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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매하고 소심했던 선비 아정(雅亭) 이덕무의 죽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8. 10. 06:46

     

    이덕무가 어떻게 하여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서얼 이덕무의 검서관 등용은 정조 임금의 다음과 같은 하교에서 비롯되었음은 분명한데, 그 하교의 내용은 자못 웅혼하기까지 하다.
     
    임금께서 양전(兩銓,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명하여 서류(庶類, 서얼)들을 소통(疏通)시킬 방도를 강구하여 절목(節目)을 마련하라고 하시며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여 기우는 데 있어 방지(旁枝, 나뭇가지)를 따지지 않는 것인데, 사람이 충성을 바침에 있어 어찌 반드시 정적(正嫡)에게만 해당하겠는가?' 하였으니, 위대한 성인(聖人)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설립한 규모(規模)에 있어 명분을 중히 여기고 지벌(地閥, 지역과 파벌)을 숭상하여 요직(要職)은 허락해도 청직(淸職,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원)은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옛사람이 작정해 놓았다.
     
    그리하여 지난날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과 통청(通淸, 홍문관 관원이 될 자격을 얻음)을 하게 한 것은 실로 선대왕(先大王)께서 고심한 끝에 나온 조처였는데, 그 일이 구애되는 데가 많아 도리어 유명무실한 데로 귀결되어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아! 필부(匹夫)가 원통함을 품어도 천화(天和)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인데 더구나 허다한 서얼들의 숫자가 몇 억(億) 정도뿐만이 아니니 그 사이에 준재(俊才)를 지닌 선비로서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런데도 전조(銓曹, 문관을 가려 뽑던 이조와 무관을 가려 뽑던 병조를 아울러 이르던 말)에서 이미 통청한 시종(侍從)으로 대하지 않았고 또 봉상시(奉常寺, 제사와 시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나 교서관(校書館)에 두지 않았으므로 진퇴(進退)가 모두 곤란하고 침체를 소통시킬 길이 없으니, 바짝 마르고 누렇게 뜬 얼굴로 나란히 죽고 말 것이다.
     
    아! 저 서류들도 나의 신하인데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양전(兩銓, 이조와 병조판서)의 신하들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소통시킬 수 있는 방법과 권장 발탁할 수 있는 방법을 특별히 강구하게 하라. 그리하여 문관은 아무 벼슬에 이를 수 있고, 음관(蔭官, 공신 및 고위관원의 자제로서 벼슬이 제수된 사람)도 아무 벼슬에 이를 수 있으며 무관 역시 아무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그 단계를 정하여 등위(等威)를 보존하고, 그 절목(節目)을 상세히 마련하여 진로를 넓히도록 하라."

     
     

    창덕궁 규장각
    규장각 검서청
    검서청 현판

     
    이와 같은 하교가 내려진 것은 정조 원년 3월 21일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그간 조선사회에서 버려졌던 서얼을 등용하는 제도를 마련하게 하였던 바, 전에 없던 위대한 군주임에 분명하였다. 이에 이조(吏曹)에서는 다음과 같은  절목을 올렸다.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유독 우리나라에만 있는 법이다. 처음 한 사람의 건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결국은 백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재주와 학문이 동류 가운데 뛰어난 선비라 할지라도 대부분 다 폐기시키고 기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인재를 낸 뜻에 맞는 일이겠으며 왕자(王者)가 어진 인재를 기용하는 도리이겠는가? 이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서얼을 구분한 폐단에 대해 진달했었고, 선정신 이이(李珥)도 사로(仕路)에 허통시켜야 한다는 논의를 세웠었으며, 기타 유명한 석학(碩學)들이 올린 글에서도 상고하여 증거할 수 있다.
     
    * 그 '처음 한 사람'은 태종 때의 서선(徐選)이다. 우부대언 서선은 1415년(태종 15) 6월 25일 임금에게 '서얼 출신 관직 금지'를 진언해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원천봉쇄했다. 정도전 같은 패악한 서얼 출신 무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요직(要職)은 허통시키고 청직(淸職)은 허통시키지 않은 것은 인조 임금 떼 제안된 절목인데 시행한 지 오래지 않아 그대로 다시 폐기시키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습관은 고치기 어려운 것이고 적폐는 제거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참으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열조(列祖)들이 행하려 했던 뜻을 추모하고 명신(名臣)들이 이미 정해놓은 의논을 채택하여 잇따라 덕음(德音)을 내린 것이 상세하고도 정성스러워서 인재를 기용하고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방도가 둘 다 어긋나지 않고 잘 시행되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지난 일을 살펴보건대 서얼은 낭서(郞署, 중요하지 않은 자리)와 주목(州牧, 지방직 공무원)에 차출된 사람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이것이 비록 지벌과 재학(才學, 재주와 학문)이 모두 평상적인 격조(格調)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중간에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은 것은 법을 만들어서 금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사(有司, 여러 단체)가 막고서 시행하지 않고 앞의 일을 답습한 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데서 온 것이다. 지금 이 성명(成命)은 전에 없던 법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실은 구장(舊章, 옛 시행령)을 준행하여 수거(修擧, 고쳐 올림)하는 뜻인 것이다. 이에 예조·병조의 장관들과 상의하여 정하고 아래와 같이 조열(條列)한다.
     
    1. 문관의 분관(分館, 벼슬의 품계를 나누어 줌)과 무관의 시천(始薦, 자리를 추천함)은 전대로 교서관(校書館)이나 수부천(守部薦, 무과에 급제한 사람을 수문장이나 장수 후보자로 천거하던 일)에 의하여 시행한다.....
     
    이덕무는 이와 같은 이조의 시행령에 의해 교서관이 되었던 것인데, 그 외도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가 교서관이 되었다. 그들의 정식 직책은 교서관 관원이 아니라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그들 서얼들을 위해 새로 마련된 관직이었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대로 검서관은 정직(正職)이 아닌 잡직(雜職)인 데다, 문신을 뜻하는 동반이 아닌 서반 체아직으로 분류됐다. 체아직은 요즘 말로 비정규직이며 품계는 가장 낮은 9품이었다. 

     

     

    창덕궁에서 본 교서관 자리 / 교서관은 서적의 인쇄 및 교정,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의 관리, 도장의 관리 등을 하는 관청이다. 정조 1년 규장각으로 편입되었다.
    교서관 왜언자(校書館倭諺字) / 1676년(숙종 2) 교서관에서 제직한 일본어 히라가나체의 활자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스승인 연암 박지원은 뛸 듯이 기뻐했으니 가징 큰 이유가 '이제는 굶어 죽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처럼 진귀한 재주가 있는 서얼들이 버림받지 않고 쓰여짐은 가히 기이한 일'(可謂奇矣 盛世抱珍自無遺捐)이라며 꼭 짚어 임금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정조의 덕행(德行)을 상찬하는 언급을 잊지 않았다. 
     
    당시 이덕무가 38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유득공(31), 서이수(30), 박제가(29)는 비슷했다. 그리고 박제가만 을지로 쪽에 살았을 뿐 나머지 세 사람은 인사동 한 동네에 몰려 살았다. 그들에게는 서얼이라는 동류의식도 있었거니와 그만큼 아픔을 공유하는 면이 있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그 네 사람은 사뭇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냈으니 박제가는 "대사동(大寺洞, 인사동)에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렀으니, 시문(詩文)이나 척독(尺讀, 편지글)을 썼다 하면 권질을 이루었고, 술과 음식을 찾아다니며 밤으로 낮을 잇곤 했다"고 술회하였다.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각집(貞蕤閣集)> / 실학박물관

     

    인성(요즘 말하는 인간성)도 다들 무난하여, 아니 출중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었으니 이 가운데 조금 형편이 나았던 서상수*는 제 돈으로 (하지만 그나마 갖고 있던 책을 팔아) 이덕무의 누옥(陋屋)을 새로 지어주었고, 이덕무는 아끼는 책 <맹자> 일곱 권을 팔아 친구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인 적이 있는데, 이에 질세라 유득공은 <좌씨전>을 팔아 술대접을 했다. 이상은 모두 그들이 검서관이 되기 전의 일화로서, 유득공이 아끼는 <춘추좌씨전>을 판 이유는 당시 너무 오래 굶어 허기지기가 한량없었기에 그만큼의 보답을 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 서상수는 서이수의 형으로 짐작된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그때 맹자가 밥 지어주고 좌구명(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이 술을 권해 주었으니 우리는 두 사람을 한없이 칭송했다. 책을 팔아 취포(醉飽, 취함과 배부름)를 도모함이 이리 솔직한 일인 줄을 미처 몰랐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말을 한 사람은 소심하여 매사 말조심을 했던 이덕무보다는 늘 재미있는 말로 좌중을 띄우던 유득공이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들은 미관말직임에도 서로 격려하며 이른바 '실학'을 궁구(窮究)하며 본업인 규장각 검서관의 일에도 충실했던 바, 정조가 직접 편찬을 주관한 어정서(御定書) 2,400여 권과 명찬서(命撰書) 1,500여 권을 합하여 4,000여 권에 가까운 방대한 편찬을 이루었다. 

     

     

    유득공의 <발해고> /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한국사(韓國史)에 편입시킨 책이다.


    규장각에서  이덕무는 14년, 박제가는 13년, 유득공은 15년, 서이수도 10년 이상을 검서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면서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시집을 출간해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는데, (서얼이라는) 자신들의 처지에 그들이 연행사(燕行使)로 갔던 중국에서 출간을 하니 사가시인의 시문은 청나라에서 먼저 소문이 났다. (이서구는 서얼이 아닌 규장각 동료였으며, 서이수는 취미기 달라 시문보다는 그림과 도예 등에 식견이 높았다)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이덕무가 등용은 되었으되 처음에는 규장각에서 일하지 못하고 외각(外閣, 궐 밖에 있는 관청) 교서관(校書館)으로 출판 일을 맡아본 일, 그러다 정조가 규장각 내·외각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아 내린 시짓기 시험에서 연거푸 장원을 차지해 정조의 눈에 들어 내(內閣, 궐 안에 있는 관청) 검서청으로 옮겨 앉고, 정6품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등을 겸직한 일을 앞서 말한 바 있다. 이 모두 이덕무가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음을 뜻한다.  
     
    특히 이덕무가 장원을 했던 '규장각 8경' 시짓기 대회는 채점자가 왕이 아니라 규장각 각신(閣臣)들이었던 바, 그의 시문 실력을 만인이 인정했다는 뜻이 되는데, 그 8경 중의 '규장시사'(奎章試士, 규장각의 선비들의 시험 광경)를 쓴 그의 답안은 다음과 같았다. 

     

    새로 지은 규장각 숲 속에 높고
    그곳에서 좋은 문장 수없이 넘쳐나네 
    길한 선비들이 모여 역대 왕업을 생각하며 
    영민한 재주로 시를 지으니 청아하기 그지없네 
    한나라는 현량책을 시행하였고 
    당나라는 따로 박학과를 두었으니
    난새와 봉황의 품격 갖춘 이 그 누구인가 
    최근의 밝은 조정에서 예로써 그들을 맞는도다
     

    奎躔新閣鬱嵯峨
    卽看文章濟濟多
    吉士來歸思棫樸
    英材振作詠菁莪
    漢庭親發賢良策
    唐殿時開博學科
    誰是鸞鳳珍彩備
    熙朝近日禮爲蘿
     
     

    부용지 주합루 / 규장각이 궐내각가로 옮겨간 후에도 주합루는 규장각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바,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주합루를 규장각의 정실(正室)이라고 불렀다. 오른쪽 건물은 영화당이다.
    영화당은 임금 앞에서 대과(大科)가 치러지던 곳이다. 규장각 선비들의 '규장시사'도 이곳에서 시행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어느 날, 이덕무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임금 정조가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북학파(=백탑파) 학자들이 애용하는 청나라 유행문체를 '패관(稗官)문체'라고 배격하였으며 ,공자를 다시 밝히기 위해 요즘 유행하는 문체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패관문체로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의 스승인 연암 박지원의 저서 <열하일기>를 꼭 집어 말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서적의 수입을 금지시켰으며, 한 권이라도 들여오다 발각되면 큰 처벌을 내렸다. 아울러 홍문관 서고 등에 보관돼 있던 성리학을 제외한 외래서적을 모두 끌어내 궁궐 뜰에서 불태웠던 바, 이것이 소위 이르는 '문체반정'이었다. 그리고 임금이 말하는 패관문체를 즐겨 쓰는 검서관들에게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들을 규장각에 두었다고 혹시라도 내가 그 문장을 좋아해서 그러는 줄 착각하나 본데, 절대 아니다. 나는 그들이 처지가 남다르기에 그저 광대로써 키울 뿐이다."(予實俳畜之/ 1791년 11월 6일 <일성록>)
     
    임금 정조를 너무도 존경하고 사랑했기에, 그러기에 '지존(至尊)께서 내리신 좋은 벼슬'이라며 과거 보는 일도 마다했고, 또 첫 시험에서 비록 정조가 5등을 내렸어도 '아취가 있다'는 칭찬 하나에 자신의 호를 아정(雅亭)으로 한 그였기에, 아울러 예절에 관한 책 <사소절(士小節)>을 쓸 정도로 몸가짐을 단속했던 바른생활의 사내였으며, 돈이 없어 수백 권의 책을 빌려 필사하면서도 속자(俗字, 간단히 빨리 쓰는 글씨)를 쓰지 않았고, 자신 글이 진귀하지 못하다며 남에게 보여준 후에는 사흘 동안 부끄러워 한 소심한 사내였기에 그 충격은 누구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시름시름 앓던 이덕무는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난 1793년 정월 25일 아침 문득 죽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정조도 뭔가 느끼는 것이 있었을까, 부고를 접한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임금의 개인 돈) 5백 냥을 하사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고 유고(遺稿)를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광규를 아버지에 이어 규장각 검서관으로 채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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