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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서치 이덕무의 가난은 게으름의 소산이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8. 1. 20:53

     

    이덕무의 호가 청장관(靑莊館)으로 불리게 연유에 대해서는 앞서 '마포 광흥창과 청장관 이덕무'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 외도 그는 많은 아호를 가졌으니, 선귤당(蟬橘堂), 아정(雅亭), 형암(炯菴), 단좌헌(端坐軒), 한죽당(寒竹堂), 주충어재(注蟲魚齋), 학초목당(學草木堂), 향초원(香草園), 매탕(蕩宕), 사이재거사(四以齋居士), 학상촌부(鶴上村夫), 동방일사(東方一士), 이암거사(以菴居士) 등인데, 이중 청장관 다음으로 즐겨 쓴 호는 아정이다.   

     

    아정을 애용한 이유는 임금인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 시행한 시 짓기 대회에서 '아(雅)' 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에게 당시의 한양을 그린 그림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여주며 이를 본 감상에 대한 시 짓기를 명했는데,(1792. 4. 24) 병조정랑(兵曹正郞) 신광하가 1등을 차지했다. 검서관 이덕무와 유득공은 공동 5위였다. 채점은 정조가 직접 했는데 이때 감상평도 같이 내렸다.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회화력이  풍부하고, 이만수의 시는 듣기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했다. 이덕무의 답안지에는 우아하다는 뜻의 '雅' 자를 쓰여 있었다. 그는 비록 5등을 했음에도 감복하였으니 이후로 자신의 집을 아정(雅亭)이라 부르고 아호로 삼았다.  

     

    그렇다면 그가 살던 집은 과연 우아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집은 같은 서얼 친구인 관재(觀齋) 서상수 (徐常修)가 가지고 있던 고서(古書)를 팔아 지어준 기둥 8개의 초가삼간이었다. 집이 하도 낡았던 바, 보다 못한 서상수가 억지로 돈을 마련해 집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실학자 이수광의 집을 복원한 창신동 '비우당'
    실학자의 집이 복원된 것은 '비우당'이 유일하다. 이덕무의 집 '아정'도 이와 유사했으리라 여겨진다.

     

    친구들은 그 집을 청장관 이덕무가 글 읽는 집이라 하여 '청장서옥(靑莊書屋)'이라 했으나 이덕무는 선귤당이라고 불렀다. 선귤(蟬橘)은 허물 벗은 매미의 말라붙은 껍질과 귤껍질을 말하는 것이니 얼마나 보잘것없는 가옥이었을가를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허물 벗은 매미의 껍질을 살필 정도로 이학자(理學者)적 기질도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그가 지은 <청장관전서>에서는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양한 지적 편력이 망라된다.  

     

    그는 눈과 우박, 서리와 성에도 구별하여 관찰하였던 바, 이는 현대 기상학자들도 놀랄 정도라고 한다. 이를 테면, "내가 전에 서리의 조각을 살펴보았더니 거북 무늬 같았고, 근자에 또 보니 어떤 것은 비취에 붙은 털 같기도 했다. 또 어떤 것은 아래에 작은 줄기가 있는데 매우 짧고 가늘고 위에는 좁쌀 같은 것이 모여 있었으며, 그 어느 것이든 반드시 여섯 개가 모두 뾰쪽하게 곧게 서 있었다" 같은 문장이다. 

     

    서리의 결정

     

    하지만 당호를 선귤당이라 한 것이 친구가 애써 지어 준 집을 비하해 한 말은 아니었으니 수필집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말똥구리는 스스로의 말똥을 아껴, 미려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미려한 용도 여의주를 가졌다 하여 스스로를 뽐내며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螗琅自愛滚丸 不羡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

     

    그러고 보니 선귤당이 우아한 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아함에 반드시 외양을 따질 필요는 없으니.... 그리고 사실 우아함을 따지는 것 자체가 과분한 노릇이니 1769년 5월 서상수가 선귤당을 마련해주기 전 실던 집은 차마 사람 사는 곳이라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래서 당시 이덕무가 집안의 추위를 스스로 방어한 일에 만족해 쓴 아래의 글은 오히려 유명해졌다.  

     

    지난 경진년ㆍ신사년(1760년과 1761년) 겨울에 내 작은 초가는 너무 추워서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고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나는 게으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밤중에 일어나 급히 <한서(漢書)> 1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다. 이러지 아니하였다면 거의 묏자리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往在庚辰辛巳冬 余小茅茨太冷 噓氣蟠成氷花 衾領簌簌有聲 以余懶性夜半起 倉卒以漢書一帙 鱗次加於衾上 少抵寒威 非此幾爲后山之鬼 

     

    어젯밤에도 내 집 서북쪽 모퉁이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등불이 심하게 흔들렸다. 추위에 떨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노론(魯論, 논어)>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로 삼고는 스스로의 임기응변에 만족해 으쓱댔다. 

     

    昨夜屋西北隅 毒風射入 掀燈甚急 思移時 抽魯論一卷立障之 自詑其經濟手段 

     

    옛사람이 갈대꽃으로 이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흔한 예가 아니다. 금과 은으로 상서로운 짐승을 조각해 병풍을 만든 사람도 있다지만, 이는 너무 호사스러우니 본받을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 천하에 귀한 경사(經史, 경서와 사서)인 <한서>를 이불 삼고 <논어>로 병풍을 만든 것만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는 왕장(王章)이 소가죽을 덮고 두보(杜甫)가 말안장으로 추위를 막은 일보다도 나을 것이다. 

     

    古人以蘆花爲衾是好奇 又有以金銀鏤禽獸瑞應爲屛者 太侈 不足慕也 何如我漢書衾魯論屛 造次必於經史者乎 亦勝於王章之卧牛衣 杜甫之設馬韉也

     

    이상은 이덕무가 쓴 1765년 12월 28일의 일기로서, 그의 아들 이광규가 1795년에 아버지의 저술을 모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33책 71권을 펴낼 때 집어넣었다. 자식인 이광규의 시선에는 더욱 애뜻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광규의 아들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자 이규경이다) 

     

    이덕무는 기해년(1779년)에 규장각 검사관이 되기 전까지 내내 빈곤했다. 그래서 앞서 빌린 박지원의 말처럼 때때로 해가 저물도록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추운 겨울에도 아궁이에 불을 때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가난의 고통 중 가장 심한 고통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그래서 '춥고' '배고픔'은 늘 쌍으로 다니며 가난의 대명사로 쓰인다. 윗글을 보자면 그럼에도 이덕무는 해학을 잃지 않고 고난에 초탈하다.

     

    박지원의 말대로 라면, 이덕무는 벼슬을 한 후에도 제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검소하여, 거처와 의복이 벼슬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한'(饑寒, 허기와 추위)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하는 바, 관직에 있을 때도 청렴결백하여 춥고 배고픔은 떠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유튜브에서 자칭 역사학자라고 말하는 어느 분이 박제가와 이덕무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는데, 그 역사학자는 "그들 백탑파는 서얼이긴 하나 모두 양반가의 자식이라 먹거리 걱정이 없었고, 먹고살 것이 있었기에 일을 안 했으며, 벼슬을 해봤자 (서얼이라) 미관말직이기에 이를 거부하고 그저 놀았다"고 하면서,

     

    이덕무의 위 일화에 대해서는 "새벽에 구들이 식었지만 추운 데 밖으로 나가 불을 지피기 귀찮았고 새벽에 하인 부르기도 좀 그래서 그저 책을 덮고 잤을 뿐, 가난해선 그랬던 것을 아니다"라고 해 깜짝 놀랐다. 

     

    어떤 형식의 프로그램이라도 방송하기 좋아하는 그 역사학자는 그밖에도 사실왜곡이 많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덕무의 아래 말을 경청해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니 그저 그의 경박스러운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최근 유튜브가 성행해서 그런지, 정말이지 말 같지도 않은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곡학아세가 넘쳐난다) 

     

    망령된 사람과 더불어 시비나 진위나 선악을 분별하느니 차라리 얼음물 한 사발을 마시는 것이 낫다.(與妄人辨 不如喫氷水一碗) 

     

    아울러 이덕무 스스로가 '남산 아래 선비'를 강조한 까닭에 그가 남산 한옥마을쯤에 살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지만 그가 살던 곳은 서울 대사동(大寺洞, 인사동)으로, 남산은 그가 살던 집에서 막힘없이 올려다 보이기에 늘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의 집이 큰 절의 탑이 있던 대사동이었음은 박제가의 글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 여실하다.

     

    도회지를 빙 두른 성의 중앙에 탑이 솟아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으슥비슥 눈 속에서 대나 무 순이 나온 것처럼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 옛 터다. 지난 무자(戊子), 기축년(己丑年) 어름 내 나이 18,9세 때 미중(美仲)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그리고는 몸소 쌀을 씻어 다관(茶罐)에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받혀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祝壽)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 이전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그분에 대해 탄복하던 모습과 지기(知己)에 대한 감동이 이러하였다.

     

    그 무렵 형암(炯菴) 이덕무(李德懋)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서있고, 낙서(洛書) 이서구(李書九)의 사랑이 그 서편에 솟아 있었으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관재(觀齋) 서상수 (徐常修)의 서재가 있었다. 또 거기서 북동쪽으로 꺾어지면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의 집이 있었다. 나는 한번 그곳을 방문하면 돌아가는 것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렀고, 지은 시문과 척독(尺牘, 편지글)이 곧잘 책을 만들어도 좋을 정도가 되었으며, 술과 음식을 찾으며 낮을 이어 밤을 새곤 했다.

     

     

    1884년 외교관 퍼시벌 로웰이 인사동 인근 민가 지붕에서 찍은 사진
    1898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모델을 세워놓고 찍은 사진 / 백탑 주변에 초가집과 기와집이 빼곡하다.

     

    이덕무는 그곳 '아정'에서 평생 이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책만 읽는 바보)라 부르며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목멱산 아래에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니 말이 어눌하여 말하길 좋아하지 않았고

    木覓山下 有痴人 口訥不善言,

     

    성품은 나태하고 졸렬하여 시사에 밝지 못했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했다.

    性懶拙 不識時務 奕棋尤不知也.

     

    그는 남들이 욕해도 변명하지 않았고 명예스러운 일도 자랑하지 않았으며, 오직 책을 보는 것을 즐거워해 추위나 더위 주림과 병듦 따위도 잊고 살았으니,

    人辱之不辨 譽之不矜 惟看書爲樂 寒暑飢病 殊不知,

     

    어릴 때부터 21살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손에서 옛 책을 놓지 않았다.

    自塗鴉之年 至二十一歲 手未嘗一日釋古書.

     

    그의 집은 매우 작았지만 동쪽과 남쪽과 서쪽에 창이 있으니,

    其室甚小 然有東牕 有南牕 有西牕焉,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것을 따라 빛을 받으며 책을 읽었다.

    隨其日之東西 受明看書.

     

    보지 못했던 책을 보면 문득 기뻐하며 웃으니,

    見未見書 輒喜而笑,

     

    집안사람들은 그 웃음을 보고 그가 기이한 책을 구했다는 것을 알았다.

    家人見其笑 知其得奇書也.

     

    특히 자미(두보)의 오언율시를 좋아해 읊조리길 아픈 사람 앓듯 했고,

    尤喜子美五言律 沉吟如痛疴,

     

    깊이 생각하여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너무 기쁜 나머지

    得其深奧 喜甚,

     

    일어나 왔다 갔다 하며 갈까마귀 울음 같은 소리를 내었다.  

    起而周旋 其音如鴉叫.  

     

    그는 혹간 적막하니 아무 소리 없이 허공을 응시하기도 하고

    或寂然無響 瞠然熟視,

     

    또 혹간은 잠꼬대인 양 혼자 중얼거리고

    或自語如夢寐人,

     

    그를 가리키며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해도 기쁘게 응대하였다. 

    目之爲看書痴 亦喜而受之.

     

    따로 전기를 써주는 사람이 없기에 이에 응분하여 붓을 들어 서술하길

    無人作其傳 仍奮筆書其事,

     

    <간서치전>이라 하였지만 그 성명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爲 '看書痴傳' 不記其名姓焉.  

     

     

    KBS TV쇼 진품명품에 나왔던 이서구의 자작시 편지글 / 추정감정가 1500만원
    18세기 말~19세기 초의 <태평성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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