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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오야동에 있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막으려 했던 어떤 이의 흔적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23. 22:4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있어 조선은 방비에 소홀했다. 그런데 그것이 병력의 열세에서 오는 원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작전의 미스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구석이 있다. 즉 임진왜란 때는 문경새재와 같은 요충을 이용해 적을 막았다면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을, 신립은 탄금대 벌판에서의 기마전을 택해 패배를 자초했다. 이것은 훗날 원군으로 온 명나라 총사령관 양호도 의아하게 여겼던 것이니, 선조를 만난 양호는 대번에 이렇게 힐난했다.
"산이 많고 막강한 궁시(弓矢)가 있는 조선이 왜 한방에 패해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소."
혹 소문 대로 너희 조선과 왜(倭)가 공모해 명나라에 쳐들어 올 수작이었지 않은가를 따져 물은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경새재를 넘은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이 천험의 요새에서 한 명의 적군도 만나지 않았음을 의아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대신 고니시의 왜군은 충주 달천 벌판에서 신립 장군의 기병대를 만났다. 앞서 여진족 니탕개의 침입을 분쇄했던 조선의 자랑 신립의 기병대였다.
적진이고 뭐고, 신립의 기병대가 가는 곳은 곧 길이 난다고 소문난 500여 명의 정예 기병대로서, 신립은 그 기병대를 이끌고 충주로 출발하기 전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린다면 성공하지 못할 리 없지 않겠는가?"
그는 또 왜군의 조총도 과소평가했다.
"적에게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봉 고니시 부대와 조선의 주력군이 첫 충돌한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은 전멸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 탄금대 전투는 왜군 측에서 보자면 나가시노 전투의 재판(再版)이었다. 나가시노 전투는 1579년에 일본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여기서 최고의 기마군을 보유한 '다케다 가쓰요리'군은 조총을 지닌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무참히 패배했다. 아버지 '다케다 신겐'은 이 기마군으로써 전국시대 유일의 무패의 장수로서 군림했지만,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신무기 앞에서는 무력했다.
나기시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는 평소 전법대로 기마대를 앞세워 돌진했으나, 그 기마병들은 철포(조총)를 맞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싸움은 그렇게 끝났던 바, 나기시노 전투 이후 '무뎃뽀'(無鐵砲)라는 말이 생겨났다. 철포 없이 전장에 나서는 대책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전투에서 대충 쏘아도 달려드는 기마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 기마병들이 밀집상황인 까닭에 벌어진 전황이었다. 이것이 탄금대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던 것이니, 전황은 신립의 예견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이미 많은 전과(戰果)로써 실력을 증명한 바 있는 신립의 기병대였으므로 조정에서도 신립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들려온 것은 패전의 비보였고, 이에 임금 선조 빗속에 피난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왜군을 막아설 조선의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병자호란 때는 성을 의지해 농성전을 벌였다. 청태조 홍타이지는 자신의 황제 즉위식에서 조선 사신 2명이 절하기를 거부하고 깽판을 부린 일을 잊지 않았다. 조선 사신이 잔치상을 엎는 등의 깽판을 부린 이유는 오랑캐가 황제에 오르는, 말도 안 되는 행위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홍타이지는 조선에게 거듭 모욕을 당했는데, 그는 그것을 병자호란을 통해 되갚고자 했다.
압록강이 얼어붙기를 기다렸던 청군은 1636년 12월 초 질풍 같이 기마대를 몰아 3만 명의 병력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실 '상황 끝'이었으니 인조는 47일 간을 버티다 추위와 배고픔에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이래 청군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성안 식량에는 한계가 있을 터, 괜한 공격으로 피해를 내느니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청군이 그와 같은 지구전을 택한 것은 배후에 자신들을 공격할 만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2월 초 청군이 남하했을 때 얼마나 빨리 왔던지 왕은 강화도로 가지도 하지 못한 채 궁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앞서 말했듯 그나마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수 있었던 것도 이조판서 최명길이 양철평(은평구 녹번동)에 나아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시간을 끈 덕이었는데, 그가 아니라면 어쩌면 인조는 말죽거리(서초구 양재동) 쯤에서 청군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었다. 남한산성으로 도피하던 인조가 말 위에서 양재동 농민이 주는 죽 한 그릇을 급히 챙겨 먹고 떠난 일은 말죽거리 지명 유래의 가장 유력한 썰이다.
12월 말 심양에 있던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에 이르렀을 때도 10일밖에 걸리지 않았던 바, 이는 조선군의 북방 방위선이 완전히 무력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청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가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 대표적으로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청의 칩입에 대비해 군사를 조련 중이었고 그의 휘하로는 한명련, 기익현, 이수백 등의 맹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건주여진의 진압에 효과적이었던 신립의 기마부대와 같은 군대를 지향했다.
만일 이괄의 난이 없어 그들이 모두 죽지 않고 생존했더라면 병자호란의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으라 여겨진다. 이괄의 난에 희껍한 조정은 이후 북방주둔군의 발호를 두려워해 병력의 배치를 크게 줄이는 단견(短見)을 보였고 이것이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북방이 어이없이 뚫리는 결과를 낳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때 북방 경비의 강화를 외친 사람은 최기남·명길 부자(父子)뿐이었다.
지금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은 (진나라 시황제 때의 것이 아닌) 명나라 하북성 계주총병 척계광이 쌓은 것이다. 그는 하북성으로 오기 앞서서는 절강성에서 극성을 부리던 왜구 격퇴에 진력했는데, 이때 펴낸 책이 <기효신서>로서 이 병서는 조선의 방위 체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568년 하북성으로 온 척계광은 이번에는 발호하는 여진족의 격퇴를 목적으로 하는 <연병실기>를 편찬했다. 그는 이 책에서 보병과 기병의 공조로써 여진족을 막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요지는 북방기병에 대응하기 위한 '거기보전(車騎補戰)'으로, 전차와 기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대 단위의 구성원을 주축으로 삼았다.
잘 알려지지 않는 스토리이나, 후금(後金,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곧 청·淸으로 개칭함)의 누루하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에 원군 파견을 제안했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함길도 영흥대도호부사로서 여진족의 성장을 시켜본 최기남은 언젠가는 후금이 조선을 침략할 것을 예견했고, 척계광의 <연병실기>를 수입해 조선판 <연병실기>의 발문을 썼다. 1610년 5월의 일로, 앞서 말한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간행하기 5개월 전이자, 호란(정묘호란)이 발발하기 17년 전이었다.
최기남은 <연병실기>의 발문에서, "<기효신서>는 일본군이 쳐들어 온 뒤에 받아들였으므로 유비무환이 아니지만, <연병실기>는 지금 받아들이면 오랑캐가 쳐들어오기 전이므로 유비무환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연병실기>에 나오는 전차를 실제로 제작하였고 보병의 대오를 갖추어 영흥대도호부 훈련장에서 실전연습까지 했다.
하지만 조정은 정쟁에만 몰두할 뿐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으니 적들이 코 앞에 이르는 동안 별달리 대응한 것이 없었다. 급박해진 조정은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도망갔고 농성전에 벌일 수밖에 없었으니,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자 결국 개전 50일 만에 국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국치를 당하게 된다.
그 선각자 최기남의 무덤이 성남시 오야동에 있다는 사실과 그곳의 신도비를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위치를 어렵게 확인했지만 울창한 수풀로 인해 결국 오르지 못한다는 말도 했는데, 아무튼 그 덕분에 오야동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차제에 그것들을 소개하려 한다.
성남시 오야동은 수정구 신촌동이 관할하는 법정동이나, 최기남의 무덤을 찾을 때는 오야동 산3-1로 검색해야지 신촌동으로 검색하면 실패한다. 오야동은 기와를 굽던 와실(瓦室)이 왜실이 됐고, 이후로 왜실, 혹은 오야실로 불렸다는데 가마터와 같은 흔적은 전혀 발견된 적이 없는 바, 근거로써 미약하다.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야소(梧野所)라고 불렸다는 얘기나, 자두나무가 많아 오야실(實)로 불렸다는 설도 오동나무나 자두나무가 흔치 않은 탓에 근거로 삼기 힘들 듯하다.
왜실쉼터 느티나무 근방에 유명한 전통찻집 ‘새소리물소리’가 있다. 그저 이름뿐이 아니라 실제로 새소리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곳은 1923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인조 임금 때 호조참판을 지낸 경주이씨 가문의 어떤 이가 입향한 후로 대대로 이곳에 살던 경주이씨 마을에 지어졌다. 이 집은 한국전쟁 때 UN군과 중공군이 번갈아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영국 BBC가 대한민국 대표찻집으로 소개한 후로는 적어도 주말에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야동공소라는 특이한 성격의 건물이 있다. 오야동공소는 1900년에 지어진 종교시설로, 마을 주민들이 모여 천주교미사를 드리던 곳이다. 하지만 신부와 같은 성직자가 상주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성당과는 성격을 달리하는데, 가선대부 호조참판 한대호(1801~1864)의 부인 김해김씨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성제(聖祭)를 올렸던 곳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한다. 전체 평수는 14평 정도이고 2003년 재건축하였으며, 지금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성직자가 상주하지 않는 종교시설물로 존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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