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폭풍 속을 뚫고 맺은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1. 3. 25. 06:55

     

    지난 3월 16일 오후, 전날 몽골 초원에서 발생해 약 600명의 실종자를 냈다는 강력한 모래폭풍의 위력을 실감할 기회가 있었다. 내내 나쁜 시야가 불편하다 싶었고 눈 속의 이물감도 불편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 거울을 보니 눈이 충혈돼 있었다. 얼굴도 마스크를 한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색이 달랐다. 황사 먼지가 달라붙은 탓이었으니, 코로나로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망정이지 입 안에도 흙먼지가 날아들 뻔했다. 아무튼 그날의 황사는 외신도 주목을 했다. 

     

    youtu.be/qaan1wMGnN0

    이 모래폭풍이

    중국 베이징을 거쳐

    Powerful dust storm blankets almost all of South Korea

    Yellow dust storm forces citizens across country to confine to homes, workplaces

    16.03.2021. 우리나라에 도착했다는 거!

     

     

    뉴스에서는 기후 변화로 인한 몽골 초원의 사막화가 이와 같은 극심한 황사를 일으킨다고 떠들지만, 전문 기상학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몽골의 기후는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변화가 없어 과거에도 겨울은 극심하게 추웠으며, 최난월인 7월 평균 기온도 요즘처럼 평균 16.9도로 서늘했을 것이며, 봄이면 편서풍에 기인한 극심한 황사 바람이 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13세기 중반에만 세계의 이상고온 현상으로 몽골 역시 1˚C 이상 기온이 올랐고, 그것이 칭기즈칸의 거병과 그 후예들의 활발한 정복활동을 도왔을 것이라 말한다.   

     

     

    믿기지 않는 몽골의 겨울 기온

     

    그렇다면 앞서 '고구려의 외교력을 보여주는 퀼 테긴(闕特勤) 비문'에서 말한 영양왕 때의 고구려 사신은 이 모래폭풍을 뚫고 돌궐의 수도 오르드 바르크까지 왔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강국(康國)의 사마르칸트까지 갔을 것이다. 고구려인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말(韓末)과 달리, 그래서 망국의 비운을 맛봐야 했던 후예와 달리 세상을 넓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었고, 더불어 위와 같은 역경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배포가 있었기에 강국으로써 중국과 맞짱을 뜨며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한   오르드 바르크(■)와 사마르칸트(●)
    2019년 4월 우즈베키스탄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박물관에서 벽화 속에 등장하는 7세기 바르후만 왕의 즉위식에 참석한 고구려 사절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그와 같은 고구려의 발자취는 앞서 말한 퀼 테긴의 비문 외에도 4대 황제 빌게 카간(毗伽可汗, 위 716-734))의 비문에도 남아 있다. 제2 돌궐제국의 가장 위대한 카간으로 칭송받고 있는 그의 비문에는 돌궐이 "무크리(고구려)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는 고구려가 이미 망한 때였음에도 망국 후 돌궐로 대거 유입된 고구려 유민들에게 돌궐과 고구려가 전통적 맹방(盟邦)이었음을 천명한 것이다.

     

    그밖에도 고구려와 돌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사례는 의외로 많은데, 앞 글에서 얼굴까지 소개했던(^^)  2대 황제 카파간 카간(默啜可汗)은 특히 고구려 친화적 인물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는 고구려 유신(遺臣)인 고문간(高文簡)과 고공의(高拱毅)의 망명을 받아주었고 고문간을 부마로 삼기까지 했다. 또 고공의에게는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이란 직함을 내려 고구려 유민을 이끌게 하는데, 그 직함으로 볼 때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대수령이란 직함을 가진 사람으로는 고정부(高定傅)라는 이름도 보인다.   

     

     

    몽골역사박물관(호쇼차이담 박물관)의 빌게 카간 비. 사진 속의 러시아 학자가 가리키는 곳이 고구려와의 동맹 기록 부분인 듯. 735년 건립됐다.
    비문의 돌궐 문자
    몽골역사박물관의 빌게 카간 비문과 퀼 테긴 비문

     

    고문간은 카파간 카간의 딸 아사나씨(阿史那氏) 공주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는데, 그 아들인 고무서 또한 장성한 후 퀼 테긴의 사위가 되었고, 돌궐의 행정관으로서 돌궐에 정착한 많은 고구려 유민들을 관리한다. 재미있는 것은 고무서의 딸이 토번의 왕비가 되어 출가했다는 내용인데, 고무서의 딸이라기보다는 고문간이 낳은 1남 1녀 중의 여식으로 여겨진다. 앞서 말한 대로 돌궐은 빌게 카간 재위 시절 톤유쿡(暾欲谷)이라는 명재상이 나라를 크게 부흥시키나 이후로 급격히 기울어져 불과 63년 만에 망하게 되는 바, 3대(代)를 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재미있다고 한 것은 그렇게 되면 토번은 고구려와는 사돈의 나라가 되기 때문인데, 다만 고구려는 돌궐처럼 부활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고구려가 부활하지 못한 이유는 우선은 당나라의 대(對)고구려 유민 정책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이니 그 유민들을 영주, 요서, 내몽골 지역 등으로 분산 이주시키고 멀리는 남방의 귀주성까지 강제 이주시키는 상황에서 건국을 꿈꾸기는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그럼에도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 내막에 대해서는 앞서 논한 바 있다. ☞ '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 III-고구려의 후예 묘족')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로

     

    부활이 힘들었던 다음 이유로는 마땅히 유민들을 이끌었어야 할 연개소문의 핏줄들이 대부분 당나라로 투항하여 호의호식했기 때문이니, 그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인 천남생(泉男生) 천남산(泉男産) 천헌성(泉獻誠) 천비(泉毖) 등의 묘지명이 1922년 이후 중국 땅에서 속속 발견되었다. 그들 민족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논하기로 하겠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장남 천남생(연남생)의 묘지명이 1922년 1월 20일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북쪽 교외에서 출토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당나라로 투항한 남생은 관직과 녹봉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았으며 고구려 유민들의 감시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와 돌궐과의 친연성은 물경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어지는 듯하니 바로 터키 공화국과의 관계다. 터키의 국부(國父)라 불리는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돌궐이 터키 조상이라고 강조했고, 559년 돌궐이 중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까지 했는데, 1959년 압델 멘데레스 대통령 체제에서도 돌궐 승전 14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수도 앙카라 가지대학(gazi üniversitesi)에는 위 빌게 카간 비의 복제비도 세워져 있다.  

     

    앙카라 가지대학의 빌게 카간 복제비

     

    또, 그래서인지 우리는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데,(우리뿐 아니라 터키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터키가 과거 한국전쟁 때 4차에 걸쳐 많은 병력을 파견한 이유도 형제의 나라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이건 좀 생각해볼 문제다. 과거의 인연을 따져 한국이 형제의 나라였다 말한다면 북한 역시 형제의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건 아니고, 터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건 오스만 제국 이래로 러시아와는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한국 침략의 배후에 소련이 존재함을 알았기에 적극적인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 당시 터키는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 4천936명의 병력을 파병했으며 최전선에서 용감히 싸워 미군 8사단과 함께 가장 먼저 북진해 청천강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1950년 11월 27일, 기습 참전한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터키 여단은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놀라운 분전으로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미군 보병2사단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완강한 저항선을 구축하며 중공군 공격을 지연시켰던 바, 다른 유엔군 부대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군우리 전투'다.

     

     

    용인시의 터키군 참전비
    터키의 한국전쟁 참전기념탑과  미남 터키 군인

     

    어찌 되었든 고마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1999년 터키 대지진* 때 한국의 지원이 너무 인색해(정확한 것은 아니나 성금이 최빈국 방글라데시보다 적었다고) 터키 국민들이 크게 섭섭했었다. 그래서 실제로 "이제는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지 말자"라는 말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나돌 정도였으나, 다행히도 2002년 한일 월드컵 3,4위전 당시 (공교롭게도 한국과 터키가 붙었다) 아래의 이벤트 한 방으로 풀렸다. 이때 터키 국민들은 잠실운동장 관중석 반을 점유한 대형 터키 국기의 출현에 깜짝 놀랐고 감격했으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후 양국은 다시 형제의 나라로 돌아갔다. ^^  

     

    * 발생 지역인 터키 이즈미트 지방의 이름을 따 이즈미트 지진이라 부르기도 한다. 1999년 8월 17일 터키 북서부 이즈미트 지방에서 발생한 리히터 7.8의 강진으로, 15,000여 명이 숨지고 25,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 End -

     

    이즈미트 지진의 참상. 전신주에 기대앉은 청년이 실성한 듯 웃고 있다.
     한·터키전 감격의 순간들('호텔&레스토랑' 사진)
    화답하는 터키
    터키 화폐 속의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 화폐는 케말 아타튀르크 일색이나 뭐라 그러는 사람은 전혀 없다.  
     케말 아타튀르크의 영묘 아느트카비르(Anıtkabir) 
    케말 아타튀르크의 기일에 모인 국민들이다. 이럴 대상이 없는 우리로서는 좀 부럽기도 하다. 
    빌게 카간 비는 1889년 러시아 학자 키콜라리 야드리트세브가 발견했으며 발견 당시는 (사진 속의 사진처럼) 뒤에 있는 귀부에 세워져 있었다. 
    퀼 테긴 비문 역시 뒤에 있는 귀부에 세워져 있었다.  

    * 다시 보는 톤유쿡 비문

    톤유쿡은 일테리시 카간, 카파칸 카간, 빌게 카간 3대 황제에 걸친 재상으로, 683년 일테리시 카간 재위시 당나라의 서북지방을 공격하여 독립의 기반을 닦았으며, 698년 카파칸 카간 재위시에는 당나라 하북을 공격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700년 소그드인을 복속시켜 실크로드의 교역권을 장악하고, 720년 빌게 카간 재위시에는 당나라 감주, 원주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로 하여금 화친을 맺게 하였다. 725년 사망했으며 톨강 상류에서 그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톤유쿡 비문은 제 1비문과 제 2비문이 있으며 돌궐 고대문자인 룬(rune) 문자로 적혀있다. 제1제국 때도 돌궐은 소그드 문자를  사용했을 뿐 자체 문자가 없었다. 이에 룬 문자의 창시자가 톤유쿡으로 짐작되기도 하는데 꽤 타당성이 있다. 비문의 내용 중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라는 문구는 매우 유명하다. 콘유쿡 사후 다시는 그와 같은 명재상이 출현하지 않았고 제국은 급격히 기울어졌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