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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년 덕산사건의 진실ㅡ도굴꾼 선교사 페롱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2. 15. 00:38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은 쇄국론자가 아니었다. 아니 그는 오히려 개국론자였으니 프랑스의 집권자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과 연합해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내려 했던 혜안의 정치가였다. 1865년 러시아 함선의 함경도 침입이 잦아지자 흥선대원군은 승지 남종삼(1817-1866) 및 홍봉주, 이유일, 김기호 등의 관리가 주장한 연불방아론(聯佛防俄論: 프랑스와 연합해 나라를 지키자는 이론)을 받아들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대원군에게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한 이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부인 민씨도 천주교도로 아들 재황(載晃: 고종의 아명)이 왕이 되자 감사 미사를 올렸을 정도였다. 재황의 유모 박씨 역시 마르다(Martha)라는 세례명을 지닌 신자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보자면 대원군이 처음부터 천주교를 배척했을 리 없을 터, 오히려 프랑스 외방전도회에서 파견한 조선 교구장 베르뇌(Berneux, 1814-1866) 주교는 로마 교황청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분(대원군)은 종교에 대해서나 선교사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 이 분의 부인 민씨는 기독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섭정자(대원군)의 부인은 교리문답의 일부를 학습하였고 매일 기도문을 암송하며 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감사의 미사를 드려달라고 저에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The Edinburgh Review) 

     

    대원군은 1866년 병인양요에 임해서는 프랑스와 박터지게 싸웠지만 그 직전까지도 남종삼을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천주교는 가위 진실된 종교"라고 상찬하며, "(베르뇌) 주교가 확실히 러시아를 막아낼 책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빨리 주교에게 글을 써서 내가 만나보고 싶다고 전하라"며 소개팅을 독촉했을 정도였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과도 연합을 맺고 나라를 보위하는 '조(朝)·불(佛)·영(英) 연합'을 이루는 것이 당시 대원군의 지상 목표였다.

     

     

    절두산 순교지의 남종삼 흉상 / 그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 가운데서 가장 고관이었다.
    남종삼 순교 사적비 / 남종삼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숨겨준 죄 등으로써 체포 투옥되어 고문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그는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르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원군과의 미팅을 회피하고 있었는데,(그는 앞의 편지와 달리 이후의 편지에서는 대원군의 부인 민씨를 '무기력하고 겁이 많은 사람'으로 폄훼하고 있으며 고종의 유모 박씨에 대해서는 '하등 쓸모없는 사람'이라고까지 악평하고 있다) 즈음해서 대원군의 사돈 조기진을 통해 전달된 조선 천주교도의 대표라고 하는 자들의 편지들은 매우 불손하고 대원군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이 편지는 대원군을 심히 불쾌하게 만들었으니 그의 반응을 본 김기호는 불안감에 시골로 도피했을 정도였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뭔가 삐걱거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병인년 벽두인 1866년 1월 남종삼이 역모 혐의로 의금부에 체포됐다. 이어 2월에는 베르뇌가 붙잡혔고, 3월에는 브뤼티니에르를 비롯한 8명의 신부가 줄줄이 붙잡혀 왔다. 의금부에 피체된 그들의 죄는 역모죄였다.

     

    당시는 조선의 조야(朝野)가 황사영 백서(※ 프랑스가 군대로써  조선을 정벌하여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달라는 청원의 편지 글.'천주교도 정난주 마리아의 삶과 프랑스의 침략')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이에 남종삼 역시 동류의 무리로 인정되어 서소문 밖에서 목이 달아났고, 베르뇌 역시 다른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것이 이른바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는데, 이를 주도한 것은 대원군이 아닌 좌의정 김병학을 좌장으로 하는 노론 세력이었다.

     

     

    병인박해 순교지 서소문역사공원에 조성된 모뉴먼트

     

    대원군은 이때 방관한 잘못은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주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만동묘 철폐(1865년)로 인해 노론에 극심한 견제받고 있던 때였는데 천주교에까지 연루되게 된 상황이 밝혀진다면 그야말로 회복할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될 터, 내내 모른 체로 일관했다. 그러다 병인양요에 반발한 로즈 제독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대원군은 결국 쇄국이라는 강수(强手)를 두게 되니,(☞ '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1차 침입') 이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지만 기대했던 조·불연합이 침공으로 나타난 데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를 쇄국으로 내몬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도굴된 이른바 덕산 사건이었다. 덕산 사건은 흔히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 불리며 독일 상인 오페르트(Enst Jakob Oppert)가 통상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남연군의 묘를 도굴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건의 주모자는 그가 아닌 프랑스 신부 페롱(Stanislas Féron)이었다. 그는 1854년 10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57년 3월 조선에 입국해 전도 활동을 지속해 왔는데, 병인박해 때에도 용케(?) 살아남아 조선 천주교회의 회생을 노리고 있었다.  

     

    페롱은 병인양요 때 패한 톈진 극동함대의 3차 공격을 기대했으나 의외의 패전에 기가 꺾인 프랑스는 이후 미온적인 자세로 돌아섰던 바, 어쩔 수 없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권력자 대원군 부친의 유골을 탈취해 협상을 하자는 것이었으니, 이는 조상을 신주로써 사후로도 애오라지 모시는 조선의 신앙적 풍습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 그는 이 일에 대해 상당 기간 숙고한 것으로 보이니, 1867년 5월 15일 파리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다 "저는 꽤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궁리하던 계획이 하나 있습니다. 미친 짓이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계획은 피 한 방울 흘림 없이 소기를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는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가능한 일이며 또한 매 쉬운 일입니다 "라고 썼다. 

     

    1868년 4월, 상해로 돌아간 그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 도굴단을 꾸렸다. 그 도굴단에 참여한 사람은 조선과 통상하여 독점적 이익을 누리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는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그는 이미 조선과 두 번의 통상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탕주의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F. H. Barry Jenkins)와 그가 고용한 중국인 부랑인 등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는 병인양요 때 중국으로 도망 온 조선인 신자들도 끼어 있었다.

     

    ~ 최선일(최지혁), 심순여, 김학이, 송운오, 박복여, 이성집, 이성의 등 7명으로, 이중 6명이 도굴 원정에 참여했고, 그들 중의 최선일, 심순여, 김학이 3인은 병인양요 때에도 향도로써 프랑스군을 도운 자들이었다. (☞ '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2차 침입')

     

    ~ 오페르트는 1880년 독일에서 출간한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이라는 책에서 "남연군 묘 도굴은 조선인과 프랑스 신부 페롱이 주도한 것으로 자신은 단지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을 폈으며, 페롱이 자신에게 "이 계획은 대원군을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로 인해 조선의 어느 개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말로 꼬셨다고 술회했다.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번역본도 나와 있다.
    조선에 대해 의외로 깊은 식견을 지녔던 오페르트

     

    기선 차이나호와 소선 크레타호로 상해를 출발한 원정단은 1868년 5월 9일 아산만에 당도했고, 그곳에서 크레타호로 갈아타고 이튿날 남연군의 묘가 가까운 덕산 구만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의 길안내로써 가야동으로 잠입해 남연군의 묘를 팠으나 관을 둘러싼 단단한 암반과 회벽(灰壁)에 막혀 밤새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다 아침에 이르러 소문을 들은 관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자 도망을 갔고 5월 11일 다시 구만포를 거쳐 상해로 돌아갔다.

     

     

    남연군 이구의 묘

     

    앞서 '종의 기원(II)'에서 말한 것처럼 예산군 덕산면 가야동의 남연군 묘는 그 아들 이하응(흥선대원군)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날 큰 길지'라는 지관 정만인의 말에 홀려 그 자리에 있던 절을 불태우고 아비의 무덤을 조성한 곳이었다. 그만큼 흥선대원군은 무덤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니, 경기도 연천에 있는 예전 무덤 속 관을 상여에 실어 무려 500리가 넘는 길을 왔다. 그리고 이장을 한 후에는 반죽한 백회 몰타르로 두꺼운 회벽을 만들었던 바,(수만 근의 쇠를 녹여 부여 사토·莎土했다고도 한다) 아무리 도굴꾼의 쪽수가 많아도 깰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신부 페롱이 주도한 이 도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그 비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오페르트는 아예 독일로 돌아가 잠적하고, 젠킨스는 다른 미국인에 의해 고발되었으며,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되었다가 인도의 퐁디세리로 전임되었다. 이에 대한 대원군은 분노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는데, 천주교도인 조선인 협력자가 있었다는 말에 더욱 뚜껑이 열렸다. 이에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소탕령이 내려졌던 바, 750명의 신자가 체포되어 이중 251명이 마포 잠두봉과 해미읍성 등지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잠두봉은 천주교도의 머리가 잘린 산이라 하여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절두산에서 잘린 천주교인의 목과 시신은 절벽 아래 한강으로 던져졌다. 1966년 천주교회에서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성당은 2000년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절두산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위해 절두산 성지에 2000년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졌다. / 형구인 칼과 잘려진 머리와 순교자들을 형상화하였다.
    천주교 해미읍성 성지 /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1872년까지 6년간 이어진 박해기간 동안 천주교도 1,0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처형 또는 생매장 되었다.

     

    임금의 할아버지 유해를 볼모로 삼아 신앙의 자유를 얻어 포교하겠다는 페롱의 비정상적 행위에 모두가 동조한 것은 아니었으니, 조선인 천주교도 중에서도 반대자가 있었고 강압적으로 도굴에 참여한 자 중 2명은 조선 땅에 당도하자마자 도주하였다. 그리고 주중 프랑스 랄르망 공사는 1868년 6월 22 상해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해적질이며 추후 사법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르모니에 신부 역시 "상해에 있는 신부들 모두가 놀라고 괴로워하고 있다"며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고 반성했으며,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했던 리델 신부는 덕산 사건이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분통 어린 편지를 썼다.

     

    "1866년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선 조정은 유럽 선교사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집주인이나 영향력 있는 남자 교우들만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1868년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으로..... 대원군이 천주교를 증오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도굴 사건 당시 페롱 신부는 상해의 조선인 교우들이 가담하기를 원치 않자 강제로 그들을 배에 태웠고 하선할 때도 권총 소지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자 개머리판으로 교우들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여자 교우들은 순교의 행복도 누리지 못한 채 외교인의 첩이나 노비가 되어 팔려갔고 이후 박해는 5년간 지속됐으며, 부친의 묘 도굴 사건으로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격화된 대원군은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1877년 12월 6일 델페슈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선교사 칼레ㆍ마르티노ㆍ리샤르 신부 등도 페롱 신부의 무모한 행동이 박해를 가중시켰다며 그의 재입국을 반대했다. 1869년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주교는 싱가포르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롱 신부에게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도 퐁디셰리 선교지 주교가 신부님을 받아들였으니 그곳에서 성직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덕산 사건 이후 대원군은 박해와 쇄국에 가일층했고 정적인 안동김문에서도 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아까지 않았다. 하지만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여 천주교 및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허락한 이후 페롱은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활보했다. 페롱은 1900년에는 박해기간 동안의 순교자들을 복자위에 올리는 심사인 시복재판에 참여하고, 자신의 사제수품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페롱의 헛짓으로 인해 죽은 조선의 천주교인은 최소 251명이었다. 뭔가 뭔지 알 수 없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구한말이었다. 

     

     

    1900년 4월,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 증언을 위해 방한한 페롱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환담하고 있다.
    1900년 5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페롱 신부 사제수품 50주년 행사 후 사제단이 기념 촬영했다. / 사진 앞줄 가운데가 페롱 신부
    흥선대원군의 흔적인 종친부 / 대원군은 집권 후 안동김문에 눌렸던 왕실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왕의 친족 기구인 종친부의 세력을 강화시키고 1866년 302칸의 종친부 건물을 새로 지었다.
    종친부는 경복궁 건춘문 맞은 편에 위치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경복궁이 헐릴 때 종친부도 대부분 헐리고 경근당과 옥첩당만 살아 남아 여기저기 옮겨다니다 2013년 원래 위치인 국립현대미술관 관내로 이건되었다. 두 건물은 2021년 12월 23일 보물로 지정됐다.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 / 임진왜란으로 불탔던 것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65년(고종 2) 재건됐다. 흥선대원군이 야심차게 중건시킨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다시 헐리는 비운을 맞으니 건춘문은 이때 사라진 광화문을 대신해 경복궁의 정문으로 사용되며 영욕의 세월을 지켜보게 된다.
    보신각 척화비가 있던 곳 / 결과적으로 천주교는 조선의 개국을 크게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후로도 천주교는 계속 조선에 있어 암(癌)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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