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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소니 린치사건의 진실(III) - 동대문사단 이정재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7. 30. 05:46

     

    시라소니를 깨야 한다는 것은 이석재뿐 아니라 동대문파 거의 모두의 소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너무 막강한 상대라는 것이었는데, 오야붕 이정재에게는 실행을 망설이게 하는 보다 더 큰 고민이 있었다. 앞서 얘기한 시라소니에게 입은 몇 차례의 은혜였다. 따라서 시라소니를 깨는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에 다름 아니었던 바, 성사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옳고 그름의 여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이정재는 끝내 내켜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삥을 뜯길 수도 없는 일..... 이정재의 갈등이 깊어지자 이석재가 다시 바람을 넣었다. 정 그러면 자신과 김동진이 알아서 할 터이니 회장님은 나서지 말고 모른 척 집에 계시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정재와 중간보스로 얼굴이 익히 알려진 조열승, 그리고 공인인 김사범(자유당 동대문지구당 부위원장)은 이 일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물러나 있는 것으로써 승낙을 받아냈다. 

     

    이정재가 승낙을 한 결정적인 요인은 "시라소니는 어디까지나 명동파 사람"이라는 이석재를 포함한 다른 중간보스들의 주장이었다. 딴은 그것도 옳은 말이긴 했으니 명동파의 보스인 이화룡, 2인자인 정팔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먹이 시라소니와 같은 평안도 사람이거나 서북청년회 출신들이었다. 그러니 팔은 아무래도 안쪽으로 굽을 수밖에 없을 터, 결국 이것이 이정재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정재 (李丁載, 1917 ~ 1961)
    이정재의 자리를 넘보던 김동진
    그 꼴을 못본 이석재
    당시의 동대문시장

     

    이석재는 며칠 후 김동진, 김양수, 고일심, 이기만, 박남수 등을 불러 시라소니 린치 계획을 짜고, 조직 내에서 주먹 좀 쓴다는 부하들을 10여 명 추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쇠 파이프, 자전거 체인, 자동차 판스프링을 갈아 만든 칼과 손도끼 등으로 무장시킨 다음, 명동파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점포 임대계약서에 서명 날인을 해야 하니 금일 중으로 동대문상인 연합회 사무실로 와 달라는 용건으로서, 이것은 곧 시라소니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시라소니는 회현동에 살았다) 

     

    이에 시라소니가 희색이 되었지만 이화룡은 모종의 흑막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워했다. 동대문파에서 그 어려운 부탁을 선뜻 들어주고 또 전화까지 했다는 사실이 께름칙했던 것이었다. 걱정스러웠던 이화룡은 자신의 부하 둘을 붙여주었지만 시라소니가 그들과 함께 갈 리 만무했다. 결국 시라소니는 평소대로 그날도 혼자 장통교를 넘었는데, 다만 다리 부근에서 레슬링 선수이던 고향 후배 신병철을 만나 동행했다. 동대문에 가서 일을 보고 같이 술 한잔을 하겠다는 것이 시라소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재의 책상 앞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주인 대신 이석재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는데, 주변의 낯선 얼굴들은 그보다 훨씬 더 경직된 표정이었다. 시라소니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이석재에게 물었다.

     

    "덩대는 오데 갔니?"

    "이 새끼가 어따 대고!"

     

    시라소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곁에 섰던 김동진이 욕설과 함께 주먹을 날렸다. 순간, 으억!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김동진이 나가떨어졌다. 시라소니가 날아오는 주먹을 왼쪽 팔로 비껴냄과 동시에 머리통을 디밀어 그대로 김동진의 안면을 들이받아버린 것이었다. 김동진은 카운터를 맞았으니 다운되는 것은 당연했는데, 게다가 눈두덩을 맞았는지 찢어진 왼쪽 눈 위에서 곧장 선혈이 솟구쳤다. 김동진이 쓰러지자 이번에는 그 좌우의 부하들이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시라소니의 주먹과 발길질 한 방씩에 각각 KO됐다.

     

    그 솜씨에 이석재를 비롯한 주먹패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지더니, 또한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품 안의 연장을 빼 들었다. 가장 먼저 이석재의 심복이 손잡이를 가죽으로 말아 만든 체인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역시 무용했으니 몸을 비틀어 체인을 피하나 싶던 시라소니가 가볍게 책상 위로 뛰어올랐고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리며 체인 든 사내의 얼굴을 걷어찼다. 사내는 비명도 못 지른 채 KO됐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KO 당한 상대가 벌써 4명, 과거 중국 천진항에서 야쿠자 가네미야 패거리와의 40:1의 싸움을 승리로 장식했다는 시라소니의 신화가 결코 허명이 아닌 듯싶었다. 이후 동대문 패거리들은 미친 듯 흉기를 휘둘러댔지만 단 한 번도 시라소니에 명중되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나뒹구는 패거리들의 수는 늘어갔다. 나머지 10여 명의 동대문 패거리들은 더욱 발악적이 되었지만 시라소니는 여전히 여유롭게 책상 여기저기를 건너뛰며 빠른 발길질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시라소니의 발길질이 주춤했다. 싸움의 와중에 제자리를 이탈한 전화기 수화기 선이 그의 발목을 감은 것이었다. 그리고 시라소니가 눈을 내려 자신의 불편을 확인하는 순간, 이기만이 휘두른 쇠파이프가 반대쪽 다리 정강이에 와 부딪혔다. 찰나이지만 천하의 시라소니 시대가 저무는 순간이요, 이른바 낭만파 주먹의 시대가 종언(終焉)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 이상의 서술은 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들인 이의현 목사의 증언 및 유지광 자서전 <대명>의 내용에 따랐다. 사실 유지광은 사건이 일어난 1953년 8월 군목부 중이었다. (그는 이듬해 8월 중위로 전역했다) 따라서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는 전역 후 이정재와의 혈연으로(유지광의 형이 이정재의 고모와 결혼했다) 동대문사단에 스카우트되었고 이후 중간보스급인 별동대장으로 활약하였던 바, 당시 린치에 가담했던 여러 주먹들의 일종의 무용담을 채록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또 당사자인 시라소니도 아들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했을 수 있었을 터, 떠도는 이야기 중  가장 사실에 가까운 내용일 것 같다. 

     

     

    동대문사단 시절의 유지광(柳志光, 1927~1988)
    5.16 군사법정에서 중언하는 유지광 / 그는 5.16 군사쿠데타 후 이른바 정치깡패 혐의로 붙잡혀 갔지만 구사일생으로 풀려난다. 오른쪽 이정재와 왼쪽의 임화수는 사형당했다.

     

    시라소니는 정강이를 가격당한 후 전투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이기만을 박치기 공격으로 기절시키는 등 분전했으나 등뒤에서 날아든 박남수의 손도끼에 어깨를 찍힌 후로는 왼 주먹과 두 발을 모두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누군가가 가격한 파이프에 안면을 강타당하고부터는 사실상의 싸움이 끝이 났다. 이에 천하의 시라소니도 마구잡이 다구리를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늦게 나타난 신병철도 불문곡직 곡괭이 자루를 얻어맞고 다구리를 당했다.

     

    두 사람은 처참한 몰골이 되어 기절한 상태로서 종로 5가 반도병원(현 보령약국 자리)에 실려갔다가 다시 백병원으로 옮겨졌다. 시라소니는 백병원에서 하룻밤을 빈사 상태로 있다가 다음날 아침 기적적으로 깨어났는데, 왼쪽 다리만 부러지지 않은 채 거의 전신 골절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성한 왼쪽 다리마저 면회를 가장해 방문한 이석재가 쇠절구공이로 부러뜨리고 간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이 사건은 이기만과 박남수가 집단폭행의 가해자로 감방에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시라소니는 오랜 시간에 걸려 겨우 몸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당연히 이정재와 이석재 등, 자신을 린치한 자들에 대한 복수를 노렸고, 당사자들은 각별히 몸조심을 했다. 그런데 하지만 시라소니의 복수는 뜻밖에도 1961년 일어난 5.16쿠데타 군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5.16 군사정권은 민심을 얻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전국의 깡패들을 붙잡아 모두 군사법정에 세웠는데, 이때 이정재는 사형을 당하며 44세의 생을 끝내게 된다.  

     

     

    법정의 이정재와 이화룡 / 동대문파와 명동파의 두목이었던 이 두 사람은 생사를 달리한다.
    재판을 기다리는 이정재
    군인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하는 폭력배들과 이정재
    이정재를 맨 앞에 세웠다.
    교수형 당한 후의 이정재 시신 (아래에서부터 세 번째)

     

    시라소니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으니 그도 군인들에 의해 체포돼 서대문 교도소에 투옥되었으나 당시 그가 다니던 영락교회 신도들의 연대 탄원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동대문사단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던 시절, 민주당 사람으로부터  민주당의 거목 장면 박사를 경호해 달라는 청을 받게 된다. 당시는 자유당 정권의 말기로, 독재정권을 수호하려는 자유당 지지세력의 정치 테러가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시라소니는 장면 박사가 다니던 영락교회의 신자가 되었고, 그 교회 사람들 덕에 화를 면하게 되었다)

     

    유지광은 <대명>에서, 훗날 총을 품고 찾아온 이석재를 예수의 자비심으로 용서하며 폭력세계에서 벗어나 새길을 걷도록 교화했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라소니는 정말로 예수 같은 사람이다. 이석재가 총을 품고 시라소니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다. 시라소니가 복수를 위해 노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석재는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이었다. 그렇게 매일을 불안에 떨던 이석재는 결국 제발로 시라소니를 찾아갔다. 남자답게 용서를 빌고, 만일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그도 쏘고 자신도 머리를 쏴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그에 앞서 이석재는 반란을 도모하던 동대문사단의 중간보스 김동진을 단성사 극장 앞에서 저격한 적이 있다. 1955년 1월 29일, 영화광이던 김동진이 단성사에서 <형제는 용감하였다>를 보고 나올 때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석재가 총으로 쏜 것이었다. 총을 맞은 이석재는 백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났음에도 이석재는 법정에서 김동진을 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고 진술한다. 한마디로 급소를 피해 쏘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자신의 사격 실력을 시연해 보였는데 멀리 형무소 담벼락에 붙여놓은 담배 3개피를 모두 쏘아 맞췄다. 그럼에도 결국 일급 살인죄 미수로 징역형을 살기는 했지만 총솜씨는 시연을 참관했던 경찰 간부의 말대로 (서부영화 속) "서부로 가야 할 사람" 급이었다. 그런 그가 시라소니를 저격하지 않고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는 것은 그래도 남아 있던 당시 주먹세계의 '멋과 질서'를 보여준 단면이라 하겠다.

     

     

    당시의 단성사 극장 / 왠지 예술관의 품격이 느껴진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석재 역할을 한 손호균의 포스
    법정에서 증언하는 김동진과 피고인석의 이석재
    '형제는 용감하였다' 포스터 / 두 고래잡이 형제의 모험과 사랑의 갈등을 그린 해양 어드벤처물로서, 미남 배우 로버트 테일러와 슈튜어트 그랜저가 형제로 나왔다. 여주인공 앤 브라이스는 당연히 형제가 다투는 여자이다.

     

    아무튼 시라소니와 이석재는 5.16의 서슬 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시라소니는 부인 이진옥 씨와의 사이에 1남 5녀를 두었는데, 자식들에게 따뜻한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아내에게 경어를 쓸 정도로 부인을 존중했다. 그가 살던 곳은 퇴계로 12길, 지금의 경동호텔 부근 주택가로서 아직도 그 동네는 당시의 분위기가 물씬하다.(다음에 그곳에 가면 사진을 담아와 올리려 한다) 부인 이진옥씨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애들 아버지의 모습은 왜소한 모습에 지저분한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실제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며 "항상 중절모와 정장을 하고 다니셨다"고 불만인 듯 회고했다.  

     

     

    시라소니 사망을 보도한 1983년 1월 27일 동아일보
    시라소니의 행복했던 시절 / 1953년, 41살 때로 그가 린치를 당하기 직전의 사진이다.
    시라소니가 살던 동네 골목
    왼쪽 2층 양옥이 시라소니가 살던 집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리모델링되어 게스트하우스로 변했다. 이곳에서 언제 이사 간 지는 알 수 없으나 시라소니는 광진구 군자동 29-16에서 생을 마쳤다.
    인근 퇴계로 4길, 이 골목에서 만난 주민 분은 놀랍게도 시라소니 이성순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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