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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의 주먹 시라소니 린치 사건의 진실 (I)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7. 25. 06:26

     

    청계천 22개 교량 중의 중요 다리였던 장통교(廣通橋)는 장통방(長通坊)의 다리라는 의미로서, 장통방은 조선시대 한양이 52개 방으로 구획되었을 때의 한 구역이다. 장통방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남대문로1가, 관철동, 종로1·2·3가, 서린동, 무교동, 관수동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장통교는 2005년 청계천 복원과 함께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 앞과 청계천 젊음의 거리 사이에 옛 모습 비슷하게 복원됐는데, 예전에는 그곳이 아니라 삼일대로가 통과하는 삼일교 자리에 있었다. 오늘부터 2~3회에 걸쳐 다루려 하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은 당대 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가 1953년 8월 그 다리를 건너며 시작된다.  

     

     

    1950년대의 장통교 사진
    장통교의 최근 사진
    2005년 복원된 장통교
    중앙국립민속박물관 마당에 재현된 추억의 거리 / 왼쪽 자전거 위에 얹힌 솥단지는 솜사탕 틀이다.

     

    잘 알려진 대로 6.25전쟁 후 어수선하던 서울거리에 자리 잡은 두 주먹 세력이 이화룡의 명동파와 이정재의 동대문파였다. 그리고 청계천은 두 세력의 경계선으로 획정되었던 바, 그때가 1953년 봄쯤으로, 서울의 터줏대감 주먹으로서 자유당 동대문지구당 부위원장을 지내던 김사범이 동대문파의 전권특사로 파견되어 명동파 두목 이화룡에게 청계천을 양자간의 불가침라인으로 삼자는 안(案)을 제의하고부터였다.

     

    남북간의 3.8선 같은 것으로 여긴 이화룡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명동 쪽에서 그 3.8선을 무시로 넘나들며 동대문 사단의 이정재에게 삥을 뜯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 유명한 시라소니 이성순이었다. 이름보다는 시라소니, 혹은 히라소니로 더 잘 알려진 당대 최고의 싸움꾼으로 인정받던 자.....  

     

     

    드라마 '야인시대' 속의 시라소니

     

    시라소니는 스라소니라는 동물의 평안도 방언이다. 스라소니는 고양이과에 속한 짐승으로 삵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삵보다는 크고 범보다는 작은, 길이 1m 정도의 사나운 육식동물이다. 일설에 따르면 평안도에서는 스라소니라를 호랑이에 훨씬 뒤처지는 동물이라 해서 집안에서 뒤떨어지는 형제를 시라소니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옳지 않은 말로 여겨진다.

     

    스라소니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 시베리아 일대에서 서식하는 동물로 호랑이, 범과 함께 최상위 포식자이다. 그리고 그 수가 범이나 호랑이보다 많아 흔히 토표(土豹)라고 불렀다. 즉 스라소니를 토종 범이라 불렸던 것인데 표범처럼 나무 위에 잘 오르지만 호랑이처럼 헤엄도 잘 치는 능수능란한 사냥꾼이다. 

     

    스라소니는 사냥에도 특질이 있어 사냥에 임해서도 평소처럼 느릿느릿 졸린 듯한 눈으로 있다가 어느 순간 번개 같이 달려들어 먹잇감을 포획한다. 이성순이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유도 그 때문이니, 매가리가 없이 굴다가도 싸움이 시작되면 고양이과의 동물처럼 스프링처럼 튀어 공격하는 것인데, 마음먹고 공격하면 당구대의 긴 쪽을 단번에 건너뛴다고 한다. 그 너머의 상대가 어떻게 되었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시라소니 이성순(李聖淳, 1912~1983)
    토표(土豹) 스라소니

     

    그와 같은 케이스로 당한 상대가 평양 박치기 박두성이다. 이화룡의 출현 이전, 평안도의 독보적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던 박두성은 서북지방 황소를 다 쓸어갔다는 전설을 가진 씨름꾼 출신의 건달로, 키 182cm 몸무게 90~100kg의 거구에, 높이 50cm가량의 돌절구를 한 손으로 들어 던지는 괴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그의 특기는 공중걸이 박치기로, 그 덩치가 공중을 날아 상대방의 안면이나 가슴팍을 들이받으면 그 즉시 싸움이 끝났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갈 일이다.

     

     

    6080 추억상회에서 빌려온 55cm 돌절구 이미지

     

    그와 시라소니가 1936년 신의주역 레스토랑에서 맞붙었다. 이미지 상으로는 시장통 뒷골목의 국밥집을 좋아할 스타일이지만 이성순은 의외로 깔끔한 양식을 즐겼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로 신의주와 만주를 오가는 동청철도를 타고 다니며 밀수를 한 덕에 돈도 꽤 번 상태였다. 신의주 부농 집안 출신의 그는 가세가 기울어진 1931년부터 신의주와 선양 사이를 오가는 기차를 이용해 만주국의 고급 군용품을 조선에 들여와 팔았는데 여차하면 물건과 함께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었다. 그만큼 몸이 날래고 운동신경이 뛰어났다는 얘기다. 키는 175cm였고 몸무게는 80kg 안쪽이었다.  

     

    당시 일본이 지은 신의주역사는 3층 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2층은 호텔, 3층은 레스토랑으로 이용됐다. 부하들과 함께 유람차 신의주에 들렀던 박두성은 유명한 신의주역사 레스토랑에서 음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했는데, 마침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던 이성순과 시비가 붙었다. 그때 이성순은 긴 말 없이 그대로 몸을 튕겨 테이블 너머의 박두성을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KO시켰다 하며, 우연찮게도 그 한 방이 박두성의 주특기인 공중걸이 박치기였다고 한다. (신의주제일고보 출신 김봉재 씨의 증언 / 작고) 

     

     

    당시의 신의주 역사
    지금의 신의주 역사 / 구 건물은 한국전쟁 때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며 신축된 지금의 역사는 개명된 역 이름을 따라 신의주청년역사로 불린다. 사진 속 인물은 종북주의 재미교포 신은미 (오마이뉴스 사진)

     

    박두성은 그 한 방으로 주먹계를 떠났고 (당시 31세) 이후 평양거리는 이화룡이 접수했다. 일반적 생각으로는 시라소니가 바통을 이어받아야 옳을 것 같았지만 시라소니는 워낙에 도꼬다이 스타일이라 패거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먹으로 남의 이권을 뺏는 일도 원치 않았다. (도꼬다이는 특공대의 일본어로, 본 뜻과는 다르게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행동하는 주먹을 이르는 말이 됐다) 

     

    이화룡은 1914년 생으로 이성순과 나이가 엇비슷해 친구처럼 지냈는데 그러면서도 이성순을 형님 비슷하게 대접해(실제로도 나이는 이성순이 두 살 더 많다) 충돌을 피했다. 그리고 이성순이 밀수해 온 물건을 고가에 사주곤 하였으므로 친구이자 동업자의 관계로 공생할 수 있었다.

     

    그는 해방 후 김일성과 소련군의 성화에 한국전쟁 전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친누나의 연고가 있던 명동에 자리 잡고 왜정시대 하야시 낭인 패거리의 나와바리를 새롭게 접수했는데, 훗날 주먹세계의 일획을 긋게 되는 '시라소니린치 사건'도 실은 도꼬다이 주먹 시라소니가 명동의 평안도 패거리를 은근히 편들면서 비롯됐다. 이에 그간 팽팽하던 명동파와 동대문파의 힘의 균형이 명동 쪽으로 기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동대문 패거리가 이른바 '주먹황제에 대한 역성혁명'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화룡(李華龍, 1912~1984)
    1950년대의 명동거리

     

    이성순은 박두성을 쓰러뜨린 이후에도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생업을 지속했는데, 그가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불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생업의 와중에서 여러 건달패, 혹은 마적단과 생사를 건 결투를 벌이게 되니, 그중의 중요 전적만 간추려보면, 신의주 칼잡이 김장손, 하야시라는 일본이름을 쓰는 상하이의 중국인 칼잡이, 북경 야쿠자 오야붕이자 공수도의 대가 구로야마, 북경의 쿵후 일인자 마오, 상하이 주먹패 두목 장천룡, 만주 장춘(봉천) 마적 패거리와의 약 30:1의 싸움, 천진항에서 벌인 일본 야쿠자 가네미야 패거리와의 40:1의 싸움 등을 들 수 있다.

     

    이성순은 이 싸움을 모두 이기며 시라소니라는 이름을 대륙과 반도에 걸쳐 떨쳤으나 오직 상하이 주먹패 두목 '독수리 장천룡'과는 무승부를 거두었다.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으나 장천룡은 조선인으로서 홀로 상하이로 가 항구의 주먹패들을 모두 제압하고 밤의 황제가 된 인물이었다.

     

    상하이 황포탄 밤 항구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대결은 오랜 시간을 싸웠음에도 승패를 볼 수 없었고, 통이 틀 즈음 장천룡의 부하가 제안한 "아무래도 결판이 안 날 것 같으니 무승부로 하자"는 의견을 양자가 받아들임으로써 싸움이 끝났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훗날 장천룡은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상하이 헌병대로 끌려갔고 이후의 생사는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시라소니라는 해방과 더불어 고향에 돌아왔고 6.25전쟁 전 월남한다. 그리고 1949년에 맨발대장 이영순과 김동회를 차례로 꺾으며 천하무적 싸움꾼의 서울 입성을 알린다. 

     

    이영순은 자신과 싸웠던 상대가 발차기를 맞고 뇌진탕에 걸리자 이후로는 신발을 벗고 싸워 맨발의 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발 사이즈 37cm에 2m가 넘는 거구로, 유지광이 지은 <대명(大命)>에서 명동파의 중간보스쯤으로 소개돼 이후의 드라마 등에서도 모두 그 정도 레벨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나와바리를 거느렸던 보스급으로, 과거의 구마적에 비교되던 실력파 싸움꾼이었다.

     

    김동회는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과 막상막하의 겨루기를 보여줌으로써 세인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는 실제로도 최고 싸움꾼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시라소니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그가 술을 먹던 명동을 찾아가 시비를 걸어 결투를 청했다고 한다. 전설의 주먹 시라소니와 한번 붙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김동회 역시 깨졌다는 설이 일반적이나 결판을 내지 못해 무승부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찌 됐든 시라소니를 꺾지 못한 것은 확실한데, 진짜 궁금한 것은 그다음에 시라소니가 직접 김두한을 찾아가 건 싸움의 결말이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말년의 김동회 옹
    김동회 역으로써 일세를 풍미했던 배우 이일재는 2019년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58세)
    시라소니와 김동해가 한판 벌였던 명동국립극장 앞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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