883년 청국 차관내역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의 북묘묘정비 / 진령군이 있던 명륜동 북묘의 것으로 비문은 고종이 직접 지었다. 관왕(관우)께서 꿈에 나타나 자신과 민왕후를 두 번 구한(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고마움을 절절이 담았는데, 국왕이 이 모양이니 나라 꼴이 제대로 일 리 만무했다.
    북묘묘정비에서 바라본 남산 / 이곳에서 남산을 보면 탁 뜨인 전경임에도 웬지 처연하고 가슴 답답하다.

     

    그러니 원세개는 더욱 조선이 만만하고 호구로 보였을 터, 다음과 같은 망발을 서슴치 않았다.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국이다. 중국을 버린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다. 너희 조선은 대륙의 동쪽 궁벽한 곳에 위치한 나라로서 영토는 겨우 3천 리요,  인구는 천만 명에도 못 미치는 작은 나라다. 또한 세수(稅收)는 200만 석에, 군사도 수 천 명에 불과한 세계에서도 가장 허약한 나라다. 그런 나라가 무슨 부국강병을 도모하려 하는가? “조선은 이미 부서진 배,(破舟) 부국강병 소용없다.”

     

    그리고 부국강병이 필요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덧붙이며 협박하기도 했다.

     

    "다행히 조선은 중국과 인접해 있으므로 의지함에 지리적 잇점이 있다. 중국은 본시 큰 나라이므로 은혜로서 작은 나라를 보살펴왔으니 항상 지극히 어질게 대하고 의리를 다해왔다. 중국이 그렇게 조선을 보살펴 온 지는 벌써 수백 년이 지났는 바, 모두가 믿고 따르면 다른 열강들은 중국의 보호로 인해 야욕을 사그라뜨리고 사라질 것이니 조선은 오직 내정에만 힘쓰면 된다. 하지만 중국과 멀어지면 화가 미칠 것이 자명하니 중국은 조선이 배신했다 생각하여 대병력으로 (조선을) 덮칠 것인데, 그러면 (조선의) 지속된 붕당은 (붕당 중의 친중파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백성들은 내란을 일으킬 것이다."

     

    "중국과의 싸움이 일어나면 친중파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요, 그를 따르는 백성들은 내란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말은 꽤 그럴싸하다. 지금도 친일파는 죽일놈이요, 친미파 역시 탐탁지 않은 말이만, 친중파는 그리 거부감이 없다. 실제로 따르려는 놈들도 허다한 게 현실이다. 나는 그러한 현실이 두렵다. 

     

    * 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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