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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II)-언더우드가 말한 고구려의 신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6. 14. 05:12
한국 기독교 전래사(史)를 살펴보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두 가지 기적 같은 일이 있다. 그 첫 번째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던 이승훈(李承薰)이라는 사람이 제 발로 베이징의 예수회 교단 찾아가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일이고,(1784년) 두번 째는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라는 20대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한국을 찾은 이후(1885년) 단 1세기만에 전 인구의 25%가 개신교인이 된 일이다.
여기서 이승훈에 관한 스토리에 대해서는 앞서 '천로역정에 섰던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에서 설명을 마쳤다. 이에 오늘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에 대해 소개하려 하는데 그중에서도 언더우드에 관해 집중조명해보려 한다. 그에 관해 집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나라 개신교인 중의 80%가 그가 들여온 장로교 소속의 교인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사전적 정의를 따르자면 장로교는 '개신교의 한 교파. 가톨릭교의 교황권을 부정하고 교회의 운영을 장로들의 합의제로 하자는 칼뱅(Calvin, J.)의 장로주의에서 이루어졌다. 목사와 장로가 모여 노회를 구성한다'('다음사전')로 설명되는데, 오늘은 그저 이쯤만 알자. 기독교의 분화, 특히 장로교가 속한 개신교의 복잡한 분화에 대해서는 따로 날을 잡아야지 여기서는 설명이 어렵다.
~ 잠시 맛만 보자면 기독교는 크게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로 나뉘는데, 그중 개신교 교파는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몰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파 교회, 순 복음교회, 유니테리언,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교회, 루터교회, 하나님의 성회, 그리스도 교회, 사도교회, 기독과학교회, 세계 복음교회, 구세군 등 약 200개 정도 되고 여기에 사이비 유사종교를 합하면 1,000여 개로 불어난다.(아,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게다가 그중의 장로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100년도 안 돼 통합, 합동, 고신, 예장, 기장 등으로 분리돼 마치 길 잃은 양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을 헤매는 듯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상을 설명하는 것 역시 따로 날을 잡아야지 여기서는 어려운데(그러할 가치는 없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들 교단들이 서로 이단이라고 삿대질은 안 하지만 서로를 길 잃은 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신교의 분화와 마찬가지로 세(勢)가 불어나면 자연히 발생하게 되는 필연과 같은 일로서, 어떤 식자(識者)께서는 이것을 '기독교는 진화하는 종교'라고 점잖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재미있게 여기는 것은 사실 그 구절양장의 분화보다도 우리나라에서는 성세(盛世)인 장로교가 본산인 미국에서는 정작 그 교세가 미약하다는 사실이며, 바로 그것이 한국에 언더우드를 파견하는 이유가 됐다는 사실이다.(정확히 말하자면 장로교의 본산은 루터가 활약한 독일이나 칼뱅이 활약한 스위스, 혹은 존 낙스가 최초의 장로교회를 설립한 스코틀랜드 쪽에서 찾아야겠지만 내가 미국의 장로교회를 지목한 것은 바로 그곳에서 언더우드를 파견했고 이후로도 한국의 장로교에 영향을 미쳐서이다)
1881년 뉴욕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그즈음 세계 선교의 꿈을 품고 다시 그해 가을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네덜란드 장로회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까지 신학과 함께 별도로 의학을 공부했다. 그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한 이유는 그 역시 당시 영미권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되던 인도에 가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우연히 조선이란 나라에 관해 듣고 목적지를 바꾸는데, 그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가 약혼녀와의 파혼 스토리에 잘 드러나 있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디 있나요?"
"인도 북쪽의 아시아 대륙 끝에 있다고 하오."
"그 나라의 주식(主食)은 무엇인가요?"
"모르오."
"병원은 있나요?"
"그것도 모르오."
"그럼 당신이 조선에 대해 아는 건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뿐이오."
이로 인해 언더우드는 약혼녀에게 파혼을 통보받지만 개의치 않고 모교를 관할하는 네덜란드 장로교회를 찾아가 조선 선교에 대한 후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언더우드의 청은 조선이 선교사 파견 위험지역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그는 다시 북미 장로교회(Northen Presbyterian Church)의 문을 두드리는데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환대를 받는다.
"드디어 기회가 왔군요. 오늘 이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한국에서 선교를 할 수 있는 황금의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Arthur J. Pierson <The Call of Korea>, Introduction to H. G. Underwood)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미국 장로교회는 침례교, 감리교, 몰몬교 등에 밀려 교세를 크게 확장하지 못하고 있었던 바, 제 발로 찾아온 언더우드를 동양 선교의 기회로 삼고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북미 장로교회 목회 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임명된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드디어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 한 달 넘게 걸려 태평양을 건넜으나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크게 불안했던 탓이니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조선 선교를 목적으로 파견된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 부부와 함께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이 묶이고 만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조선인 기독교인 이수정을 만나 교류하며(이수정에 대해서는 ☞ '침묵하는 예수 그리스도' 참조) 그가 간행한 한글성서를 가지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일본 상선을 타고 마침내 인천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구한말의 선교사 W. D. 레이놀즈가 쓴 <성서 번역과 개혁 50년사>를 보면 이때 언더우드가 <마가복음전서>를 한 묶음 들고 왔다고 하는데, 1884년 간행된 <신약성서 마가전>이 아니라 1885년 2월 이수정이 요코하마에서 출간한 <신약 마가전 복음서언해>로 여겨지며, 이는 언더우드의 부탁으로 출간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후 조선 땅에서의 언더우드의 활약은 발군이었다. 혹간 선교사들 사이에서 그의 독단이 문제 되기도 했으나 그만큼 열정적이었으니 아래의 사진은 그가 이 땅의 성서가 올바로 번역될 수 있도록 기울인 노력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여호와를 조선인의 언어인 '하느님'으로 번역하여 전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반대하고 여호와라는 본래의 단어를 사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Underwood Of Korea>: 언더우드 사후에 그의 아내 릴리어스 호톤이 쓴 언더우드의 한국 생활사) 하지만 다른 4명의 개신교 선교사(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튼, 헤론)와의 표대결에서 밀려 여호와의 호칭을 조선어 성서에 집어넣는 데 실패하였다.( ☞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I - 게일이 말한 조선의 하나님')
그의 노력은 결국 빛을 보았으니 지금의 성서에서는 여호와가 오롯하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왜 다른 선교사와 달리 천주(天主), 상제(上帝, 하느님), 신(神), 하나님이란 용어의 사용이 전부 불가하다 생각했을까? 물론 그에게는 여호와의 순수한 호칭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본래부터 한민족이 섬겨온 유일신의 신칭(神稱)임을 알고 있었던 바, 이래저래 그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 왕국(The Kingdom of Kokureo)에서는 하나님(Hananim)이라 일컬어지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 그 하나님은 크고 유일한 하나(Great only one)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만든 '번역 위원회'의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라 알려져 있다.(<Underwood Of Korea>) 언더우드의 한국에 대한 놀라운 고찰과 혜안이다. 고구려는 예로부터 천손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시조인 추모왕이 '천제의 아들이자 물의 신 하백의 외손'(天帝之子 河白之孫)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었음인데,(광개토대왕비, 모두루 묘지명, 위서 고구려전 등) 그것을 언더우드가 인지해낸 것이었다.
이 같은 선민의식은 고구려 때에 갑자기 튀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 때부터의 생각이니 그들은 자신의 선조가 천제(天帝=하느님=하나님)인 환인(桓仁)의 아들인 환웅(桓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환웅이 인간세상을 동경함에 환인이 세 천사와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가 다스리게 했다는 사실과, 그가 지상에서 낳은 아들이 곧 우리민족의 직계 조상인 단군이라는 사실을 조선시대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것인데, 다만 언더우드가 고조선을 알 리 없었을 터, 그 후예가 세운 구체적인 나라이자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던 고구려를 지목해 말했던 것이다.
~ 언더우드 부부는 신혼 여행을 포함, 평안도 의주까지의 전도여행을 3차례나 떠났는데 첫 여행에서 언더우드는 세례문답을 통과한 33명의 남자를 이끌고 압록강 건너 만주 땅에 들어가 세례를 베풀었다. 이때 이들 신혼부부는 1600Km 이상을 여행하였고 600여명 이상을 치료하였으며 과거의 대제국 고구려에 대해 보고 들었다.(이들 부부는 회고록에서 밤마다 창호지를 뚫고 안을 들여다보는 조선인들로 인해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천제지자(하나님의 아들)의 신화는 고구려와 함께 사라져 갔으나 우리민족의 하나님은 조선 말까지 살아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을 구한말 이 땅에 왔던 서양의 선교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언더우드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까닭에 그는 조선의 하나님을 피하는 예의를 지켰던 것이나 그 선교사로부터 신앙을 배운 이 땅의 목사와 장로는 쇠톱으로 제 선조의 목을 잘랐다. 과거 열풍처럼 번졌던 단군상 목자르기를 말함인데, 그 FRP 단군상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다. 나는 소문만 듣고도 놀라고 끔찍했는데 그것을 직접 본 초등학생들의 충격은 오죽했을까?
이러한 엽기적 행위들을 일부 기독교인들은 독실하다 생각한다. 여호와가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아담은 조상이 될 수 있지만,(아니 그와 같은 창조론만 절대적이지만) 천제의 아들과 곰이 변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은, 혹은 천제의 아들을 자처하는 자와 곰 토템족의 여인이 낳은 단군왕검은 그 어느 쪽도 미신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그래서 쌍심지를 키고 망치와 쇠톱을 들고 다니며 그것을 부수거나 목을 자른다.(그 짓을 한 목사와 장로들 중의 일부는 붙잡혀 처벌받았지만 모르긴해도 반성한 자는 없을 듯싶다)
여기서 전부를 적을 수 없겠으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이하 언더우드 가문이 칭송받는 것은 적어도 그와 같은 짓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의 민족정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때문이니 2004년 5월 11일, 4대 119년간 에 걸쳐 봉사를 한 그들 가문이 이 땅을 떠날 때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은 사설을 게재했다.
4대에 걸쳐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과 헌신을 바쳐온 언더우드가(家)가 한국을 떠난다고 한다. 1885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우리 이름 원두우 목사가 첫 장로교 선교사로 이 땅에 발 딛은 지 119년 만이다. 그의 증손자인 원한광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은 "우리 일가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봉사는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더우드가만큼 대를 이어 피붙이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었던 외국인은 없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제 2’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는 고향이었다. 1세가 연세대와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해 캄캄했던 그 시대 민중들을 위해 신(新)문명의 불을 밝힌 이래 후대(後代)들은 이 땅에서 나거나 자라며 사랑을 기울여 왔다. 3대 모두 이 땅에 뼈를 묻었다.
언더우드가 사람들이 우리를 더욱 감복시키는 점은 그들이 성경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종으로 어떻게 그처럼 티없는 베풂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선 식민지시대, 험한 말로 제국주의시대 서양인이 쉬 드러냈던 계몽과 교화의 사도인 양 하는 교만이나 억지 겸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민족에게 짓밟힌 모습 앞에서도 “한민족은 주권을 빼앗길 민족이 도저히 아니다”라며 우리의 역량을 굳게 믿어줬다.
만남과 헤어짐에서 인연의 섭리가 작용함을 믿어온 우리는 일가를 떠나보내며 지난날 그들의 베풂이 오늘 우리에게 베풂의 모범을 보이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도 바깥 세상으로 나가 도움을 줘야 하는 지금, 자기를 낮추며 베풀고 상대를 높이며 돕는 베풂의 방식과, 그곳 사람들과 한 몸이 돼 봉사하고 헌신하다 그곳에 뼈를 묻는 가없는 사랑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언더우드 1세의 동상에 새겨진 위당(爲堂 鄭寅普)의 명문은 일가 4대에 두루 바칠 만하다. ‘고심으로 조선 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 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 갈수록 깊다’.(2004. 5.11. 조선일보 사설 중 발췌)* 그밖에 우리가 언더우드 가문에 대해 몰랐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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