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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정조의 문체반정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27. 23:57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5) 연암(燕岩) 박지원이 8촌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축하사절로 중국에 갔을 때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기록이다. 당시 박지원은 공식 직함이 없는 평범한 시골선비였다. 따라서 사신의 자격에 미달하였지만 정사(正使)인 8촌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의 배려로 정사의 개인 수행원인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사신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당시 박지원의 나이 44세 때였다.   
     
    박명원은 족보상 박지원의 삼종형(8촌 관계)으로 영조의 딸 화평옹주와 결혼해 금성위가 되었다. 그래서 그 끗발이 장난이 아니었으니 평소 호기심 많던 종질 하나쯤을 사신단에 끼워놓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건륭제는 자금성에 없었고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에 있는 황제의 여름별장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피서를 가 있었다. 이에 일행은 부랴부랴 북으로 가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로 가게 되었으니 이에 그의 기행문 제목도 열하일기가 되었다. 
     
     

    열하 피서산장
    피서산장의 현판
    피서산장의 겨울 풍경 / 호수 왼쪽에 흐르는 강이 열하이다.
    <열하일기>의 답로(踏路)
    1901년 김택영이 펴낸 <열하일기> 목판본

     
    10책 26권 <열하일기>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7권은 여행 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현지의 풍물을 기록했다. 연암은 정식사절단이 아닌 까닭에 오히려 행동이 자유로워 일행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을 제외하고는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며 구경을 만끽하는데, 비단 그것이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지라 그는 같은 것을 보아도 남들보다도 많이 볼 수 있었고 감회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얼마나 큰 지 모를 것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관(關)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 울 것이다. 산해관에 1리쯤 못 미쳐 동쪽으로 네모난 성 하나가 있다. 높이는 여남은 길쯤 되고 둘레는 수백 보(步)다. 한 편이 모두 7첩(堞)으로 되었는데, 첩 밑에는 큰 구멍이 뚫려서 수십 명이 숨을 수 있고, 이 구멍이 모두 스물네 개다. 성 아래로 역시 구멍 네 개를 뚫어서 병장기를 간직하고 그 밑으로 굴을 파서 장성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역관들은 모두 한(漢)이 쌓았다고 하나 이는 그릇된 말이다. 혹은 이를 '오왕대(吳王臺)'라고도 한다.

     

     

    산해관복원도 / 실학박물관


    사소한 것도 적었으니, 내린 비로 인해 강을 건너지 못한 일행이 놀음판을 벌였을 때 밤새 놀음판을 싹쓸이한 일, 남들이 일정의 차질로 인해 귀양 갈 것을 걱정할 때 혹 귀양을 가게 되면 남 못 가본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혼자 즐거워했던 일, 유흥가에서 술을 마실 때 어디 선가 들려오는 청아한 노랫소리에 반해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니 매우 험상궂은 용모의 아줌마가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는 에피소드 등을 재미있게 피력했다. 아래의 에피소드는 더욱 재미있다. 
     
    하루는 또 유흥가 어느 술집엔가 들어가 술을 시켰는데, 알고 보니 몽골인, 회걸인(위구르족) 조폭들이 드나드는 오랑캐 술집이었다. 이에 그들이 시비를 걸려는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처음 나온 작은 술잔을 치워 버리고 큰 대접에 독주를 콸콸 부어 원샷하자 오랑캐 조폭들이 깨갱하여 상좌에 모시고(형님으로 모시고) 술대접을 했다는 이야기도 적었다. 중국 술은 독하지만 숙취없이 깨끗하게 깬다는 품평도 덧붙였다. 
     
     

    연암(燕巖) 박지원 (朴趾源, 1737~1805)의 초상 / 생긴 것과 체격은 여느 조폭 못지않다.

     
    * 췌언 : 박지원의 일화는 방송에서 들은 어느 연예인의 지인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미국에 여행간 한국인이 술집에 갔다가 술에 취해 멕시코 갱단과 시비가 붙었는데 상대가 총을 빼 한국인의 머리에 대고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그 한국인이 이게 뭐냐며 아무렇지도 머리 위의 총을 치워버리자 멕시코 조폭들이 상대의 담력에 놀라 곧바로 무릎 꿇었다고.... 그 한국인은 술에 취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현지인이 아닌 본토 한국인은 총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지라 총을 들이대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아마도 칼을 들이댔다면 매우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또 박지원이 말 위에서 졸다 깼을 때, 일행 중의 하인이 방금 지나가는 낙타를 보았다고 하자 낙타를 보지 못한 아쉬움에 앞으로는 신기한 무엇이 있으며 주저하지 말고 깨우라며 신신당부했다는 얘기도 적었는데,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열하일기>에 이와 같이 잡다한 신변잡기만을 늘어놓지는 않았으니, 청나라 생활상의 면면을 그대로 소개하며 조선의 현실을 비교했다.
     
    예를 들면, 그들의 길은 넓고 좁고를 떠나 어느 곳이든 반듯반듯하며, 우리의 벌레 끓는 초가집과 달리 청나라는 서민의 집이라도 모두 벽이 연접(連接)된 2층의 벽돌집으로서 튼튼할 뿐 아니라 문만 닫으면 도둑이 들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며 감탄하였다.중국의 집들은 조선의 흙벽이 아닌 단단한 조적조로서, 때로는 이웃과 벽을 같이하는 요즘의 연립주택과 같은 구조로 지어졌던 것이니, 연암은 그 벽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벽돌 하나는 돌보다 약하지만, 만 개의 벽돌이 결힙된 것은 돌이 따라갈 수 없다. 

     

     

    실학박물관에 재현된 청나라 벽돌

     

    뚜껑에 도르래를 달아 놓아 온종일 물을 길어도 힘이 들지 않도록 한 저들의 우물에도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그가 주목한 것은 청나라의 흔한 수레이니, 우리나라 백성이 가난한 까닭은 수레가 나라 안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이며 조선도 수레를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연암 뿐 아니라 수레는 모든 실학자들이 사용을 권장하였던 바, 실학의 상징적 기물이 됐다) 
     
    타는 수레와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운반이 어려워서 바닷가 사람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새우와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지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푼이나 주고 사야 되며, 영남지방 아이들은 새우젓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라가 가난한 것은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고, 한갓 글만 읽고 있을 뿐이다. 
     
     

    북경 유리창 거리의 수레들
    실학박물관에 재현된 청나라 수레

     
    뭉뚱그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다음의 것을 강조했다. 
     
    천하를 위한다는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혹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그것을 취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청나라의 실용학문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을 살찌우게 하려는 북학파(北學派) 선비들과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조선의 학자들은 화·이(華·夷)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전부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하늘이 어찌 경계를 그으려고 하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북학파 선비들은 서울 종로 3가 지금의 탑골공원 근방에 모여 살며 서로의 생각을 견주어 논했다. 까닭에 그 동네의 랜드마크인 하얀 대리석탑(원각사탑)에 비유해 백탑파(白塔派)라고도 불리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박지원이 자신의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를 펴냈을 때, 백탑파 선비들은 이 책이 목판본이 아닌 그저 필사본이었음에도  서로 베끼고 베껴 읽었다. <열하일기>는 금세 인세가 붙지 않는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열하일기> / 실학박물관
    박지원의 벼루 죽엽연(竹葉硯) / 실학박물관

     
    이렇듯 <열하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임금인 정조도 1792년 겨울 그 책을 구해 읽었다. 워낙에 독서광인 정조였으니 그냥 지나 칠 리 만무했다. 그런데 정조가 보여준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으니, 어느 날 아침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요즘 북학(北學)이다 뭐다 하더니 학문하는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따져 보면 모두 박지원의 탓이다. <열하일기>를 내가 익히 읽었으니 속일 수 없을 것이다. 박지원은 교묘히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是漏網之大者)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하자 세인들이 이를 흉내 내 문체가 개판이 됐다. 박지원은 결자해지해야 할 것이다."
     
    박지원은 평소에도 자유로운 글쓰기를 강조해 왔던 바,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가렵게 하지도 않고 구절마다 데면데면하고 우유부단하다면 그런 글을 어디에 쓰겠는가"(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라고 외친 적도 있었다. 그러한즉 그의 문체가 성리학을 전달하던 기존의 고문(古文)에 비하면 개판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주자 성리학에 쩌든 정조는 이에 그치지 않았으니, 저속한 문체로 일관돼 있는 (물론 정조의 시각으로) 패관잡기의 읽고 쓰기를 엄금했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政)이었다. 
     
    즈음하여 정조는 홍문관 수찬 윤광보가 아첨하여 "정학(正學)을 밝혀 사설(邪說)을 물리치시라" 상소하자 홍문관에 있는 서양서적들을 모두 끌어내 홍문관에 뜰 앞에서 태워버렸고, 더불어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던 바, 앞서 1786년에 내린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외래 서적의 수입금지령이 더욱 강화되고 처벌 강도 또한 높아졌다. 당시 안의현감이던 박지원은 다행히도 <과농초서>라는 실용적 농서(農書)를 지어 올린 것이 임금의 마음에 들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열하일기>의 문체가 아니라 그 속에 실린 개혁적 내용이었다. 하지만 <열하일기>를 통해 전하려 했던 박지원의 모든 뜻은 국왕과 그 밑의 위정자들에게 의해 거부되었는데, 어쩌면 개혁이 버거웠던 정조는 <열하일기>의 문체를 핑계로 시선을 바뀌게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사고의 정조에게 '개혁군주'나 '학문을 장려한 문화군주',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끈 영주(英主)'라는 호칭은 개발에 편자가 아닐 수 없는데, 당시 우의정이던 김조순의 사고는 더 기가 막혔다.  
     
    “맹자(孟子) 한 장을 읽으라고 시키면 한 구절도 못 읽을 놈이...."  이것이 <열하일기> 파동 후 보여준 김조순의 반응이었다. 그는 <열하일기>의 개혁적 내용은 아예 염두에 없었고 오직 공맹(孔孟)만을 찾고 있었으니 향후 조선사회가 달려갈 나락의 방향을 제시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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