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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 왕건의 전설이 서린 성거산 천흥사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7. 16. 21:29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천흥사 종1969년 7월 이전에는 구덕수궁미술관에 소속됐던 것으로 덕수궁미술관이 이왕가(李王家)미술관이던 시절에 마키노 츠도무(牧野務)라는 일본인 골동상으로부터 거금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우리의 것을 우리 땅에서 일본인 골동품상으로부터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안내문에는 시대의 아픔을 말해주는 듯한 「1910년 구입, 덕수 2445」라는 암호와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마키노가 이왕가박물관에 이 종을 판 날은 1910년 7월 28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되기도 전이다. 그때 이미 국가의 보물이 거래될 정도로 조선은 절단났다 보면 될 것 같다. 자세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천흥사 폐사 후 이 동종은 이 절, 저 절 옮겨 다녔던 것으로 짐작되며,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성의 시보를 알리는 용도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도둑놈은 이것을 떼내 훔쳐간 듯하다.  

     

     

    천흥사 종/ 높이 187㎝, 국보 280호
    안내문

     

    천흥사 종은 상원사범종과 성덕대왕신종 다음 가는 거종으로서 신라 종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달라 고려 종의 대표가 될 법하다. 가장 부각되는 것은 종을 거는 용 모양의 고리 용뉴(龍鈕)로서, 5단의 마디에 꽃무늬가 장식된 음통(音筒)과 함께 우수한 제작기법이 눈에 띈다. 대나무처럼 마디를 가진 길고 화려한 음통은 한국범종만이 가진 특성으로 긴 맥놀이를 형성하는 주요 요건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용의 앞뒤를 보면 영화 '괴물'에나 오는 골뱅이 괴물과 흡사해 흥미롭다)  

     

     

    천흥사 종과 용뉴

     

    종신(鍾身) 상부에는 네 군데에 사다리꼴 모양의 곽을 만들어 9개의 연꽃봉오리 장식을 덧붙였고, 하부에는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와 비천상을 교대로 배치했다. 비천상은 구름 위에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승천하는 자세를 돋을새김한 우수한 부조로서 통일신라의 형식을 계승했다. 

     

    새롭게 나탄나 양식은 종신에 위패 모양의 돋을새김을 만든 것인데, 그 안에 ‘聖居山天興寺鍾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는 명문을 양각하여 이 종이 통화(統和, 요나라 연호) 28년인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성거산 천흥사에서 제작된 범종임을 알게 해 준다.

     

     

    비천상과 명문 위패

     

    명문에서 보이는 성거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에 있는 산으로, 태조 왕건이 산 위에 오색의 구름이 걸쳐 있는 것을 목격한 후 성거산이라 이름 짓고 921년(태조 4년) 천흥사라는 절을 창건했다. 이후 현종 때 위의 큰 범종이 제작되었던 것을 보면 절은 고려조 내내 성세(聲勢)를 누렸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폐사되어 오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천흥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54호)
    천흥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9호)
    2019년부터 진행돼 온 천안시의 정밀 조사 결과 금당지(추정)와 함께 2호 건물지, 회랑지, 답도시설 등이 추가로 확인되어 고려 최대급 규모의 사찰임이 밝혀졌다. / <굿모닝 충청> 사진
    천흥사명 기와 / <굿모닝 충청> 사진

     

    태조 왕건이 창건한 절로는 936년(재위 19년)에 세운 논산 개태사가 유명하니 지금도 남아 있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후백제 왕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장소로 추정된다. 즉 개태사는 고려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사건을 기념해 세운 것인데, 그에 앞서 성거산에 천흥사를 지은 것은 삼국통일 전쟁 당시 자신이 본 오색구름을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루라는 하늘의 계시로 여기고 그것을 기리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천흥사라는 절 이름도 하늘의 도움으로 흥왕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태사지 석조삼존불입상

     

    이와 같은 신의 계시는 흡사 로마 통일전쟁 때인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의 형제이자 또 다른 황제인(당시는 황제가 4명이었다) 막센티우스의 군대와 티베르강 유역에서 충돌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군사는 수적으로 열세여서 불리한 전황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적군을 기적적으로 무찌르고 패권을 쥐게 되는데,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전투를 앞둔 10월 28일 저녁, 하늘의 석양 위로 빛나는 십자가를 보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이런 식의 환상을 보았다고 함 / 책에는 '라바룸'이라 하는 ☧ 형식의 십자가로 나옴.

     

    그리고 "이 표시로서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라는 천상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다음 날 군인들의 방패에 이 십자가의 문양을 그려 출전하도록 했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잘 알려진 대로 콘스탄티누스 이후 크리스트교를 공인해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거듭나는 데 초석이 된다. 하지만 속내는 양자가 달랐으니, 왕건은 고려를 불교국가로서 키움과 동시에 자신도 열심히 불교를 믿었던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고 전래의 로마 태양신을 신봉하였다. 그의 기독교 공인은 다분히 정략적 선택이었음 알 수 있게 해 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선문 / 머리 부분에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는 티베르 강 전투의 부조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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