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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 장수의 비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9. 23:59

     

    다산 정약용은 75세를 살았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이 40세에 미치지 못한 것을 볼 때 요즘 말하는 100세 인생을 향유한 셈이다.  정약용의 장수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당시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장수의 조건과는 역행된다는 점 때문이다. 질 알려진 대로 그는 18년 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배 생활을 했으며 유배를 전후해 두 번이나 문초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문초라는 게 그저 말로만 힘들게 했을 리 없을 터, 당시의 정치가들은 요행히 목숨을 건져 유배형에 처해져도 심한 문초로 인해 중도에 사망하는 예가 허다했다.

     

     

    남양주시 정약용 생가 여유당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 유배 생활이 오히려 그의 신체를 건강하게 했을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은 죄로 1801년 3월 경상도 장기현(지금의 포항)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다 그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송환돼 거듭 문초를 당했다. 노론 벽파인 사헌부 홍낙안과 사간원 신구조가 황사영의 배후에 정약용 형제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정약용은 거듭되는 고문 속에서도 무고함을 견지해 내 목숨을 구하고 이번에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다산의 유배길남양주 / 다산기념관

     

    이상의 다산의 유배길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다산은 강진에서도 첫 적소(謫所)인 사의재(四宜齋, 사의재는 정약용이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주막에 스스로 붙인 당호이다)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이배되는데, 그중 마지막 머문 곳이 우리가 잘 아는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이름의 초가이다.(이름과 달리 기와집으로 복원된) 그런데 그는 적소를 옮겨다니면서도 그곳에서 친교를 맺은 만적산 백련사 초의선사의 찾아 차(茶)를 즐긴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지 / 남양주 다산기념관
    다산 초당 왼쪽 바위 절벽에 새긴 정석(丁石) / 자신의 성인 정(丁)을 돌에 새겼다.

     

    그는 과거 고향인 남양주 마재에 살면서도 근방의 수종사를 찾아 차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차가 다산의 장수에 도움을 준 것일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이다. 언뜻 가까워 보이지만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의 거리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리고 마재에서 수종사까지의 거리도 그러한데, 특히 수종사의 경우는 거의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방문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길이 좋은 지금도 등산에만 족히  2시간이 소요되는 이 운길산 수종사를 자주 찾았다고 하는 걸 보면 그는 거의 등산 마니아 급이다.

     

     

    수종사에서 본 두물머리
    수종사 은행나무와 두물머리

     

    좌우지간 그는 많이 움직인 듯하니, 글을 쓰기도 많이 썼지만 (그의 저서는 무려 500권을 헤아린다) 걷기도 즐겨 행했다. 그는 등산벽과 더불어 여행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양주 실학박물관에 있는 아래의 그림은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후 손자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움직였던 남양주 마재에서부터 춘천까지의 길을 그의 기행문 <산행일기>에 의거해 재현한 것인데, 중간의 청평사 폭포 구경에 있어서는 과거에 간 적이 있기에 굳이 일행을 따라가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그는 여행에 있어서도 마니아 급이었다는 얘기다.  

     

     

    다산의 여행길 / 실학박물관
    <산행일기>의 내용을 귀엽게 축약시켰다. / 실학박물관
    다산이 말한 청평산 와룡담 폭포

     

    아울러 그는 의학에 관해 조예가 깊었다. 아니 의사였기도 한 것 같으니, 순조가 병에 걸려 고통을 받을 때, 정약용이 있었다면 자신의 병이 치유되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산이 지은 수많은 저서 가운데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유명한 의서(醫書)가 있다. '마진'과 '두창', 즉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를 위해 저술한 의서인데, 서양 의술에 기초해 저작된 중국의 의서를 참고했다고 하며, 그와 같은 중국 의서는 그의 조카 정하상이 북경 출장길에 구해주었다고 한다. (정하상 바오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이들로 부친과 함께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정약용은 그 자신이 어릴 적 두창을 앓은 적이 있으며, 자식 6남 3녀 중의 4남 2녀를 천연두로 잃었다. 다산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알기에 백성들에게는 이와 같은 고통을 주지 않으려 했던 바,  36세에 63종의 의서들을 철저히 고증해서 원증편, 인증편, 변사편, 자이편, 아속편, 어견편, 힙제편, 본초편으로 구성된 8편 1책의 <마과회통>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 책의 치료법은 매우 현대의학에 접근되어 있으니, '원증편'과 '인증편'은 병의 원인을 찾는 법, '변사편'은 비슷비슷한 증상으로 병을 구별하는 법, '자이편'은 마진과 천연두를 구별하는 법, '아속편'은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발병이 잦은 천연두와 홍역의 유형, '어견편'은 이상의 병에 대한 자신의 견해, '합제편'에서는 이상의 병에 대한 처방, '본초편'에서는 치료제에 관해 저술했다.

     

    <마과회통>

     

    앞서 말한 대로 정약용은 1801년 3월 경상도 포항으로 1차 귀양을 갔다. 그런데 그는 그 짧은 기간에도 <촌병혹치(村病或治)>라고 하는 의서를 저술했다. 그곳 장기현 사람들이 너무 의학에 무지해 병이 나면 뱀을 잡아먹거나 무당의 푸닥거리에만 의지하는 것을 보고, 시골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반적 질환에 대한 치유법을 기술한 책이라 하는데,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송환되며 사라져 전하지는 않는다.  

     

    그는 또 <의령(醫零)>이라는 획기적인 의서도 저술했다. 그 책에서는 외감(外感,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질병을 판단하는 일)과 육기(六氣, 음양의 여섯 가지 기운)로 질병을 파악하는 기존의 문진법을 비판하고, 음양오행으로 인체를 해석하는 기존의 방법을 미신적이라고 과감히 비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근시와 원시에 대한 서양의학적인 주장도 실었으며, 나아가 과학적 진료법에 의거한 자신의 치료 사례를 수록하여 신뢰를 높이려 한 흔적도 보이는데, 이를 보면 그는 의학자, 특히 개혁적 의학자임에 분명하다.

     

    조선시대 선비 중에서 의술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들을 '유의(儒醫), 즉 선비의사라고 부른다. 고산 윤선도, 미수 허목, 성호 이익 등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정약용이나 동시대의 최한기 등은 유의의 범주를 벗어난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의사로 여겨진다. 그는 그와 같은 전문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신체관리법, 이른바 '양생법(養生法)'으로써 꾸준히 자신의 신체를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한기 그린 인체도 / 남양주 실학박물관


    정약용이 영의정 채제공과 더불어 수원 화성 건축에 매진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정약용은 화성 건축에 있어 <기기도설(奇器圖說)> 등의 서양 과학기술 서적을 참고해 거중기, 녹로와 같은 중장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장비들을 이용해 10년 예정이었던 화성 건축의 공기를 2년 9개월로 크게 단축하고 비용 또한 절감시켰다. 정조가 그를 사랑하고 아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겠다.  

     

     

    실학박물관의 거중기
    남양주 다산원의 녹로
    수원 화성의 이모저모

     

    약용은  당연히 격무에 시달렸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격무로부터 비롯된 중년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장수에 이르렀는데, 흔히들 이 비결을 웬만한 스트레스쯤은 여하히 극복하고 건너간 그의 강한 정신력으로부터 찾는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정약용이 아들에게 쓴 아래의 편지를 든다.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만 근면하고 민첩할 수 있으며, 지혜도 생기고 업적을 세울 수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약용은 강한 멘탈의 소유자로서, 정신줄을 놓치 않았다. 그리하여 기나긴 귀양살이를 극복하며 장수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그 편지를 받은 아들의 직업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아들 정후상의 직업은 당시 영의정 신현이 쓴 일기 <성도일록>에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동반돼 있다. 

     

    정약용은 같이 유배길을 떠났다가 길을 달리하여 흑산도로 갔던 중형(仲兄) 정약전과 달리 구명(求命)돼 유배지에서 살아돌아왔다. 비록 18년의 긴 유배기간을 보냈지만 어찌 됐든 살아 남양주 마재로 돌아왔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구명의 이유가 바로 <성도일록>에 실려 있으니, 1819년 9월 1일자 일기에는 의원 후상이 찾아온 일과, 그의 아비 약용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오랜 세월 귀양살이 하였으나 후상이 뛰어난 의술로 당대의 권세가들을 치료하면서 아비의 구명 로비를 했고,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정후상은 아비가 죄인이므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의원이 되었던 것인데,(당시 의사는 중인급이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아들 후상도 철저히 건강관리를 해 장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약용은 또 무병장수에 가까웠으니, 말년의 삶의 질도 좋아 죽기 직전까지 집필활동을 하고 여행을 다녔다.

     

    정약용의 장수와 삶의 질이 무난했던 비결로 그의 건전한 취미활동을 들기도 하는데, 그중 그림 그리는 취미를 으뜸으로 삼는다. 장수를 한  선비들 중 퇴계 이황 선생이나  미수 허목, 추사 김정희 등의 그림 취미를 예로 들기도 한다. 아래의 그림은 실학박물관에 특별 전시된 정약용의 그림 '매화병제도'(梅花幷題圖)인데, 그가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엮어 시집간 딸에게 선물한 것이라 한다.

     

    정약용은 강진에 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인 윤창모(1795~1856)를 사위로 삼았다. 딸을 강진으로 데려와 친구 아들과 짝 지워주고 나서 흐뭇한 마음을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한 쌍의 멧새 그림과 시로 나타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필시 행복 호르몬이자 노화방지 호르몬이라는 세레토닌과 베타엔도르핀이 샘솟았을 터이다. 

     

     

    '매화병제도' / 고려대학교박물관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평안한 마음가짐이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은 죄로 정적들에 의해 유배를 간 경우였다. 하지만 그의 많은 저작 중에서 그들에 대한 특별한 분노나 원망을 남은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뜨거웠던 신앙을 포함한 그 모든 것을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고 과거의 일에 얽메이지 않으려 노력한 것 같다. 그것은 그저 마음만 해치는 일이기에..... 그가 따로 사적(私的) 복수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암을 비롯한 온갖 성인병이 벌떼처럼 몰려온다고 한다. 무엇보다 건강한 마음이 건강한 장수의 기본인 것이다. 아래는 어느 공원묘지 입구에 쓰여 있는 경구를 찍어온 것인데, 하염없이 긍정하고픈 말이지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현명한 자는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고, 미련한 자는 그 노예가 될 것이다."
    와룡담폭포 망설임 없이 와룡담으로 떨어지다. 분노와 갈등의 마음도 이같이 흘러갔으면.... 정약용을 따라 북한강을 걷다 / 춘천시민의 신문 <춘천 사람들>의 글과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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