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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이 묻힌 아차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8. 31. 21:56
<나무위키>에 따르면 대한민국 해군이 운용 중인 잠수함은 장보고급, 손원일급, 도산안창호급으로 구분된다. 이중 장보고급 잠수함(SS-I)은 북한의 강력한 잠수함 함대에 맞서기 위한 '한국형 잠수함'(KSS) 사업을 통해 전력화한 길이 56m, 배수량 1,200톤급의 209급 잠수함의 통칭으로, 총 9대가 운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은 모두 나라를 지킨 위인들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는데, 장보고급의 함명은 장보고, 최무선, 박위, 이종무, 정운, 이순신(李純信), 나대용, 이억기 등으로 전원 바다의 전사들이다. 조금은 생소한 정운, 이순신, 나대용, 이억기는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조선 수군의 장수들로, 여기서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이 아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무의공 이순신을 말한다.
'SS-071 이억기'는 장보고급 잠수함의 마지막 9번함으로, 2002년 1월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SS-068 이순신', 'SS-069 나대용'에 이어 진수했다. 'SS-071 이억기'는 국내 자체 개발한 특수 초고장력강판(HY-80)을 사용했으며, 최대 잠항심도 시험에 성공한 잠수함으로 2001년 11월 30일 실전배치했다. 이억기함은 2016년 7월 14일, 하와이 카우이섬 근해에서 실시된 미사일 실사격 연습 (SINKEX)에 참가하며 정확한 명중력을 뽐냈는데, 아래 사진은 그 훈련 중 함내에서 갑자기 발생한 환자를 이송하는 광경을 보도한 외신이다.
오늘 말하려는 사람이 바로 'SS-071 이억기'의 이름으로 차용된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장군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억기 장군을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 장수 쯤으로 생각하지만 그 두 사람은 동급의 장수였다. 즉 이순신이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이하 전라좌수사)였을 때 이억기는 같은 품계의 전라우도수군절도사(이하 전라우수사)로서, 오히려 병력과 함선의 수는 5관5포를 관할한 전라좌수사보다 12관15포를 관할한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더 많았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두 사람의 나이로서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48살, 이억기는 32살이었고, 무과에 급제할 때의 나이는 이순신이 32살, 이억기는 17살이었다. 이는 이억기의 무예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말하여주는 것으로, 21세에 벌써 종3품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어 두만강을 넘어 침공해 온 여진족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26세에 함경도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가 되었는데, 당시 조산 만호(造山 萬戶)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이일(李鎰)의 참소를 받아 위기에 처했을 때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론해 힘이 되어준 적도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이순신은 영의정 유성룡의 도움으로 7계급을 뛰어넘는 파격 승진을 해 전라좌수사가 되었지만 당시 이억기가 이를 불쾌히 여겼다는 기록은 없다. 아니 이억기는 오히려 이순신을 도와 23전 23승 신화 창출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니 이순신의 2차 출정 때 전라우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합류하여 당항포·율포전투에서 승리하고, 3차 출정인 한산도·안골포전투, 4차 출정인 부산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다만 병력 동원의 문제로 이순신과 대립한 적이 있으나, 이후 술을 함께 하며 화해했다)
이후로도 이억기는 연합함대의 선봉장으로서 전투를 이끌었는데, 1593년 이순신이 그간의 전공으로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을 때도 그는 이를 시기함이 없이 묵묵히 따랐으며,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을 때는 이항복 · 김명원 등의 조정 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순신의 죄 없음을 주장했다. 이때까지 그는 5년 동안 이순신과 함께 해전을 지휘하며 일본군의 서해 북상을 저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였던 바, 이순신과 동급의 공훈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1597년 7월,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부산포 공격에 참가했다가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다. 알려진 대로 이때 조선군은 크게 패했고 원균은 육지에 상륙해 도망가다 왜군의 칼을 맞고 죽었다. 하지만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도주하지 않고 왜군과 끝까지 맞서 싸웠고, 적선에 포위되어 가망이 없게 되자 최호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그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전공과 장렬한 전사도 있겠지만, 직위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함에도 기인할지니,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것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하는 원균에게 "어찌 전쟁중인 장수가 벼슬의 고하에 연연하느냐" 했다는 일갈은 명언으로써 새길만 하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렇듯 화끈하고 절도 있게 살다 간 벼슬아치도 드물다.
그는 바다물에 투신 자살했기에 시신이 없다. 그래서 당시는 따로 무덤도 만들지 못하였으나, 「후손인 이명규가 양주 아차산리 선영의 오향(午向, 정남향) 언덕에 옷과 갓으로 공(公, 이억기)의 가묘를 만들어 부인인 증(贈) 정경부인 영천 최씨와 함께 장사지냈다」는 기록과,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쓴「증 병조판서 완흥군 시 의민 이공 신도비명(贈兵曹判書完興君謚毅愍李公神道碑銘)」이라는 이억기 장군 신도비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 정조 20년(1796년) 11월 13일 기사에 전한다.
하지만 옛 양주 아차산리인 구리시 아천동에 이억기 장군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은 없다. 그래서 예전에 개인적으로 아치울 마을 및 한다리 마을, 참피온스 파크, 우미내 별장(장영자 별장) 일대를 조사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구리문화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워커힐호텔이 생기면서 없어졌을 거라고 하는데, 필시 그리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아차산을 산책할 때면 혹시 뭔가를 발견하지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집이 가까워도 자주 오게는 안 되는데, 오늘은 아천동 뒤쪽에 위치한 통정대부 이민수의 묘소 근방을 다녀왔다. 주변의 주인 잃은 무덤 자리들에 여전히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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