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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포'(II)ㅡ 화기도감과 나선정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2. 8. 05:21

     

    경복궁 뒤 삼청동주민센터 길로 들어서 청와대 쪽으로 가다 보면 한국금융연수원을 만날 수 있는데, 그 근방에는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두 곳의 장소가 있다. 한 곳은 화기도감 터이고, 한 곳은 번사창기기국 건물로서, 두 곳 모두 무기를 만들던 곳이나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이에 먼저 화기도감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데, 한국금융연수원 바로 옆 건물 앞에 있는 화기도감 터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조선시대 총포를 만들었던 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총을 사용하여 아군이 크게 고전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총청(鳥銃廳)을 만들어 총포를 제작하였고 그후 북쪽의 여진을 방어하기 위하여 화기도감으로 개편하였다.

     

    앞서 '화포'(I)'에서 언급하기도 했거니와, 임진왜란 개전 후 우리가 왜군에 크게 밀린 이유는 총포를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왜군은 포르투갈로부터 전래된 신무기 뎃뽀(鐵砲)를 앞세워 무뎃뽀(無鐵砲)의 조선군을 유린했다. 이에 조선도 전후에는 항왜(降倭, 투항한 왜군)의 뎃뽀를 모방한 총포를 만들었던 바, 나는 새도 맞혀 떨어뜨린다는 의미의 조총(鳥銃)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조총을 만들어낸 곳이 조총청, 즉 화기도감이었다. 

     

     

    화기도감 터 표석
    번사창기기국 건물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해지는 <화기도감 의궤>를 보면 화기도감이 설치된 1614년(광해군 6) 이후 1년여 간(1615년 4월 28일까지) 제조된 화약무기들이 그림과 함께 등장한다. 나열하자면 소포(小砲)인 불랑기 4호, 불랑기 5호, 현자총통(玄字銃筒), 백자총통(百字銃筒), 삼안총(三眼銃), 소승자장가(小勝字粧家), 쾌창(快鎗) 등 약 1500여 문의 화포가 화기도감에서 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2만 5천근이 넘는 구리와 쇠가 사용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후로도 화기도감에서는 무기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으니 조선군들은 이 무기들을 들고 청나라와의 전투를 위해 만주로 출병하였으며,(1619년) 러시아와의 전투를 위해 흑룡강에 파병되었다.(1654년과 1658년) 역사적으로는 사르후 전투와 나선정벌이라 부르는 일로서, 특히 나선(羅禪), 즉 러시아군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조선군 총기의 위력과 총포술은 가히 발군이었다.

     

    나선정벌은 청나라의 요청에 따른 일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에 두 차례나 청병(請兵)을 한 이유는 남하하는 러시아군의 위력과 총포에 크게 눌린 까닭이었다. 앞서 '해달과 알래스카'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슬라브인은 돈이 되는 검은담비 가죽을 좇아 동진을 지속하였으니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시베리아의 동단(東端)인 베링해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남하를 시작했던 바, 헤이룽강(흑룡강) 북쪽의 몽골족과 여진족을 몰아내고 네르친스크 시를 건설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청나라의 전통적 국경인 흑룡강까지 침범하니 그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이 카자흐군(軍) 기병대장 하바로프의 아극살(雅克薩, 야크사) 공격이었다. 1644년 흑룡강 북안(北岸)의 아극살을 침입한 하바로프는 일대에 알바진이라는 성을 쌓아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키고, 이어 흑룡강의 동안(東岸)을 따라 남하, 우수리강 하구에 다시 아찬스크(지금의 하바로프스크) 성을 구축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팔기군 대장 해색(海塞)을 사령으로 하는 총수(銃手) 1,500명을 출병시켰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네르친스크와 알바진의 위치
    하바로프스크 시의 예로페이 하바로프 동상

     

    아찬스크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더욱 남진을 감행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청나라는 조선에 청병을 한 것인데, 소국의 국왕으로서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효종은 옛 6진(鎭) 지역의 군사들을 모집해 1654년 3월,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을 사령으로 하는 150여 명의 군사(총포수 100명)를 파병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북만주로 출병한 조선군은 송화강에서 조우한 러시아 선단(船團)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후통과 골지에서 벌어진 러시아군의 접전에서도 모두 승첩을 거둔 후, 청군과 함께 후통강(厚通江)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그해 조선으로 개선하는데, 이때 참전했던 청나라 군사들(약 3천명)은 조선군의 총포술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상이 이른바 1차 나선정벌이다. 

     

     

    나선정벌 지도

     

    이후 청나라는 여세를 몰아 팔기군 도통(都統) 명안달례(明安達禮)를 사령으로 하는 총수(銃手) 7,500명의 정예병으로 흑룡강 상류의 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또다시 참패, 조선에 재차 원병을 청하였다. 효종은 이번에도 6진 일대의 포수를 징발해 1658년 3월, 병마우후 신유(申瀏)를 사령으로 하는 265명의 군사(총포수 200명)를 청국에 파병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군은 다시 만주에 출병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1차 때보다 훨씬 북쪽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며, 군함을 타고 흑룡강을 내려온 러시아 군대 역시 1차 때보다 훨씬 많았던 듯 보인다. 하지만 이때도 조선군은 뛰어난 사격술을 선보여 러시아군을 기겁시켰는데, 반면 조선 병사들은 러시아인의 큰 키에 놀랐다고 한다. (기록에 전하는 7척은 2m가 넘는 수치이니 과장은 좀 있었겠지만 놀랄 만은 하다)

     

    2차 정벌에서 조선군은 스테파노프(Stepanov) 부대 함선 11척 중 7척을 불태우고 적장 오노프레이코를 비롯한 270명을 살상시켰던 바, 결국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러시아군 내에서는 '대두병(大頭兵)과 만나면 싸움을 피하고 도망쳐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하니 조선군의 사격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대두병을 전립을 쓴 조선군을 이르는 말로, 신유의 <북정록>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다만 이때는 조선군도 피해가 있었으니 8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북정록>을 보면, 청나라 군인 중 70m 거리에서 3발 중 1발 이상 표적을 맞춘 자는 100명 중 1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조선군은 100명 중에서 무려 60명 이상이 나왔다. 

     

     

    2차 나선정벌 전투 / 프리미어조선 삽화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 청나라는 비로소 이 지역에서의 우위를 확보, 1683년 외흥안령(外興安領) 산맥의 남쪽에 애혼(愛琿) 성을 쌓고, 1685년과 1686년 양년에 걸쳐 남하의 전초기지인 알바진 성을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러시아는 마침내 남진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동진,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를 손에 넣게 되는 바, 그 와중에 성립된 조약이 저 유명한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즉 1689년에 이르러 청의 강희제가 보낸 전권대사 송고투(索額圖)와 표트르 대제의 전권대사 고르빈이 외몽골 니포초(尼布楚, 네르친스크) 성 밖에서 외흥안령의 고르비차강(江)과 아르군강을 잇은 선으로 양국의 경계를 정하니 러시아군은 조약에 의거, 자신들의 알바진 성을 무너뜨리고 퇴각하게 된다. 이 조약은 역사적으로 동양이 서양제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서도 의미가 있거니와, 더불어 그 내용에 있어서도 청국이 러시아에 대한 우위를 점함으로써 동양의 서양에 대한 우세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해진 경계 / 나무위키 자료

     

    이후 조약은 한 자의 수정 없이 무려 170년간이나 지켜지게 되는 바, 이상을 볼 때 조선군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았다고 하기는 견강부회함이 없잖으나 적어도 그 일익을 담당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파병된 조선군에 대한 청군의 대접은 횡포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그 억울함을 몇 개만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군은 실상 전투 중에서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나오지 않았다. 조선군은 마지막 전투에서 러시아 함선에 화전(火箭, 불화살)을 쏘았다. 불을 질러 배를 침수시킴으로써 재침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청나라 장수 사르후다가 진화를 명령하며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러시아 배에 실린 재물을 탐해 진화를 명한 것인데, 이에 불을 끄러 배로 올라가는 순간 배 안에 숨어 있던 러시아군이 사격을 가하면서 전사자 8명을 비롯한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된 것이었다. 

     

    조선군은 배 안에 숨어 있던 러시아군들에 반격을 가해 대부분을 죽였는데 그중의 한 척은 용케 달아났다. 러시아측 자료(<17세기 노중 관계 자료집>)에 따르면 러시아군의 사망자는 220명이었고 77명이 부상당했으며 95명이 탈출했다. (이상의 기록은 <북정록>과도 일치한다) 

     

    청나라에서는 이때 전사한 조선군의 시신을 러시아군의 것과 함께 불태우라고 명령하였으나 신유는 이것을 거부했다. 신유는, 이역만리에서 죽은 군사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반장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럴 수는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전투 다음날인 6월 11일 전사자의 시신을 같은 지역 출신끼리 짝지어 흑룡강 모래언덕에 묻었다.

     

    이상의 내용은 사령관 신유가 기록한 <북정록(北征錄)>에 실려 있다. 신유는 1658년의 이 원정에 대해 4월 6일 정벌군의 출발에서부터 러시아군과의 교전 후 8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141일간의 일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상세히 기록했는데, 처음에는 청군에 대해 예(禮)를 표시하던 신유도 나중으로 갈수록 '오랑캐', '탐욕스러운 놈들' 등으로 표현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억울한 것은 이때 조선군이 노획한 러시아군 조총을 모두 청군에게 빼앗긴 일이다. 제2차 나선정벌에서 조선군은 4백정의 총을 노획했지만 조선군은 전혀 갖지 못했다. 청군이 당사국이란 명목으로 이를 모두 회수해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신유는 갖은 노력 끝에 겨우 1정을 얻어오게 되는 바, 이를 토대로써 "화승(火繩)을 사용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 격발하는 신기한 총"을 만들어 보려는 갸륵한 의도에서였다. 신유가 <북정록>에 신기하다며 기록한 그 서구식 총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좀 더 자세히 다뤄보기로 하겠다. 

     

     

    《북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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