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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한복판에 자리했던 일본사찰 묘심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5. 10. 00:56

     

    조선왕조 시절 정치 행정의 중심지는 지금의 광화문 광장이 있는 세종대로였다. 당시 이 거리에는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의 6개 관청이 있었고 그러한 까닭에 육조거리(六曹街) 혹은 육조대로(六曹大路)라 불리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교란되었던 것을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며 국초(國初)의 모습대로 되살려놓았다. 

     

     

    조선시대의 육조거리 /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없고 의정부만 옛 모습을 살리려 공사 중이다.
    일제강점기의 육조대로
    지금의 세종대로


    말한 대로 이 거리는 조선시대의 중심지였기에 구한말~일제강점기 이곳을 다녀간 많은 외국인들이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거의가 거리 중심으로 찍은 것들이기에 당시 육조 관청의 건물들을 찍은 사진은 드물다. 다만 대한제국 통신원(通信院) 청사로 전용된 공조 당상대청(堂上大廳, 육조 관청의 중심건물)과 호조 당상대청의 사진이 남아 있을 뿐인데, 오늘 말하려는 것이 호조 당상대청에 관한 얘기다. 

     

     

    형조 터 안내문 / 한국 천주교에서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 때의 순교자들을 기려 세종문화회관 계단 옆에 세웠다. 공조의 오른쪽에 형조가 위치했다.
    대한제국 통신원 본청으로 쓰일 때의 공조 당상대청 건물
    <숙천제아도> 속의 공조 배치도/ 가운데 큰 건물이 당상대청이고 뒤는 연못이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호조는 현 교보빌딩 위 KT 자리에 위치했다. 아래 호조 당상대청은 문자 그대로 당상관(정3품 이상의 고위관료)만이 자리할 수 있는 곳으로, 최고 책임자인 호조판서(장관, 정2품), 호조참판(차관, 종2품), 호조참의(차관보, 정3품)가 근무했고, 그 옆 낭청대청(郎廳大廳)에는 호조정랑(국장, 정5품)이나 좌랑(과장, 정6품)과 같은 중간 간부급의 실무책임자들이 근무했다.  

     

    그런데 아래 호조 당상대청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용마루에 흡사 卍(만)자와 같은 문양이 보이기도 하고, 건물 앞에는 식수된 나무들과 석탑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정청(政廳) 앞에 식수하는 법이 없었고, 석탑을 세우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건물이 과연 호조 당상대청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알고 보니 이 사진은 호조 당상대청이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 임제종 승려에게 팔려 묘심사(妙心寺)라는 절의 선원(禪院)이 된 후 촬영된 것이었다.

     

     

    묘심사 선원(禪院)으로 쓰일 때의 호조 당상대청 건물

     

    호조는 1895년(고종 32) 행정부를 개편할 때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개칭하며 이후 탁지부가 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된 후 육조의 건물이 철거되거나 팔려 나갔는데, 탁지부의 건물은 일본에 건너온 승려가 매수했다. 이것이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구한말에 들어온 종교는 언더우드의 장로교와 아펜젤러의 감리교로 대표되는 기독교뿐만이 아니었으니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 불교 종파들도 허다했다. 

     

    대표적인 것이 1877년, 개항 이듬해에 들어온 정토진종 오타니(大谷)파와 1889년 일본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가 가져온 조동종이었다. 이후로도 정토종, 일련종, 임제종, 진언종 등이 들어왔는데, 이 가운데 교세가 가장 컸던 것은 정토진종과 정토종으로, 이들 불교는 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무주공산의 조선 불교계를 마음껏 헤집었다. 다케다 한시 역시 용산에 서룡선사(瑞龍禪寺)를 건립하고 교세를 확장시켰다. 일본 불교의 이 같은 성장은 당시 한국에 종교가 없음에 기인했다. 이미 불교는 500년 이상 탄압을 받아 겨우 명백만 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오직 무속류의 미신만이 조선의 신앙으로서 설칠 뿐이었다.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스의 외래 종교가 급속히 성장을 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에 종교다운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유교에서 파생된 성리학의 종교철학은 오직 글을 아는 사대부 층만이 누릴 수 있는 분야였고, 민간에서는 조상숭배나 정령신앙 같은 원시신앙만이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까닭에 그들은 몸이 아프면 곧 귀신이 씐 것이었으니, 천연두와 홍역 같은 질병 앞에서도 그저 굿이나 푸닥거리로써 해법을 찾았다.

     

    다케다 한시는 조선에 와서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하는 등 정치적 행보도 하였지만, 그가 조선에 건너올 때 일본 조동종 관계자에게 한 말은 당시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결심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미개한 조선사회에 진정한 종교의 세계를 선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이를 통감부나 총독부에서도 지지해 주었던 바, 남산 통감부(훗날의 총독부) 앞에 정토진종의 동본원사(本願寺)가 오랫동안 존속한 것도 이상하게 볼 일이 전혀 아니었다. (일본 불교는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기도 했고, 총독부의 지원 아래 한국불교와의 통합을 꾀함으로써 전통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남산 총독부 맞은 편에 위치한 동본원사 경성 별원 (화살표) / 동본원사 좌측으로 보이는 고딕건물은 명동성당이다.

     

    여기에는 명암이 있았으니, 유대치 · 박규수와 더불어 개화파 3대 비조로 불리는 개화승 이동인은 부산에 있던 일본 동본원사(東本願寺) 승려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에 의해 개화사상에 눈을 뜬 경우였고, 신촌 봉원사에 머물던 이동인을 만나기 위해 김옥균 · 박영효 · 홍영식 등의 개화파 인사들의 방문이 빈번했던 사실이 봉원사 안내문에 기록돼 있다. 즉 일본 불교가 조선에 나쁜 영향을 끼쳤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동인이 머물렀던 신촌 봉원사
    봉원사 범종각


    묘심사는 일본 임제종에 속한 사찰로, 서울  중구 장사동(長沙洞) 182번지 종묘 건너편 세운상가 길에 있었다. 위 사진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9년 3월 15일자 제3면에 실린 것이며, <
    매일신보> 1915년 11월 11일자에는 묘심사 경내에 위의 탁지부 건물을 옮겨온 이유가 "피폐해진 조선의 불교를 부흥시키도록 일본 사찰 임제종 묘심사 구역에 새로운 법당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었고, 이 건물의 이건식(移建式)에는 오하라(小原) 농상공부장관과 고쿠분(國分) 이왕직차관을 비롯한 다수의 총독부관리가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묘심사에는 종로구 화개동 장원서 터에 있던 명성왕후의 감모비각(感慕碑閣)도 옮겨와 절의 모양을 냈다. 1903년 3월 화개동(지금의 화동)에 설립된 명성왕후 감모비는 을미사변 때 시해당한 명성왕후를 기리고자 그녀가 1882년 임오군란 때 창덕궁을 빠져나와 이틀간 숨어 있었던 사어(司禦, 왕세자의 시위를 맡던 종5품 무관 벼슬) 윤태준의 동네에 세운 것으로  '명성황후 불망(不忘) 추모비'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묘심사에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횡사한 명성왕후의 위패도 봉안되었다고 하는데 그저 어지러웠던 세상을 탓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묘심사는 해방과 함께 철거됐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듯 보이지만, 군산 동국사를 비롯한 일본 절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일본 조동종 승려 우치다 붓깐(內田佛觀)이 세운 동국사가 지금껏 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팠던 옛 일을 잊지 말자는 불교계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니 예외가 되겠으나, 최근 인천 신흥동에서 찾은 해광사의 왜색(倭色)은 기독교의 상륙지 인천에 남은 초기 교회 흔적 못지않게 인상적이다. 다음 회에 그 절을 소개하려 한다. 

     

    전남 목포시 무안동의 동본원사 목포 별원
    군산 동국사 / 대웅전은 2003년 둥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990년대 중반까지 남아 있던 인천 해광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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