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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도 내비에도 없는 김화 충렬사 & 겸제의 화강백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9. 23. 23:01
병자호란에 대해 띄엄띄엄 쓰고 있는 중이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조선조의 양난(兩難)으로 불리나 임진왜란과 달리 승전의 기록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전쟁이 불과 52일간이라는 단시간에 끝난 점에도 있겠지만 그간에 일어났던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전을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경기도 광주(廣州) 쌍령(雙嶺) 고개에서 벌어진 쌍령전투는 병자호란의 최대 패전을 넘어 한국 역사 3대 패전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의 칠천량해전, 한국전쟁 때의 현리전투와 더불어)
하지만 병자호란 때의 모든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한 것은 아니니, 광교산(光敎山)전투는 드문 승전의 결과로 제법 유명하다. 약술하자면 이 전투는 1637년 1월 28일부터 1월 31일까지 경기도 용인 광교산에서 벌어진 전투로, 남한산성의 국왕을 구하기 위해 올라온 전라도 근왕군 수천 명이 청나라 군대를 기습해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전라병사 김준룡이 이끌기는 했으되 군인들의 대부분은 정규군이 아닌 의병으로 구성된 병력으로서, 그들 민간인이 청나라 군사와 대적해 두 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하였다는 데 의의가 크다. 다만 그들이 남한산성으로 가기는 역부족이었다.
오늘 말하려는 김화(金化)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병자호란 중에 벌어진 대략 13회의 대소전투 중 광교산전투와 더불어 병자호란 중 조선군이 거둔 유이(唯二)한 승리로서,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 1596~1637)가 이끄는 3000명 병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柳琳, 1581~1643)이 이끄는 군사 5000명은 2월 20일 김화읍 생창리와 화강에서 청나라 팔기군을 크게 무찔렀다. 앞서 말한 박태보의 <정재집>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죽은 청나라 군사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 적병들이 시신을 거두어 태우는 데만 3일이 걸렸다"고 할 만큼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김화전투를 이끈 홍명구와 유림을 배양한 충렬사 이 평안도 병력은 1637년 1월 초 압록강을 도하한 청태종 홍타이지를 추격해 내려온 군사들이었다. 청태종은 1월 20경 서울에 도착한 후 26일 탄천에 진을 쳤으나 뒤가 불안했던지라 대군을 북으로 보내 추격군들을 막게 했다. 이에 2월 20일 새벽 전투가 시작되었던 바, 지금의 충렬사 앞 벌판에 진을 친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의 군대와 화강(남대천) 잣나무 숲 언덕에 진을 친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의 군대와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양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다.
조선군 중에서는 평지에서 백방전을 택한 홍명구의 군대가 특히 피해가 컸고, 홍명구 역시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화강 잣나무 숲 뒤에서 총격전을 벌인 유림 군대는 피해가 적었는데, 잣나무 숲이 청나라 기병대의 돌진을 막았으며 은폐해 적을 쏘기 유리했던 까닭이었다. 유림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진군을 계속했으나 남한산성 진격 2일 전인 2월 24일,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유림은 눈물을 머금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충렬사 입구 홍살문 강원도 김화읍 생창리의 충렬사는 김화전투에서 전사한 충렬공 홍명구를 배양한 사당으로 효종1년(1650) 김화현 현민들이 세웠다. 이후 효종 3년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940년에 김화 유생들의 합의로 충장공 유림을 합사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충렬사는 한국전쟁 중 완전 소실됐다가 1997~1999년 3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김화는 한국전쟁의 막바지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알려진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로서, 이곳 충렬사가 있는 생창리는 그 철의 삼각지대 한 가운데 있었으니 온전하면 그것이 이상한 노릇이다.
당시의 격렬함을 홍명구 충렬비와 유림 대첩비가 증명한다. 충렬사 앞에 있는 이 두 개의 비갈은 소총과 기관총 탄흔이 역력한데,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공림대첩비'는 그런대로 글씨를 읽을 수 있으나 홍명구 충렬비는 탄흔으로 식별이 어렵다. 그 비석을 찾아가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김화 충렬사는 지도에도 내비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GPS에서 충렬사를 검색하면 전국의 약 10곳의 충렬사가 뜨지만 김화 충렬사는 나오지 않는다. 남쪽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 군사작전구역 내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용케 그곳을 찾아가도 대개는 도로 끝에 있는 군부대로 들어가게 된다. 길이 군부대로 곧장 연결되기 때문이니, 한마디로 그 지방도로는 그곳이 종점인 셈이다. 까닭에 군인들의 검문을 피할 수 없는데, 충렬사를 찾아왔다고 하면, 부대 입구 바로 옆으로 난 작은 길을 가르쳐준다. 대신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일대는 군사작전구역이므로 어떤 방향, 어떤 곳의 사진 촬영은 불가하다는 짧은 교육을 이수(?)해야만 한다.
충렬사 비각 안으로 두 개의 비갈이 보인다. 전면에서 좌측 것이 유림 대첩비이고, 우측 것이 홍명구 충렬비이다. 유림 대첩비 전면 비각 옆의 충렬사 사적비 충렬사지 안내문 홍명구가 진을 쳤던 충렬사 앞 들판 유림이 진을 쳤던 화강백전 겸제 정선의 '화강백전(花江栢田)' / '화강백전'은 '화강의 잣나무밭'이란 뜻으로 정선이 1747년에 그린 그림이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이 그림은 겸제가 금강산 가는 길에 그린 것인데, 경치가 빼어나서가 아니라 곳에서 전사한 순국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 성스러운 옛 전쟁터를 화폭에 담은 것"이라고 했다. 겸제 '화강백전'의 배경이 되었을 법한 곳 화강 표석 / 화강은 남대천의 옛 이름이라고 설명돼 있다. 화강 풍경 물안개 속 화강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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