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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민족 선비족과 수·당제국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6. 8. 08:06
앞서 말한 대로 북위(北魏)는 효문제 사후 동서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후 동위(東魏)는 고양이 건국한 북제(北齊)에 의해, 서위(西魏)는 우문각이 세운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화북은 다시 북주에 의해 통일되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쳐들어온 얘기를 '북주를 격퇴한 우즈베키스탄 혼혈아 온달'에서 다룬 적 있고, 대륙의 남북 대치 상황이 북주 출신의 양견이 세운 수나라에 의해 종식되는 과정을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2 - 진나라 마지막 황제 진숙보'에서 자세히 그린 바 있다.(거기서 탤런트 장서희 양이 등장한다 ㅎㅎ)
통일을 완성한 수나라는 앞서의 북제처럼 고구려까지 먹으려드나 마찬가지로 실패하고, 결국 수양제의 무리한 외정(外征) 및 대운하 건설로 인한 재정 피폐 등으로 이연이 세운 당(唐)나라에 의해 건국 38만에 멸망하게 된다.(619년)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온달과 진나라 황제 진숙보를 제외하고는(남조는 한족이 세운 왕조이니 그는 당연히 한족이다) 한결같이 선비족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족이라 착각하고 있는 당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 역시 선비족이다.
그들이 선비족이라는 것은 당대의 권력가들이 모두 선비족이었다는 방증인데, 그럼에도 중국식 성씨를 사용함은 앞서 언급한 대로 효문제가 귀족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중국식 성씨를 하사했기 때문이다.(효문제 자신도 탁발씨에서 원씨로 바꿨음을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와중에도 문벌귀족인 토욕혼씨(吐谷渾氏)·하약씨(賀若氏)·우문씨(宇文氏)·모용씨(慕容氏) 등의 이른바 '관롱집단'*들은 끝까지 이에 반대해 씨족명인 자신들 가문의 성씨를 유지하였으나, 그밖의 귀족들과 평민들의 성씨는 중국식으로 바뀌니 120개 이상의 복성(複姓)이 단성(單姓)이 된다.
* 관롱집단(關隴集團)은 중국 역사가 천인커(陳寅恪)가 제시한 개념으로 남북조시대의 서위, 북주에서 수·당제국에 이르는 기간 동안 관중(關中, 현재의 산시성)과 농서(隴西, 현재의 간쑤성 동남)에 본적을 둔 문벌세족을 가리킨다. 당고조 이연 역시 달도씨(達闍氏)의 관롱집단 출신으로 그의 본관으로 알려진 농서 이씨는 자신의 출신지 농서를 붙인 것이었다. 이(李)는 달도의 한역(漢譯)이라고 함.
* 북위에서 갈라진 동위·서위·북제·북주의 분화 및 수·당제국의 출현을 관롱집단의 권력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효문제는 단지 사성(賜姓)에 그치지 않고 한족과의 결혼도 장려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장려의 성격을 넘어선 강제적 명령 수준이었는데 그럼에도 당시 선비족들은 피지배층인 한족을 멸시하여 결혼을 꺼렸다. 특히 명문귀족들은 더 하였으니 일례로 수문제 양견과 당고조 이연의 집안도 철저하게 자기 나라 사람(선비족)을 고집하였던 바,* 만일 왕자 중 누군가가 사랑을 택해 한족과 혼인한다면 오늘날의 영국 해리 왕자(Prince Harry, Duke of Sussex) 사건이 날 게 뻔했다.(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당고조 이연(달도연)의 할아버지 달도희는 장손(長孫)씨를 가진 탁발 선비족의 여자와 결혼했고, 아버지 달도천석 역시 독고씨를 가진 선비족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이연 자신도 황실 탁발씨의 일족인 두씨(竇氏) 집안의 여자를 맞았으며, 아들인 이세민도 장손씨의 선비족 여자와 혼인했다. 그렇게 보면 당나라의 뿌리는 그야말로 순혈의 선비족으로 한족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셈이다. 이후로도 당 황실은 선비족속끼리만 통혼했다.
하지만 효문제의 민족통혼 드라이브가 워낙에 강력했고, 훗날의 수·당제국의 뿌리가 되는 서위와 북주(北周)는 선비족 체제가 유지된 동위와 북제(北齊)보다 개방적이어서 이민족 간의 결혼(특히 선비족과 한족의 결혼)이 많이 이루어졌다. 까닭에 수·당제국 황실의 정체성은 요즘도 심심찮게 중국학자들의 시비거리가 된다.
☞ 이원길은 부상을 당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이세민 군의 대장 울지경덕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다. 이 울지경덕 또한 선비족으로 명문 울지(蔚遲) 가문 출신인데,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울지 성을 가진 선비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기원된 연유이기도 하다.(☞ '다민족 다문화 국가 고구려')
순혈의 선비족 황실은 수나라도 마찬가지였으니, 수나라를 건국한 수문제 양견은 본래 보육여견(普六茹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선비족이었고('보육여'가 성이다) 아내도 독고씨의 선비족이었다.(당고조 이연 어머니의 동생, 즉 이연의 이모가 바로 수문제 양견의 아내인 독고가라이다) 또한 수양제의 아명은 보육여아마(普六茹阿摩)이며 아내인 양민황후는 소씨(蕭氏)인데 소씨가 선비족의 성씨라는 명확한 자료는 없으나 요나라(거란) 대부분의 황후들이 소씨인 걸 보면 소씨 또한 북방민족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나라는 대외적으로 선비족 우선 정책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비족, 흉노족, 한족, 위구르족, 티벳족 등 여러 민족이 융합된 다민족 다문화의 국가를 지향했으며 그들의 문화도 존중했다. 이에 당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중 가장 인터내셔널한 왕조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것은 그들 대당제국의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지금의 중국이 지향하는 한족 중심의 중국몽과는 거리가 있는 바,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의 중국몽은 오히려 국력의 저하와 나라의 분열을 초래할 여지가 있다 하겠다.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백제 유민인 흑치상지, 그리고 신라인인 최치원 등은 코즈모폴리턴으로서 이름을 떨친 경우로 이것을 보더라도 당나라의 개방적인 대내외 정책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 '안사(安史)의 난'으로 인한 쇠약을 가져오기도 했으니 소그드족 출신의 안록산에게 평로(平蘆)·범양(范陽)·하동(河東)의 무려 3개 진(鎭)을 다스리는 절도사의 자리를 맡겼고, 돌궐 혼혈아 출신의 사사명 또한 실세로서 안록산·사사명·사조의(사사명의 아들)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대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 안록산과 사사명의 이름을 합쳐 부르는 '안사의 난'은 거의 10년간이나 지속되다(755~763) 763년 사조의가 죽음으로써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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