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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전투와 백마고지역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0. 14. 23:58
철원 백마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싸움이 벌어졌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는 전적지이다. 백마고지에서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중공군 제38군 4만 4,056명과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약 2만 명이 격돌했다. 이후 9일 동안 고지 주인이 24번이나 바뀌는 격렬한 공방전이 전개되며 중공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최종적으로 아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백마고지전투가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가 된 것은 당시 김일성이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에게 철원평야만큼은 꼭 지켜달라고 한 간절한 부탁의 결과라는 말도 회자되나,(북한에는 이만한 곡창지대가 드문 까닭에) 백마고지 전적관 내에 게시된 아래의 '전투 전(前) 상황'이라는 일목요연한 설명문은 그 어떤 말보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해준다.
개전 초기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국과 유엔군은 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 한·만 국경선까지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2차례나 38선을 오르내린 끝에 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는 현 휴전선 일대에서 피아간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는 전쟁 지속 능력이 이미 한계에 달한 공산측의 요청에 의해 휴전 협상이 계속되었던 시기로 현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에 대비, 전투는 더욱 격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52년 9월 이후에는 수도고지, 지형능선, 불모고지 일대에서 피아 손실을 고려하지 않은 혈전이 계속되었는데, 10월에 들어서자마자 적(敵)은 백마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 칭호까지 받은 중공군 정예 제38군 3개사단(112·113·114사단)을 동원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백마고지 전적관에는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명명된 연유에 대해서도 3가지 설을 달아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며, 심한 포격으로 인해 허옇게 된 고지의 모습이 흡사 백마(白馬)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라고 부기하였다. 그리고 국군이 행한 12번의 고지공격을 순차 대로 자세히 설명해 놓았는데, 그 격렬했던 전투상황은 아래의 고열로 휘어진 MG50 기관총과 52년 10월 9일 자 AP통신의 기사에서 더욱 리얼하게 느껴진다.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고지 백마를 탈취하기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한국군 부대장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이 진지를 고수할 것을 약속하였다. 제9사단은 9일 하루동안 3차례나 같은 고지를 장악하였다. 한국군은 적의 침략요로를 장악하기 위하여 지난 6일 이래 20회나 주인을 바뀌어가면서 혈투를 벌였다.
미8군의 발표에 의하면 백마고지를 점령하려는 중공군은 지난 6일 이래 8천 명 내지 1개 사단의 인명손실을 보았다고 하며, 유엔군 장교에 의하면 이 중공군은 "전선에 있는 최정예부대"라고 한다. 한국군 제9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우리 부대 장병들의 사기는 지극히 왕성하나 피로하다"고 말했다.
제9사단 장병들의 항전은 실로 용감하였으며 선혈로 물들은 육탄전을 감행하였다. 155마일 각 전선의 전투는 산발적이었고 백마고지 옆의 화살머리 고지에 있는 프랑스 진지에도 중공군은 포격을 가하여 왔으나 보병부대 공격은 없었다.
한국전쟁 최대 전투답게 당시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모뉴먼트가 백마고지 전적지 입구에 가득하다. 그래서 언뜻 과도하다는 느낌도 받게 되나 백마고지 전적관의 과도하지 않게 잘 정리된 전시물과 게시물을 살펴보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하지만 위령비에 새겨진 친일파 모윤숙의 글을 읽노라면 '위선'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흔한 표현으로 '옥에 티'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글은 이제 사라질 때도 되었음에도 아직도 건재하다.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마고지역이 있다. 2018년 월정리역이 복원되기 전까지 대한민국 최북단 철도역이었으나 월정리역이든 백마고지역이든 열차가 운행되지는 않는다. 유명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의 글귀는 한국전쟁으로 경원선 선로가 대광리에서 끊어지며 생긴 말인데, 이후 선로가 이곳 백마고지역까지 복원 연장되었지만 여전히 철마는 달리지 못한다. 얼마 전까지 통근용 열차가 동두천역까지 운행되었으나 지금은 버스로 대체되었고, 백마고지역 역시 동두천 왕복 직행버스의 정류장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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