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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령전투와 저격능선전투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9. 27. 16:28
2021년 상영된 중국의 국뽕 영화 '장진호'(長津湖)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기념해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로 역대 중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장진호'는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의 2주간, 미군과 중공군이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 벌인 지옥의 전투를 영화화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97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중공군 9병단은 2만5000여 명의 전사자와 1만30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 '역사상 가장 추운 곳에서 벌어진 싸움, 초신 전투')
'장진호'는 국뽕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당연히 과장됐지만 중국 젊은이들의 애국심은 충분히 자극했는지 거침없는 행진 속에 마침내 전인미답의 흥행수입을 거두었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어떻게 연출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유명한 천카이거와 서극이 공동 연출했다) 장진호 전투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1992년 미중갈등이 격화된 가운데 중국 CCTV에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1956년 작 '상감령'(上甘嶺)이 방영되었을 때, 그리고 2019년 5월 6일, 화웨이의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이 CCTV와의 대담에서 "내년에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면 그들을 이끌고 상감령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을 때는 생소했다. 장진호와 달리 상감령은 듣도 보도 못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상감령은 1952년 피아간의 전선을 교착시킨 전투가 벌어졌던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잡은 고지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상감령은 오성산에서 아래쪽 계웅산 방면으로 뻗어 내린 능선 가운데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돌출능선으로, 해발고도 580m 정도에 위치한 고갯길이다. 그 아래에 하감령이 있다. 이곳에서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저격능선이라 부른다. 19521년 10월, 미 제25사단은 김화 지역에 진출하여 중공군 제26사단과 대치하였는데, 먼저 상감령을 차지했던 중공군이 고지의 잇점을 이용, 아래쪽의 미군 병사를 저격해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미군은 상감령 일대를 '스나이퍼 리지(Sniper Ridge)'라 불렀고, 한국군도 그 지명을 따라 부르며 '저격능선'으로 굳어졌다. 저격능선의 좌측으로는 삼각고지(제인러셀 고지)가 위치하며, 중국에서는 오성산 부근의 저격능선전투와 삼각고지전투를 합해 ‘상감령 전투’라고 부른다.
‘상감령 전투’에서 중공군은 미군의 우수한 화기에 맞서기 위한 긴 참호를 팠다. 상감령의 참호는 땅 속의 만리장성으로도 비유되는,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50여km에 걸쳐 형성된 지하갱도와 연결되어 보급로 역할도 해주었다. 전체 휴전선 전투에서 미군의 폭격을 무력화시킨 이 지하 참호의 총 갱도수는 9519개, 총길이는 3683㎞로, 그 안에 각종 시설물 10만1500개가 설치됐다.
지하 참호의 각 진지는 20~30km의 종심(縱深)을 가진 거대한 거미집과 같은 구조로서, 중공군 포로의 증언으로는 이 지하 진지는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기도 했으나 식수가 절대 부족해 갱도 안으로 결로되어 떨어지는 물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상감령 참호는 '아군이 중공군 1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시키는 데 33만 발의 실탄이 쓰였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방어에 효과적이었다. (저격능선은 1953년 7월에 전개된 중공군의 마지막 공격, 이른바 '7·13공세' 때 휴전선 북방 비무장지대로 들어가 지금은 지하 참호를 볼 수 없다)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 최초로 공격에 나선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는 미 제9군단의 포격 지원 속에 중공군의 상감령 진지를 탈취하였다. 그러나 곧 중공군 제15군 예하 제45사단 제133연대의 역습을 받고 점령 다섯 시간 만에 고지를 내어주고 후퇴해야 했다. 이렇게 시작된 저격능선전투는 11월 24일, 중공군이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태세에 들어가고, 국군도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 장장 6주간의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이 전개되는 동안 상감령은 포연이 구름처럼 걸려 있었고 남대천은 내내 피로 물들었다. 중국쪽 기록에 따르면 상감령전투에서 유엔군 사상자는 2만5000명, 중공군은 1만1000여명이고, 우리 쪽 자료에는 중공군 사상자 1만4700여명, 유엔군 사상자 7800명, 국군2사단 사상자 4830명으로, 어느 쪽 기록을 택해도 단일 지구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처절한 전투였다. (유엔군 자료에서는 중공군 손실 1만9000명, 유엔군 손실 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공군은 이 전투에 대해 전략 요충지인 오성산을 지켜냈음으로 이긴 전투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중공군 점령지였던 계웅산을 빼앗았으므로 국군의 승리라고 말한다. 훗날 국군 측에서는 이 저격능선전투를 백마고지 전투와 더불어 한국전쟁의 2대 격전지로 평가했고, 중국 역시 상감령전투를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의 최대 전투라고 말하고 있다. 그 전투는 여태껏 휴전 중으로, 변한 것이라고는 중공이 중국으로 바뀐 사실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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