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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김상용은 정말로 자폭 순절했을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17. 17:41
역사적인 1876년의 강화도조약 체결 장소가 이제껏 알려진 강화성(강화산성) 서문 안 군사훈련장의 전각 연무당(練武堂)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연무당이 어떻게 해서 강화도조약 체결 장소로 둔갑되었는지 그 경위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슷한 발음 때문에 빚어진 오류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진짜 장소, 강화 진무영의 열무당(閱武堂)은 어디일까? 지금의 강화읍사무소 일대로 보면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다.
강화읍사무소 길 건너 편으로는 한옥 성당으로 유명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보이고, 넓다란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는데 그 앞 쪽으로 김상용 순의비 비각이 서 있다.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문루의 화약을 폭파시켜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추모 비석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순의비가 2개이다.
왼쪽의 것은 1700년(숙종 26) 당시 강화유수였던 종증손 김창집에 만들어 세운 것이고, 오른쪽 것은 정조 때 7대손 김매순이 세운 것이다. 김매손이 세운 비석은 원래 김상용 순절지인 강화성 남문에 있었다. 그것을 1976년 강화국방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써 현 강화읍사무소 부근에 비각을 세워 옮겼는데, 그 과정에서 숙종 26년의 옛 비가 발견돼 함께 세워진 것이다.
딱히 1976년이라고 못 박기는 힘드나, 그 무렵은 박정희 정권이 전국에 국방유적을 정비하며 각지에 모뉴먼트를 세울 때이고 더불어 이른바 국뽕의 '민족영웅 만들기'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다. 그래서 김상용이 스스로 폭사해 순절한 것이 아니라 담배불 실화로 인한 폭발로 사망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입에 담을 수도 없었는데, 그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난 올해 6월 23일, 김상용의 순절을 부정하는 글 한 편을 보게 보게 되었다. 제목은 「만고충신 김상용, 그는 과연 나라 위해 폭사했나」이다.
글쓴이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숙인 책임연구원으로, 그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명가(名家)의 탄생, 빛과 그림자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주도한 장동 김씨는 안동 김씨의 한 분파로 서울을 근거지로 16세기에 발흥한 가문이다. 이후 300년간 이 가문은 문·무과 급제자가 300명이 넘고, 정승·판서 등 고관대작이 150여 명에 이르며 왕비 3명을 통해 왕실까지 장악한, 부귀와 문화의 최정상 명가로 군림했다. 장동 김씨가 충절(忠節)과 문한(文翰)을 자랑하는 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병자호란 때 활약한 두 선조에서 유래하는데, 바로 김상용(1561~1637)과 김상헌(1570~1652)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 주도한 가문
조선시대의 가문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이익집단이다. 가문을 통해 개인의 존재 의미가 결정되던 사회이다 보니 그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단이 동원되었다. 이름난 가문일수록 빛의 크기만큼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그늘에는 사회적 이익을 독점하거나 국가적 명예를 훔쳐 가문의 번영을 도모하는 따위도 포함된다. 사대부의 자존심과 나라의 명예를 지킨 죽음으로 이름을 얻은 김상용은 바로 이 명가의 조건을 묻기에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서 ‘사고사’
청나라 침공 전에 화약고 터뜨려
친족·측근 “의로운 자결” 잇단 상소
권신에 밀린 왕, 충절지사로 인정
“나라의 해와 별” 후손들 숭모작업
왜곡된 기억도 역사의 한 축 이뤄1637년 1월 22일 저물 무렵 청군(淸軍)이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수 시간 전인 오시(午時)에는 전 우의정 김상용이 남문루에 장착해 놓은 화약고를 터트렸다. 세찬 불꽃이 하늘을 치솟으며 문루가 날아가고 본인은 물론 인근에 있던 많은 사람이 죽은, 시체를 찾지 못할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두 달 전 군기시(軍器寺·병기관리 관청)의 화약 4000근을 강화도로 운반해 놓은 것이다.(인조실록, 1636년 11월 21일) 당시 김상용은 노약자를 우선 대피시키라는 왕의 분부로 강도(강화도의 옛 이름)로 들어가는데, 왕실과 대신(大臣) 가족에게만 주어진 특혜였다.
사건 당일 강도에서 올린 장계(狀啓)에는 "김모(金某)가 불이 나 죽었다"는 기사와 함께 여러 사망자와 나란히 언급되었다. 강화유수는 김상용의 죽음을 사고사로 보고한 것이다. 그 40일 후 왕은 “졸(卒)한 영돈녕부사 김상용의 상례(喪禮)"에 비용을 대주라고 한다.(승정원일기, 1637년 3월 3일) 이는 "대신과 중신의 상(喪)에 으레 장례 물품을 주는" 법전(法典)을 따른 것일 뿐 그의 죽음에 의미를 준 것은 아니다. 그런데 7개월 남짓 흐르자 김상용의 죽음을 포장하려는 기미가 이는데, 바로 "강도가 함몰될 때 의리를 지켜 죽은 신하가 있었으니 김상용 등입니다"(1637년 8월 16일)라는 것이다
사건 초기 보고서와 다른 상소문
다시 두 달이 흘러 10월에는 예조가 김상용의 치제(致祭·나라에서 내리는 제사)를 청하기에 이른다. 제문을 본 왕은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고 홍모(鴻毛)처럼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고 한 서술이 사실과 맞지 않는 듯하다며 돌려보낸다. 게다가 김상용을 '살신(殺身)으로 인(仁)을 이룬 자'라고 하자, 왕은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다. "착한 것을 칭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칭찬하는 말이 참되고서야 죽은 자가 영화롭고 산 자가 사모할 것이다."(1637년 10월 28일) 왕은 사건 초기에 올라온 장계나 전언(傳言)으로 나름 판단하여, 담배꽁초를 화약고에 잘못 던져 일어난 폭발 사고로 본 것이다.
사절(死節)을 인정하는 첫 관문인 치제를 왕이 거부하자 측근인 신익성, 사돈 강석기, 두 아들 광환·광현이 연달아 상소를 낸다. 그들은 큰 변란을 겪은 국가가 급선무로 삼아야 하는 것은 충신을 포상하는 일인데, 대신의 죽음을 애매하다며 버려두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측근들은 사고사가 아니라 노(老)대신의 뜻과 의지가 선택한 자결임을 논증하는 데 주력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담뱃불과 폭발의 관련성에 집중하는데 남초를 피겠다는 핑계로 불을 청했고, 사실은 자폭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 고귀한 신분을 선호한 적의 눈을 피하고자 종과 옷을 바꿔 입어 살기를 도모한 사대부들의 당시 행태를 염두에 둔 듯, "신의 아비가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준 것은 이미 자결할 뜻을 정하고 초혼(招魂)에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한다. 왕이 "같이 타 죽은 자가 매우 많으므로,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들 역시 김상용과 뜻을 같이하겠다며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고 한다.(승정원일기, 1637년 10월 29일)
권신의 승리, 왕권의 추락
김상용의 측근들은 절의를 지켜 죽은 사실이 온 나라 공론으로 이미 정해졌는데 무슨 조사가 또 필요하냐며 왕을 다그치고, '남의 아름다움을 시기한 무리들'이 왕의 판단을 흐리고 있다고 항변한다. 그런데도 왕은 단호하다. "절의를 지켜 죽은 일은 속이거나 숨길 일이 아니며 나라의 법이란 사사로운 정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내가 거짓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지 유독 김상용에게 박해서가 아니다."(1637년 10월 30일)
사실 왕은 김상용에 대한 의심이 없지 않았다. 10년 전 정묘호란 때 김상용이 보인 행적이 『인조실록』과 『속잡록』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도대장(留都大將·임금이 서울을 비웠을 때 도성을 지키던 대장)에 임명된 김상용은 적병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 그 바람에 도적이 횡행하며 여러 관청이 불탔고, 노량진 나루에 두었던 양곡 1000여 석도 잃어버렸다. 이에 강도에 피신해 있던 왕이 영을 내린다. "도성을 무너지게 한 김상용을 추고하라!"(1627년 2월 11일)
김상용의 사절(死節)을 인정하라는 권세가들의 요구는 왕의 권력 기반을 흔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의로운 죽음'과 '단순 사고사'라는 엇갈린 주장은 척화파와 주화파라는 당파적 입장과 결부되면서 국정 혼란을 가중시켰다. 1년여 공방 끝에 김상용은 '절의를 지킨 죽음'으로 공인되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권신에 굴복한 왕의 패배이자 왕권의 추락을 의미한다. 대사헌 서경우는 왕이 김상용에게 온당치 못한 거조(擧措·태도)를 보이며 공의(公議)를 어기니 인심(人心)이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승정원일기, 1638년 5월 5일)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에게 인심이니 공의니 하는 개념보다 더 큰 협박은 없을 것이다.
강화도 충렬사 등에 배향 공간
가족들은 김상용 숭모에 박차를 가하는데, 동생 김상헌과 사위 장유가 주도하고 후손 김창협(1651~1708)이 이어간다. 여기서 김상용은 원래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절대 충신이었다. "아아! 공이 품고 있던 충성과 절개여, 만고토록 길이 해와 별이 되리라"(김상용신도비명, 『청음집』 26) 김상용의 종증손인 김창협은 『강도충렬록』을 지어 김상용의 죽음을 환원 불가능한 지식체계로 정립시킨다. "남문에 어린 충정 북두성에 뻗치니, 우리 가문 승상이 큰 이름 남기셨지. 산천을 철옹성 요새라고 하지 마소, 오직 이 누각 하나 천지를 받쳤다오."(남문루감회, 南門樓感懷) 이후 김상용은 강화도 충렬사와 양주 석실서원 등 여러 곳에 배향되며 온 나라 사람들이 기려야 할 충절지사로 안착한다.
김상용의 화려한 등극으로 남문루의 희생자들은 '김상용과 마찬가지'라며 정려(旌閭·붉은 문을 세워 표창)를 요구한다.(1638년 5월 21일) 김상헌은 8~9명이라고 하고 인조는 많은 사람이라고 한 사망자들은 한결같이 "구차스럽게 살지 않겠다"며 "불 속으로 뛰어들어"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변모된다. 김상용의 손자 13세의 김수전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노나라의 동자 왕기(汪踦)에 비유되며 정려의 혜택을 받는다.(숙종실록, 1704년 3월 15일) 이렇게 내 가족의 이익과 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사건은 재구성되고 기억은 발명되었다. 권문세족이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 선조의 '만들어진 희생'이 후손의 물질적 정신적 유산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역사 속에 묻힌 국가적 재앙
무엇보다 남문루의 진실은 방위 수단인 화약고를 날려 국가적 재앙을 초래한 사건이다. 청군의 강화도 함락은 화약이 터지고 난 몇 시간 후에 일어난다. 한편 자결이라 하더라도 적과의 대적은커녕 일신의 명예를 의도한 것을 의롭다고 한다면 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조선의 장병들은 어떤 죽음인가.
왜곡된 기억과 조작된 사건이 오랜 시간을 지나며 사실이 되고 역사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거짓을 밝혀내고 진실을 되살리려는 힘 또한 역사를 구성하는 한 축이다. 권세가들이 나서서 충절로 마무리한 김상용 사건의 이면을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그 증거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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