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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주(北周)를 격퇴한 우즈베키스탄 혼혈아 온달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1. 4. 2. 01:23

     

    구한말 학자 창강(滄江) 김택영은 나라가 망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며 조선의 역사를 집필하였던 바, 이 같은 행적이 단재 신채호와 유사하다. 단재의 경우는 요즘 말하는 진보적 사관으로, 고려 묘청이 외친 서경(西京, 평양) 천도론을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평가한 문장은 유명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이 말은 단재의 진보적이고도 독특한 사관을 대변한다.  

     

    반면 창강은 <역사집략(歷史輯略)>, <한사(韓史)>등을 통해 담담한 시각으로써 한민족의 역사를 중국에 알리는 일을 했는데, 그 역시 독특하게도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온달전(溫達傳)'을 조선 오천 년 이래 최고 명문장으로 꼽았다.(문장의 짜임새 등, 글 자체가 훌륭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울러 우리 역사의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중의 하나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이에 대한 관심을 많이 나타냈는데, 그 이유가 온달이 중국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는 내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간 ('바보'만 조명되고) 간과되었던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치자 왕(평원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벌에서 맞서 싸웠다. 온달이 그 선봉을 맡아 힘을 다해 싸우니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이에 그 여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이기니 전공을 논함에 있어 온달을 첫 번째로 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길 "이자는 나의 사위다"하며 예로써 온달을 맞이하니 대형(大兄)의 작위를 주었다. 이로부터 온달은 왕의 총애를 받으니 위엄과 권세가 날로 더해졌다.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一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寵榮尤渥 威權日盛

     

     

    남북조 시대 말기 지도(560년). 북주의 재상 양견(楊堅)이 598년 중국을 통일한다.
    배산벌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보정시 배산촌(사진출처: map.qq.com)

     

    위 <삼국사기> 기록의 후주(後周)는 북주(北周, 557-581)를 말하는 것으로 북주는 3대 황제인 무제(武帝, 재위 560-578) 때 북제(北齊)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다.(577년) 무제는 그후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한 후 병사하고, 아들인 선제(宣帝, 578-579)가 제위에 올랐으나 실정을 거듭하다 이듬해 죽었다. 이어 5대 황제 정제(靜帝)가 제위에 올랐으나 어린 나이였던 까닭에 외척이던 수국공 양견(楊堅)이 섭정하며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581년에 양견에게 선위하니 북제는 멸망하고 수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이 양견이 수문제(隋文帝, 제위 581-604)로 문제는 598년 남조(南朝)의 마지막 나라였던 진(陳)을 명망시키고 오랫동안 갈라졌던 중국 땅을 통일시킨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에 쳐들어오게 되는 바,(589년) 바야흐로 4차에 걸친 여·수(麗·隋: 고구려와 수나라) 대전쟁이 개막된다. 이렇게 볼 때 북주의 고구려 공격은 여·수대전쟁의 서막이었던 셈인데, 그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사람이 평원왕(平原旺, 재위 559-590) 휘하의 온달이었다.

     

    그 온달은 잘 알려진대로 '바보'였다. 그 바보가 마누라의 도움으로 똑똑해져 북주의 공격을 물리친 영웅이 되고 부마까지 오르게 되는 바, 중국인들은 이 스토리가 더욱 남달랐을지 모르겠다. 이 '바보온달 스토리'는 초등학생들도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새삼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바보가 영웅이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니 혹자는 그것을 설화로 여기기까지 한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한 탓이다. 

     

     

    온달과 평강공주가 주인공인 드라마 '달이 뜨는 강'의 포스터

     

    그런데 이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이며 인터내셔널한 스토리라는 주장이 2012년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한·중앙아시아 국제학술회의에서 나왔다. 그것을 주장한 사람은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명예교수로, 그는 "온달은 당시 강국(康國)이라 불리던 소그디아의 왕족 출신이 고구려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는 설명을 폈다. 즉 <삼국사기> 온달전의 '온달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웃음거리가 됐다'거나(容貌龍鍾可笑)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다녔다'는 기록은 "신분 질서가 엄한 고구려에서 오늘날 다문화 가정 출신 자녀가 겪은 것과 같은 어려움을 묘사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나아가 지배선 교수는 학회지(백산학회지)를 통해 자신의 '소그디아인 온씨 학설'에 온군해를 추가했다. <삼국유사> '진덕왕본기(眞德王本紀) 2년 기사'에 나오는 "김춘추를 호위하며 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갓과 옷 차림'으로 위장, 고구려 병사의 칼을 대신 맞고 죽은 온군해도 바로 소그디아 출신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지 교수는 두 온씨가 소그디아 왕족이라는 근거로 중국 사서인 <전당문(全唐文)> 권999 '강국왕오륵가전(康國王烏勒伽傳)', <북사(北史)> 권 97 '강국전(康國傳)', <구당서> 권 198, 위서 관씨지에 실려 있는 '소그디아는 강국(康國)이라 불렸으며 그 왕족은 온 씨'라는 기록을 들었다. 지 교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백제의 사서, 중국 사서에서 온 씨는 오로지 소그디아에만 존대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소그디아인의 기질에 대해서는 현장법사(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도 나타나 있는 바, "이곳 왕들은 호탕하고 용맹하다. 대부분 용사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투할 때 그들 앞에 맞설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또 <신당서(新唐書)> 권 221 '강전(康傳)'에 "남자 20세가 되면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으면 안 가는 나라가 없었다"고 쓰여있다고 한다. 즉 그러한 소그디아인들이 국제적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온달과 온군해가 등장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배선 교수가 증거로 든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신. 강국(康國)과 고구려와의 상호교류를 증명한다.
    지 교수가 또 다른 증거로 든 경주 원성왕릉 석상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대 복식사 연구자가 무인상의 허리띠 위로 드리운 복장, 포체테(산낭)라 불리는 작은 뒷주머니가 전형적인 소그디아 스타일임을 확인했다"고 함
    소그디아 위치
    원성왕릉의 석상들
    수나라 시대 소그디안 피규어(파리 샤뉴니 박물관)
    당나라 시대, 낙타를 탄 소그디아 상인 피규어(중국국가박물관) 
     당나라 시대, 등짐을 맨 소그디아 상인 피규어(미국 필라델피아 박물관) 
    당나라 시대, 등짐을 맨 소그디아 상인 피규어(2018 뉴욕 크리스티 경매소) 
     우즈베키스탄의 알리세프 박사(역사학)는 “고대 무역사에 따르면 소그디아인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까지 미쳤을 것”이라며 “고구려가 소그디아로 사람을 보냈으니 소그디아인이 고구려에서 결혼해 온달을 낳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으며, 카자흐스탄의 코지로바 바시에브나 박사(역사학)도 “고대무역 연구에 따르면 소그디아가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와 거래한 기록들이 나온다”고 말했다.아래 사진 왼쪽부터 코지로바 카자흐스탄 유라시아 대학 교수, 지배선 연세대 명예교수, 알리세프 우즈베키스탄 고등교육부 산하역사연구소 위원, 미나라 키르키즈 대학 교수(출처: 중앙일보)
    2017년 경주 월성 유적에서 발견된 소그디아인 토우

     

    이상의 지배선 교수의 주장은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 있다. 다만 온달이 왕족이라는 주장은 조금 (어쩌면 '많이') 무리가 있으니,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궁벽한 삶에 다 떨어진 옷에 해진 신으로 다니는 온달의 처지와는 매치가 안 된다. 아무리 이민족이라 해도 고구려가 한 나라의 왕손인 그를 그렇듯 빈한하게, 그리하며 천시받게 놔두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궁벽한 삶을 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만족시키려면 장사꾼인 소그디아인 아버지와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서, 아버지로부터 버려졌거나 또는 전사(戰死)한 소그디아인 용병의 자식 쪽이 더 어울린다. 강국(康國) 왕족의 성씨가 온 씨라고 해서 평민 중에 온 씨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 씨가 모두 왕족이나 귀족은 아니듯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고구려는 551년(양원왕 7년) 남북으로 위기를 맞는다. 그때는 앞서 말한 고구려와 돌궐이 동맹을 맺기 전으로(☞ '고구려의 외교력을 보여주는 퀼 테긴 비문')으로, 북으로는 발흥하는 돌궐이 쳐들어오고 남으로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여 침입해왔다. 이때 북부전선에서는 고흘(高紇)이 분전하여 백암성 전투에서 돌궐군 1천 명을 척살하고 3천 명을 포로로 잡는다.(하지만 남부전선은 여의치 않았으니 백제에게 6군, 신라에게 10여 군을 빼앗겨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된다)

     

     

    요녕성 등탑시 백암성

     

    온달의 아버지는 이때 사로잡힌 소그디아 출신 돌궐 병사일 수도 있다. 그 후 고구려군에 편입되었고 어찌어찌하다 고구려 여인과의 사이에서 온달을 낳았으나 이후 다시 전장에 나갔다가 전사하였거나 병사했을 수도 있다. 요즘 사정으로 말하면 다문화 가정에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된 모양새이니 가난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차상위계층 가정의 아들과(게다가 바보다)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가 결혼했다는 것이다.

     

    옛날과 같은 신분제 사회가 아닌 요즘도 재벌가 자제와 평민(?)의 결혼은 큰 화제가 된다. 흔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삼국사기> 온달 전의 내용이 실화일 수 있을까? 다분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결혼이 성사되고 와이프 덕에 똑똑해져 마침내는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온달 스토리를 믿고 싶다. 그래서 다음 회에는 그 전개 과정 및 온달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서 피력하려 하는데, 여기서 우선 단서 하나를 던지고자 한다. '소년 온달은 여러모로 불우했지 성격은 밝고 명랑하였다.'(溫達中心則𣈑然)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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