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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12 반란군에 맞서 싸운 군인과 그의 유족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9. 24. 06:54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에 대해서는 '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 등에서 숨은 비화를 조명하며 당시의 상황을 반추해 보았지만, 19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12·12 군사반란'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에서 잠깐 거론한 후, 기록이 정리되는 대로 포스팅하겠다며 물려놓았다. 그런데 그 후 여태까지 포스팅을 하지 못했다. 

     

    반란군이었던 똥별들의 어찌됐든 역사적 기념사진

     

    이유는 간단했으니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진행됐던 재판 과정을 통해 그 실체가 낱낱이 밝혀졌던 바, 내가 따로 포스팅할 무엇이 없었다. 그리고 12월 12일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 역시 여러 기록과 드라마 등을 통해 조명되어 어떠한 초점으로도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5.16처럼 숨겨진 비화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더라는 얘기다. 다만 비화랄 것은 없지만, 반군 세력에 맞서 싸웠던 진압군 측의 군인들과 그 유족들이 처해야 했던 상황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상황이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그대로 '2·12 군사반란'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그들 쿠데타의 걸림돌이 되는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공수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사령관 등을 체포한 하극상 사건을 말한다. 이후 하나회 세력은 대한민국의 전권을 장악하였던 바,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었고 나머지 세력들도 모두 고관대작이 되어 호의호식 속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살게 된다. 

     

    그날 12월 12일, 반란군과 진압군은 크게 충돌할 수는 있는 상황이었다. 서울 진입이 가능했던 1 · 3 · 5 · 9공수여단 중 1 · 3 · 5공수여단장은 반란군인 육사출신 하나회 세력이었던 반면, 9공수여단장은 갑종출신 비하나회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충돌이 일어나 도심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었다. 이에 하나회 측은 야로를 부려 서로 간의 희생을 막자며 상호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기도 합의를 본다.

     

     

    특전사의 진압군(왼쪽)과 반란군 세력

     

    하지만 말한 대로 이것은 술수에 불과하였으니, 9공수가 신사협정에 따라 원대복귀를 하자 반란군 측에서는 재빨리 1공수를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하고,(유혈충돌 발생함) 3공수는 중앙청, 5공수는 효창운동장에 집결한다. 이때 전방부대인 노태우 사단장의 9사단과 이상규 여단장의 제2기갑여단 휘하 제16전차대대도 중앙청으로 진격하고, 박희모 사단장의 30사단은 고려대로 출동한다.

     

    박희도 여단장의 1공수는 원래 부마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부산에 가 있었다. 전두환은 그런 박희도를 불러 올려 반란에 투입한 것인데, 1공수를 출동시킨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다시 3공수여단장 최세창으로 하여금 직속상관인 정병주 공수특전사령관을 체포하게 한다. 이에 최세창은 박종규 대대장을 거여동으로 보내는데, 이때 거여동 사령부에서 반란군을 막던 사령관 부관 김오랑 소령은 6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하고, 정병주 사령관 역시 부상을 입고 체포된다.

     

     

    황영시 1군단장의 명령으로 출동한 제2기갑여단
    중앙청 앞의 반란군 부대. 12.12군사반란의 상징과 같은 사진이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묘사된 만화
    고향인 김해 삼성초등학교 앞 공원에 세워진 흉상
    월남에서의 정병주(왼쪽) 장군과 전두환(가운데)
    정선엽 병장의 묘. 당시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는 "2·12 사태 와중에 총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는데, 이중 김오랑 소령, 헌병대 정선엽 병장, 박윤관 일병이 사망자였다.

     

    이후 대세는 반란군 쪽으로 기우니 장태완 수경사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윤흥기 9공수여단장이 체포되고,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도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피체된다. 이렇게 반란이 성공하자 그들은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 앞마당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위 사진) 본격적으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들어간다. 이후 전두환은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그것이 불과 40년 전의 일이고 장본인이 아직 살아 있음에도 마치 아득한 옛 일처럼 여겨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진압군 측에 섰던 장군들은 체포된 후 고문을 당하고 대부분 강제 예편됐다. 이에 말년이 편할 수가 없었는데, 특히 정병주 장군은 강제 예편된 이후 12.12 반란의 부당성을 주장해오다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1989년 봄, 송추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변사체로 발견된다. 검시 결과는 자살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님은 그동안 12.12 반란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싸워온 점, 그리고 자신의 부관 김오랑 소령의 부인이 남편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눈이 멀었을 때 그녀를 찾아가 여기서 쓰러지지 말고 진상 규명을 위해 함께 싸우자고 격려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

     

    김오랑 소령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사하였고, 시력약화증을 앓던 부인 백영옥 여사는 말한 대로 눈이 멀었다. 그 후 백영옥 여사는 연금과 전화 상담원 일로 생계를 영위하며, 남편을 상신해 중령 계급을 추서받았다. 그리고 정병주 장군의 사후에는 주위 사람에게 그 뜻을 잇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실제로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했다) 그녀마저도 1991년 6월 자신이 살던 숙소에서 추락사하였다.(정병주 장군의 경우는 자살로, 백영옥 여사는 실족사로 결론 내려졌다)

     

    진압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장태완 수경사사령관은 직속부하인 장세동 대령이 일찌감치 배신을 때렸고, 마찬가지로 하나회 멤버였던 부하에 의해 체포되어 보안사로 끌려갔다. TV뉴스를 통해 자식이 끌려가는 모습을 본 시골의 아버지는 그날 이후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 마시다가 1980년 4월 세상을 등졌다. 아들 역시 비운의 죽음을 맞았으니 1982년 2월 낙동강변 야산 할아버지 묘소 옆에서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아들 성호 군은 당시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수재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하지만 시대의 불행을 비껴가지 못했다. 장 전 사령관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죽은 아들의 코와 입 등에 꽉 들어찬 얼음을 모두 혀로 녹여냈는데, 예전에 그의 회고록 읽다 "자식의 얼굴을 녹여 빨던 중 빠진 눈알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는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져 더 이상 읽지 못한 기억이 있다.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두 달간 문초를 당했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예편되었다. 이후 가택연금 등의 고초를 겪다 문민정권이 들어선 후 재향군인회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2.12 진상 규명에 앞장서다 2010년 7월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리고 2년 후인 2012년 1월, 그의 부인이 자신이 거주하는 강남구 대치동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자택에서는 "미안하고 고마웠다. 오래오래 살아라"는 내용의 딸에게 보내는 유서가 발견되었던 바, 사별한 뒤 홀로 지내며 우울증을 알던 부인이 뒤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말년의 장태완 장군. 그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장관의 직무 유기(반란 진압 명령을 회피한 것)가 12.12 성공의 가장 큰 이유였다고 말했다.
    2013년  8월 17일 지병으로 별세한 윤흥기 장군.(향년 80세) 12·12사태 당시 제9공수여단장이던 윤흥기 준장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으로 신군부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가 신사협정에 따라 회군했다. 1993년 7월 정승화 예비역 대장 등과 함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12 세력 34명을 반란죄 등으로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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