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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그때 조선에는 최명길 한 사람만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21. 19:07
     

    성남시 서울공항 가까운 곳에 최기남(崔起南, 1559~1619) 장군의 묘가 있다. 주소는 성남시 수정구 오야동 산3-1이다. 그래서 쉽게 보았고, 또 오야동까지도 쉽게 찾아갔으나 GPS의 문제인지 오야동 입구에서부터 꼬였다. 그래서 오야동 산속 이곳저곳을 헤매다 해 질 녘에야 겨우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었으니 장마기간 중에 훌쩍 자란 초목들로 인해 신도비까지의 접근이 어려웠고, 또 그곳에서부터는 아예 발 디딜 곳을 찾을 수 없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경험으로 볼 때 신도비를 확인하면 무덤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필시 조금만 더 오르면 신도비의 주인 무덤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길이 있음 직한 곳을 골라 몇 차례의 시도를 했으나 몇 발자국 옮기지 못했고, 결국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이쯤되면 무덤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스스로를 달래기는 했지만, 신도비마저 크게 변색돼 두전(頭篆) 외에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음은 안타까웠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수(비석  머리)까지 뻗친 풀들을 걷어내고 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일단 최기남 장군이라는 생소한 인물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최기남 신도비
    흡사 밀림 같은 신도비 주변
    신도비(화살표)가 있는 오야동 산3-1 일대
    오야동 산3-1 뒤로 해가 지고 있다.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최기남은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이던 최명길(崔鳴吉)의 아버지이다. 앞서 '편협했던 장유(張維)의 장대한 신도비'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최명길은 병자호란 후 귀국한 환향녀(還鄕女)에 대해 조선에서 유일하게 인격적으로 대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을 사회적 테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국의 유명한 하천을 회절강(回節江)으로 지정해 그들에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즉 임금으로 하여금 "그 강에서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씻으면 정절이 회복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요,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처벌할 것이다"라는 명을 내리도록 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主和論)을 이끌며 주전론(主戰論)과 맞섰다. 당시 대세는 대책 없는 주전론으로서,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죽자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다 죽고 나면 나라와 국토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명길은 그 의미 없는 싸움에 백성들을 밀어 넣을 수는 없다며 대다수의 주전론자들과 격렬히 대립했다. 

     

     

    서울의 회절강이 된 홍제천

     

    하지만 1636년 12월 13일 청나라 기마대가 얼어붙은 산하를 질풍처럼 달려 쳐들어 왔을 때, 싸우겠다는 주전론자들은 모두 꽁무니를 뺐으니, 오직 이조판서 최명길만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만났다. 그곳이 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인 양철평이었는데, 그를 호위해 동행했던 20명의 조선군인들은 적진이 가까워 오자 전부 달아나버렸다. 그는 그렇게 혈혈단신으로 술과 고기를 들고 들어가 적장을 만났으나 따로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을 터, 왜 갑자기 쳐들어왔는가를 물은 뒤, 중언부언, 횡설수설해 댔다. 그가 그렇듯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왕은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광희문 / 한양도성의 문가운데 시신을 내보내던 역할을 하던 이 '시구문'을 통해 인조 임금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가 살아 남한산성으로 돌아오자 앞서 정묘호란 때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병자호란에 앞서 여진족이 쳐들어온 정묘호란 당시, 그때도 최명길이 홀로 나가 강화도에서 형제관계의 평화조약을 맺고 적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공을 세우고 돌아온 최명길을 부교리 윤집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탄핵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奴敵)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와 같습니다. 부모의 자식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린 자,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오랑캐와 화의를 맺은 최명길을 처벌해야 합니다. 

     

    병자호란에 임해서도 조정은 예조판서 김상헌을 필두로 결사항전의 분위기로 들떠 있었는데,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 참봉 심광수가 남한산성으로 돌아온 최명길의 처벌을 외치고 나섰다.

     

    한 사람 목을 베 화의를 끊고 오랑캐와 화의를 맺은 일을 백성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이런 개소리를 하든 말든 최명길은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쫓아온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해 다시 성문을 나섰다. 화가 난 청나라 군사들은 최명길을 죽이려 했지만, 주화론을 주장하는 그를 청군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명길은 이후로도 양쪽의 통로 역할을 지속했다. 최명길은 형제관계에서 군신(君臣)관계로의 격하, 명나라와의 국교단절, 청군의 명나라 침공 시 군사를 보내 지원할 것 등을 철수 조건으로 내건 저들의 요구를 들고 돌아왔으나 주전론자들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주화론자와 주전론자들이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40일이 흐르자 성안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슬슬 주화론이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성안의 식량은 아무리 줄여 공급해도 50일을 넘길 수 없는 형편이었고, 거기에 청군이 쏘아대는 홍이포는 공포 그 자체였다. 또 거기에 훈련도감의 군사를 필두로 조선군들의 반전(反戰) 데모까지 일어났던 바, 결국 왕은 최명길로 하여금 항복의 국서를 쓰게 했다. 

     

    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군사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명나라를 떠받드는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인즉) 만일 청나라가 군사를 거두어 나라를 보존토록 해 준다면 그 은혜가 그때와 다름없겠습니다....

     

    그러자 대표적 주전론자인 김상헌이 뛰어들어와 통곡을 하며 편지를 찢었다. 이때 최명길이 찢어진 편지를 주어 붙이며 한 말은 매우 유명하다. 

     

    "국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또한 국서를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허나 이 국서는 성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부터 군사가 성 밑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가 없습니다."

     

    1636년 12월 13일, 마침내 국왕 인조는 47일간의 농성을 풀고 내려와 삼전도로 걸어갔다. 그때 인조가 한 말은 성안에서 했던 그 어느 말보다 알려졌다. "아. 오금이 저리구나." 

     

    송파구 오금동의 이름은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렇게 걸어 삼전나루에 도착한 인조는 수항단 위에서 굽어보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항복식을 치렀다. 그로 인해 인조는 목숨을 보존하였고 국가 또한 지켜질 수 있었다. 어느 작가의 말대로 "척화는 실천 불가능한 정의이고, 화친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그 항복식이 치러지는 동안 최명길은 뒤에서 내내 통곡했으나, 그보다 더 크게 울었을 법한 김상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땅히 임금을 호종했어야 할 김상헌은 아예 임금을 따라나서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는 그때 동문을 조용히 빠져나가 고향인 안동으로 가 칩거했다. 인조의 항복이 못내 못마땅했던 것인데, 죽기를 각오한 마당이었으니 겁날 것도 없었다. 그는 안동에서 정말로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가족들 앞에서 목을 매달았다는 김상헌의 행동은 못내 이상했다.   

     

     

    굴욕의 장소 삼전도에 세워진 대청황제공적비
    높이 3.95m의 거대한 비석으로, 비의 표면에는 몽골문과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항복을 받아 국토를 보존해준 청태종의 공덕을 기렸다.
    삼전도비 두 돌 거북 사이의 잘못된 설명문
    비석 없는 돌거북의 유래를 청나라 측의 변덕에서 비롯된 양 적었으나,
    삼전도비 자체가 청나라의 요구가 아닌 인조 임금의 자발적 복종심에서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앞서 적시한 바 있다.
    영화 '남한산성' 속의 최명길과 김상헌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올리는 인조
    오열하는 최명길
    삼전도비 앞에 선 '남한산성' 출연 배우들

     

    알려진 대로 최명길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있어 내내 주화론자였다. 그는 대국 청나라와 싸움은 필패(必敗)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화친을 주장했던 것인데, 그래서 언뜻 그를 나약한 사대주의자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애오라지 명나라만을 받들며 무모한 항전을 고집한 김상헌과 같은 자들이야 말로 오리지널 중화주의 사대론자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나, 이미 최명길은 여진족의 발흥을 깨닫고 일찌감치 왕에게 표를 올려 군사령부를 의주로 옮길 것과 평안도 병력을 여진족과 마주한 의주로 전진 배치시킬 것을 주장했다. 조선에 위협적인 여진족의 예봉을 사전에 꺾어놓자는 것이었다. 1636년 9월, 그가 한성부윤(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주장한 내용이었다. 

     

    그는 발흥하는 여진족이 언젠가는 조선을 쳐들어오리라 여기고, 오래전부터 이를 막고자 노력했던 것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널 때도 의주에는 아무런 방위선이 없었다. 그런데 최명길은 여진족이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가(史家)들은 최명길이 그것을 아버지 최기남을 통해 알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기남은 우계(牛溪) 성혼의 제자로서 1602년 알성문과에 합격한 문신이었다. 하지만 국방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남들이 한직(閑職)으로 기피하는, 그래서 8번이나 사령을 구하지 못한 함길도 영흥대도호부사를 자청해 북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압록·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이 부족장 누르하치 휘하에서 강성한 종족으로 자라는 모습을 목도했다.

     

    그는 아들 최명길에게,  "지금의 야인(野人, 여진족)은 과거의 야인들과는 다르니 그들과 되도록 싸움을 하지 말고 '和'하라"고 말하곤 했다. 다만 그 방비만큼은 충분히 하라고 일렀고, 최명길은 그것을 실천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두 차례의 호란을 맞았으며 급기야 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했다.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기남은 <무예도보통지>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무예서로 일컫는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의 저자이기도 하다. 다른 한 가지 책은 <무예제보>이다. 최기남은 왜군의 격퇴를 위해 임진왜란 중인 1598년에 편찬된 <‘무예제보>의 후속 편을 왜란 후에 저술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특히 '왜검법(倭劍法)'을 강조하고 있다. 조총과 더불어 위력적이었던 일본의 검법을 우리도 익혀 실전에 쓰고자 연구하여 수록했던 것이다.

     

     

    < 무예제보번역속집> 속의 '왜검보(倭劍譜)' 일러스트
    계명대학교 소장 < 무예제보번역속집>

     

    최기남은 타고난 강직함으로 관직의 부침(浮沈)이 잦았다. 그는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훈련도감 도청이던 1610년 10월, 자신의 저술을 목판으로 간행해 세상에 알렸다. (<무예제보번역속>은 현재 계명대 도서관과 미국 하버드대학교 엔칭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것이 국방력을 강화해 병난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애족의 마음에서 비롯됐음은 불문가지일 터이다.

     

    그 책에 수록된 무기 훈련법 중에는 구창이나 협도곤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여진족 기마병들을 의식해 수록한 것으로 보이니, 그 두 무기의 쓰임새는 달리는 기마병을 찌르거나 끌어내리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듯 다가올 국난에 대비했으나 막상 그 무기들이 실전에 사용된 기록이나 흔적은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무덤은 치욕의 현장 삼전도로부터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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