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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인사 목조 비로자나불 & 여왕의 근친상간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9. 12. 23:53

     

    문화재청은 지난 1일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과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2건을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그 2구의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 지난 2005년 발견되어 2012년 보물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은 이 불상의 국보 승격의 이유를 "802년 해인사가 창건된 사실에 비춰볼 때 이 두 불상은 해인사 창건 시기와 머지않은 시점에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현존하는 단 2구의 신라시대 목조불상으로서 그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2005년 발견되었다는 말은 사실 어폐가 있다. 이 불상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흔히들 2005년에 발견되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2005년 6월 법보전 불상의 칠을 다시 하기 위해 복장유물을 개봉하는 과정에서 서기 883년에 만들어진 국내 최고(最古)의 목불상임이 밝혀졌던 까닭이다.

     

    아울러 그해 7월 초 대적광전에 모셔졌던 불상을 점검해 본 결과, 두 불상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쌍둥이 불상으로 밝혀졌다. 이 비로자나불상들은 모두 그동안 막연히 조선시대 말에 제작된 불상일 것이라고 추측되어 왔다. 그것이 복장유물의 출현으로 무려 1천년을 뛰어넘게 되었던 바, 딴은 '발견'이라는 표현도 일리도 있다.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
    지금은 방재(防災) 시스템이 갖춰진 대(大)비로전에 함께 봉안됐다.

     

    비로자나란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태양 및 빛을 뜻하며  화엄종(華嚴宗)의 주불(主佛)로서 인간세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원하는 광명(光明)의 부처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화엄종찰인 해인사는 이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을 주불로서 2구나 모셨던 것인데, 그것이 발견과 더불어 해인사의 건립과 거의 시기를 같이 하는 부처님임이 밝혀졌던 바, 당시의 놀람은 제법 큰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족이 붙었다. 생김새가 똑 같은 두 비로자나불을 당시의 연인이던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衛弘)이 영원한 사랑과 영생을 염원하며 각각 조성한 불상이라고 추정해버린 것이다. 불상이 조성된 서기 883년이 신라 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년)의 시대와 겹치므로 그들의 러브스토리와 불상 조성시기를 꿰맞춘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해인사는 견우 직녀가 만난다는 음력 7월 7일을 택해 이를 기리는 사랑과 만남의 축제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행사는 2006년 실제로 개최됐다)  

     

     

    드라마 '태조 왕건 ' 속의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
    위홍의 복상사에 놀라는 진성여왕 / 그녀는 신라 하대의 혼란을 부추킨 무능과 음란의 여왕으로 치부된다.

     

    잘 알려진대로 신라는 선덕·진덕·진성 등 3명의 여왕을 배출했다. 그런데 이들 셋 중 선덕과 진덕은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여왕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반해 진성여왕은 무려 10년이나 보위에 있었음에도 이렇다 할 치적이 없고, 오직 김위홍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공동으로 편찬한 향가집 <삼대목(三代目)>만이 유일한 치세의 기록으로 등장한다.

     

    그 위홍은 신라 1등급 관직인 각간을 지낸 인물로 신라 48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숙부였다. 그런데 김위홍은 일찌기 젊은 조카 김만(金曼, 진성여왕)과 눈이 맞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불륜관계를 이어갔고(위홍은 강화부인이라는 아내가 있었다) 결국은 임신까지 하여 김양패를 비롯한 자식들을 낳았다.

     

    각간 김위홍의 위세는 당연히 하늘을 찔렀으나 그래서 천벌을 받았는지 진성여왕 재위 2년 째 되는 해 사망을 한다. 이에 진성여왕은 허전한 몸과 마음을 서라벌의 젊은 남자들을 불러 달랬는데, 그 놈들 역시 왕의 배경을 믿고 세도를 부렸을 터, 왕실의 권위는 더욱 추락하고 신라의 망국이 재촉되었다. 지방 호족들이 부패한 왕실과 조정에 대항해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진성여왕은 결국 끝까지 가지 못하고 재위 10년째인 897년, 49대 헌강왕의 서자인 김요(효공왕)에게 양위하는데, 이미 그때는 신라가 거의 무너진 지경이라 북쪽에서는 곧 태봉국의 궁예가, 서쪽에서는 후백제국의 견훤이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독립국가를 세우게 된다.

     

    진성여왕은 양위 6개월 후 북궁(北宮)에서 사망하지만(29~32세로 추정) 사후에도 대접을 못받았는지 능묘도 경주 밖 황산(荒山)에 마련된다.(<삼국사기>) 그 황산이 어디인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자식인 김양패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무엇이 없다. 하지만 만일 아버지 각간 위홍이 살아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터, 그들 자식 중 하나는 왕좌를 거쳐갔으리라 본다.  

     

     

    북궁으로 추정되는 경주중고등학교 뒤 성동동 전랑지(殿廊址)
    진성여왕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양산 어곡동의 묘
    어곡동 묘의 석물 (양산신문 사진)

     

    다시 말하지만 김위홍과 진성여왕이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해인사에 봉안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두 사람은 엄연한 불륜이다. (당시에는 근친상간이 횡횡하였으니 패륜은 아닐는지 모르겠으나)  따라서 당대에도 지탄받아 마땅했을 일을 후대에 스토리까지 엮어 러브라인을 조장함도 어이없지만, 이 불륜의 두 사람을 맺어주겠다는 해인사의 갸륵 정성에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진성여왕 때 완성된 경주 숭복사지 비의 비편 / 2백결(貳百結) 등의 글자가 보인다.
    각간 위홍 사후 추존된 혜성대왕(惠成大王)의 글자가 보이는 숭복사비편 /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비는 진성여왕 즉위 후 완성되었다. 여왕은 내연남 위홍을 왕으로 추존하여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예를 다했다. 최치원은 심히 못마땅했을 것이나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비의 글과 글씨는 모두 최치원의 것이다.
    숭복사지 쌍거북 귀부 / 위 비석이 세워졌던 귀부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앞에 놓여 있다.
    숭복사지 쌍거북 귀부 안내문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지 / 삼층석탑 사이로 복원된 비문이 보인다.
    복원된 숭복사비 / 886년 헌강왕은 이곳에 대숭복사(大崇福寺)를 중수하고 885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숭복사지 비문 복원의 모델이 된 최치원의 쌍계사 진감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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