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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성환전투와 보물선 고승호 & 돈스코이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8. 5. 22:10
지난 7월 29일은 청일전쟁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린 성환전투가 일어난 날로, 올해로 129년이 된다. 청일전쟁은 1894~1895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넓게 보면 청일전쟁은 영·러(영국과 러시아) 그레이트 게임에서 영국의 파트너로 선택된 일본의 세계무대 데뷔전쯤으로서, 조선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청나라에 대해 도전장을 내민 전쟁이다.
청일전쟁 중의 전투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그 전쟁의 과정에서 치러진 조선의 희생은 엄청났으니 조선인 3만 명이 희생되었고, 식량과 인마(人馬)의 수탈도 컸다. 청일 양군의 횡포는 누가 덜하고 더했다 말할 것도 없었으니 보는 대로 부녀자를 겁탈하고 가축을 약탈하였으며,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군사가 양분돼 차출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동족상쟁의 비극까지 벌어졌다.(☞ '청일전쟁에 내몰려 청·일로 나뉘어 싸운 조선군')
청·일의 육상 첫 전투는 1894년 7월 29일 새벽 경기도 안성천 부근에서 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해 달라는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이었지만 웬일인지 성환읍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개전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군은 성환 일대의 청군을 찾아 나섰고,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이 이끄는 4000명의 일본군 9혼성여단이 7월 29일 새벽 안성천을 도하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직은 어두컴컴한 미명(未明) 속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척후로부터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청군은 안성천 다리를 끊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대로 일본군이 안성천을 도하하자 발포한 것이었다. 청군의 규모는 총병 섭사성(聶士成)이 이끄는 약 3500명으로 일본군 혼성여단과 거의 백중이었다. 곧 양군 사이에서는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개전 직후의 전황은 이처럼 청군에 유리했으니 선봉에 섰던 마츠자키 대위가 가장 먼저 총에 맞고 쓰러졌고, 뒤를 따르던 도키야마 중위 이하 20여 명의 일본군이 고꾸라졌다.
하지만 도하한 일본군은 곧 전열을 정비해 반격을 개시하니 아산과 성환에서 청군들을 물리쳤다. 초반의 승세에 환호작약한 섭사성은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본국의 이홍장에게 승전을 알리는 성급함을 보였지만, 아침이 밝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청군의 시체뿐이었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버티던 섭사성은 결국 정오 무렵 군사들을 철수시켜 충청도 공주 방향으로 도주했다. 청군의 사상자는 500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안성천 도하 때 죽은 병사를 포함해 88명이었다. (이후 일본의 화력을 절감한 섭사성의 부대는 혹시라도 일본군과 마주칠까, 멀리 강원도를 우회해 주력부대인 평양의 청군과 합류한다)
성환전투는 청일전쟁 최초의 대규모 육상전투로, 일본은 서전을 장식한 성환전투의 승리로 크게 고무되었다. 전쟁 전에는 대국(大國) 청나라의 덩치 자체에 지레 겁을 먹은 상태였으나 이 전투 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평양전투에서도 승리를 따냄으로써 청일전쟁의 향배가 기운다. 까닭에 이 성환전투는 향후 조선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전투라 아니할 수 없음에도 그 일대에 성환전투와 관계된 일체의 표석이나 안내문, 기념물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남의 나라끼리 싸운 전투라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환전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용어 자체가 생소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25일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풍도해전은 좀 익숙하다. 그때 일본에 의해 격침된 고승(高陞)호라는 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순양함 3척(요시노·나니와·아키스시마)으로 철갑순양함(정원호) 1척, 경순양함 1척, 연습선 1척, 수송함 1척으로 이루어진 청군 함대를 공격해, 전투 개시 직후 도주한 정원호를 제외한 모든 배를 격침시키고 수송함 조강(操江)호는 나포하였다. (나포된 조강호는 1965년 퇴역 때까지 일본 해군에서 사용했다)
그리고 이때 성환 주둔 청군에 힙류하기 위해 아산만으로 들어오던 영국 수송선 고승호 역시 일본해군에 의해 침몰되었다. 당시 고승호에는 청군 약 1천 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수장됨으로써 청군의 전력증강 계획은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풍도해전에서 청군은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일본군은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세계사의 기록적인 해전으로, 일본군의 대승보다는 청군의 졸전이 두드러지게 기록되었다. 1000 대 제로(0),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고승호(코우싱호: 길이 72.6m, 적재량 2,134톤)는 본래 1883년 영국 배로우조선회사(Barrow Shipbuilding)에서 만든 증기선으로, 청나라가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반란 진압용 군사수송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4만 파운드에 임대하였다. 고승호는 풍도해전 당시 병사 1천여 명과 각종 물품을 실고 인천 해역으로 들어오던 중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배가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그때 고승호에 실려 있었다고 전하는 다량의 은괴와 은화 600톤 때문이다. 고승호에는 군병력과 군수물자 외에 군자금으로 쓰기 위한 은괴와 은화가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승호의 보물을 찾으려는 소동이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 근자에까지 이어졌는데, 실제로 불법 탐사도 자행되어 여러 가지 유물이 건져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덧 고승호는 진짜 보물선으로 둔갑하였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무엇이 발견된 것은 없다.
풍운의 구한말, 조선의 운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은 이와 같은 보물선 고승호의 전설을 남겼다. 그리고 러일전쟁 말미에 벌어진 쓰시마해전도 돈스코이호 전설을 만들었는데, 이 전설은 아직도 현실에서 투영된다. 2000년 12월, 한 중견 건설업체가 1905년 쓰시마해전에서 패해 북으로 도망가다 침몰한 발트함대 돈스코이호를 인양하겠다며 나선 것이었다. 인양 목적은 그 배에 실려 있다는 다량의 금괴였다.
당시 러시아 발트함대는 가히 천하무적이었으므로 러시아는 승리를 자신했고, 그 후 일본 본토를 다스릴 통치자금으로 한화 약 150조 원 가치의 금화와 금괴를 돈스코이호에 실었다는 주장이었는데, 이와 같은 주장을 하며 보물선 인양에 뛰어든 업체는 놀랍게도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동아건설이었다. 이에 그 인지도 때문인지 투자자가 몰려들었으나, 동아건설은 2001년 법정관리 폐지결정을 받아 주식 상장이 좌절되며 보물선 탐사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1998년 동아건설은 보물선 찾기에 뛰어들며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당시 동아건설은 배를 찾았다고 주장했고 동아건설 주식은 10배 가까이 폭등했던 바, 이후로 '보물선 테마주'는 주식시장의 핫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동아건설은 배를 인양하지 못했고, 2001년 3월 9일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으며 투자자들은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신일그룹이라는 곳에서 전설 속으로 뛰어들었던 바, 2018년 7월 15일 울릉도 바닷속에서 돈스코이호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배에 금화와 금괴가 실려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돈스코이호는 우리 영해에서 침몰했고, 침몰한 지 100년이 지나 러시아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신일그룹 측의 설명이다)
※ 후일담 : 2019년 9월 5일, 업체 이름을 바꿔 사기 행각을 벌이던 ‘돈스코이호 투자사기’ 일당이 영장심사를 앞두고 도주해 경찰이 추적에 나섰다. 4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SL블록체인그룹 가상화폐 프로그램 개발자 이모(32)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 업체의 부회장 등 2명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이들은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하지 않고 도주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해 10~11월 ‘경북 영천에 1000만톤의 금이 묻힌 금광을 발견했다’며 ‘금광 개발과 연계한 암호화폐인 ‘트레져SL’ 코인에 투자하면 수십 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투자자들을 속여 약 14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경찰에게 피해 사실을 신고한 388여명 외에 실제 투자자는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SL블록체인그룹을 ‘돈스코이호 투자 사기’를 주도한 신일그룹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 기억에 담겨진 보물선의 마지막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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