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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국의 영웅이 된 다문화 가정 출신 온달과 아차산성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1. 4. 3. 11:32

     

    온달이 전사한 아차산성

     

    온달에 관해 쓴 글들을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단어가 종종 눈에 띈다. 어떤 글은 친절하게 그에 대한 설명을 달아, 결혼을 잘해 일거에 신분상승을 하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욕망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부른다며 온달도 그 범주에 끼워 넣으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설명이다. 심리학적으로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인격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여성이 남성에게 보호되어 살아가려는 의존심리를 지칭하거나, 억압된 분위기와 불안이 뒤엉킨 여성이 자신의 의욕과 창의력을 발현하지 못하고 일종의 미개발 상태로 남겨두려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 미국의 저널리스트 콜레트 다울링(Colette Dowling)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현대 산업사회에 들어 급격히 표출되기 시작한 미국의 사회현상을 그렇게 지칭했다. 

     

    아마도 그 글을 쓴 사람은 공주와 결혼을 해 일거에 부마가 된 바보 온달의 출세담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듯하나, 사실은 그것도 잘못됐다. 앞서 말했듯 온달은 단지 소그디아(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인 아버지와 고구려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의 아동인 까닭에 외모가 남과 조금 달랐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가난이 부여되었을 뿐 바보나 천치는 아니었다. 그는 장애를 가진 편모슬하에, 지독하게 가난하고 외모가 상이해 다른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던 것이지 천생이 모자란 것은 것은 아니었으니 <삼국사기> 어디에도 그가 바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온달은 그와 같은 환경에서도 장애인 어머니를 봉양하며 밝고 씩씩하게 컸다.(中心則晬然) 그러한 온달 앞에 16살 먹은 처녀 평강공주*가 나타났다. 그는 국왕인 평원왕의 장녀로 어릴 적 울보였다. 이에 만날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는데, 그 말에 세뇌가 되었는지 고(高) 씨 성을 가진 귀족과의 결혼을 마다하고 스스로 궁을 나와 온달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에 온달과 그의 어미는 실색하여 마다하였으나 평강공주는 제 뜻을 굽히지 않고 눌러앉았다.

     

    * 이름이 '평강'이어서가 아니라 평원왕의 시호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인 까닭에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 붙인 듯하다.  

     

    평강공주는 궁에서 나올 때 지녔던 금팔찌를 팔아 집과 밭, 기타 세간살이를 장만하였는데, 그가 온달이 말[馬]을 살 적에 가르쳐준 말은 의미심장하다. "장사꾼이 권하는 말은 사지 말고, 반드시 국마(國馬)인데 병들고 여위어서 내버려진 것을 사도록 하세요."

     

    여기서 평강공주의 현명함과 자신감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고구려가 국가 차원에서 기르던 전투용 말은 민간의 말과는 그 종자가 달랐으니 아래 한(漢)나라의 한혈마(汗血馬)와 같은 명마가 주류를 이루었을 터이다. 고구려 군사가 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말이 시원찮았으면 중국의 여러 강국과 대등히 싸울 수 없었을 것임이 불문가지인데, 그와 같은 말들도 병들거나 하면 시장에 나왔던 듯하다. 

     

     

    중국 무위(武威)시 '마답비연상'
    마답비연(馬踏飛燕), 즉 나는 제비를 밟고 있는 이 준마상은 이제는 중국 고대문물의 상징이 되었다. 이 모델이 된 한혈마(汗血馬)를 비롯한 명마는 중국 역대 황제들의 로망이었으니 장건이 서역으로 간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준마를 얻기 위함이었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말을 따랐고, 공주는 온달이 사온 말을 정성 들여 길러 다시 준마로 만들었다. 그리고 온달은 그 말을 타고 무예를 연마했고,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열리는 사냥대회에서 가장 많은 짐승을 포획했다. 온달이 평원왕 앞에 자신의 실체를 멋지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후, 앞서 '북주(北周)를 격퇴한 우즈베키스탄 혼혈아 온달'에서 말한 대로 북주 무제(武帝)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최고의 공훈을 세웠던 바,* 비로소 평원왕의 정식 사위가 된다.

     

    * 그가 북주와의 배산벌 전투에서 수십 명을 벨 수 있었던 것은(疾鬪斬數十餘級) 백인계통의 우월한 기럭지나 신체적 파워, 혹은 잡종강세의 유전적 특질에서 발현된 힘일는지도 모른다.  

     

     

    집안시 무용총의 수렵도. 고구려 인의 기마술과 고구려 말의 우수성이 짐작되어진다.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의 배산벌 전투

     

    양원왕(陽原王)이 즉위하자 온달은 결심한 듯 출사표를 쓴다. 그가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만들어 백성들은 통한을 품고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신(臣)을 어리석고 불초(不肖)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군사를 내주신다면, 한번 나아가 반드시 우리 땅을 회복하겠습니다"하니 왕이 허락했다.

     

    즉 온달은 진흥왕의 진출 이래로 신라가 점유하던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으러 간 것이었니, 그 출정(出征)의 변(辯)도 결연했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온달은 그렇게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임진강변의 당포성(唐浦城),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 은대리성(隱垈里城) 등의 실지(失地)를 수복하고* 다시 군사를 몰아 한강변의 아차성(阿且城)을 쳤으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 고구려의 전통 남진루트를 참조해 추정한 것임. 

     

     

    연천의 고구려성 당포성
    연천 호로고루성 ('심심 스토리' 사진)

    윤명철 교수가 소개하는 호로고루성

    서울 아차산성
    아차산성 망루지
    아차산성에서 보이는 고구려정

     

    그 죽음이 스스로 애통했던지 장사를 지내려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사생이 결정 났으니 아아, 그만 돌아가소서"하니 드디어 관이 들려 움직였다. 여기까지가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에 나오는 온달의 스토리인데, 그가 죽은 장소를 두고 지금껏 설왕설래다. <삼국사기>에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전사했다'고 기록된 까닭에 그 연고를 두고 단양의 온달산성과 서울의 아차산성이 다투게 된 것이다. 

     

    온달이 말한 계립현은 오늘날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옛길인 하늘재이며, 죽령은 단양과 풍기를 잇는 오늘날의 죽령이다. 따라서 그 근방에 있는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을 아단성으로 보는 견해가 언뜻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의 남정로(南征路)로 사용되었을 홍천-원주-충주-문경으로 이어지는 하늘재 루트나 단양에서 영주로 이어지는 죽령 루트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지금의 온달산성이 있는 단양 곶적령(串赤嶺)에서 영주 비봉산성으로 이어지는 위치와 다른 것이다.(사실 온달산성은 그 이름 외에는 온달 장군과의 연관성이 희소하다)

     

     

    하늘재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중원 미륵사지. 석굴암과 같은 국내 유이(有二)의 인공석굴인데, 세심한 석굴의 구조보다 석굴 앞의 돌(사진 왼쪽 아래)을 지적한 국민대 이종태 교수의 말에 놀랐다. 왜 그런지는 그 돌을 만져보면 알 수 있다. 누구나 깜놀!
    하늘재에서 본 문경 포암산. 여기 오면 온달 장군 이야기가 빠지지 않으나 기실 온달과 하늘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푸른철'님의 사진)

     

    ​그리고 신라의 한강 방위선이 일거에 무너져 진흥왕 이전, 본래 신라의 국경인 계립현과 죽령을 연결하는 선까지 밀렸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또 그럴 경우에는 온달의 목표는 이미 이룬 셈인 바, 그가 굳이 죽음을 무릅쓰며 성을 공격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아단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 책계왕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사성(蛇城)과 함께 쌓았다고 하는 아차성(阿且城)이 유력해진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아차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했을  당시 사로 잡힌 개로왕을 참수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차성은 백제의 도성을 방위하던 성이었으나 백제→고구려→백제→신라로 주인이 바뀐다. 무령왕 이후 이 성은 다시 백제가 수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며 또다시 주인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590년(고구려 영양왕 1년) 온달은 전통적인 고구려의 남진루트를 택해 아차성을 공격했던 것이며, 603년(고구려 영양왕 14년, 신라 진평왕 25년)에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공격했다는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바로 이곳 아차산성일 것이다.** 

     

    * ☞ '갱위강국(更爲强國) - 한강유역을 수복한 백제 무령왕'

      ☞ '진흥왕순수비 개관'  

     

    ** 훗날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하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군을 청한다.(642년) 하지만 연개소문이 파병 조건으로 고구려의 옛 땅인 죽령 이북의 반환을 내거는 바람에 김춘추는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이 같은 내용은 온달과 고승 등의 고구려 장수가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했으나 고토(故土)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온달이 죽었다고 해서 애써 빼앗은 죽령 이북의 땅을 포기하고 왔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계립현 죽령의 위치와 부근의 온달산성

     

    무엇보다 아단성과 아차성은 글자가 유사하니, <삼국사절요>나 <동국통감> 등에서 아단성과 아차성을 혼용하고 있는 것도 단'(旦)과 '차'(且)의 글자가 비슷함에서 비롯된 일이라 여겨진다. 반면 문헌자료를 찾아보면 온달산성은 '성산고성(城山古城)'으로 기록돼 있으며, 온달과 관련된 기사가 언급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영조 이후의 문헌부터로 1942년 발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온달성'으로 고착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전설에서 비롯된 기록으로, 신라가 쌓은 성에 고구려 장수 이름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후대인의 명명임을 증명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앞서 나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 고구려'를 쓴 적이 있다. 고구려는 맥족이 주류였던 나라임은 분명하나 그 밖에도 예족, 거란족, 선비족, 투르크족, 그리고 멀리 강국(康國, 소그디아)에서 온 소그디안들도 함께 어우러져 살았다. 고구려는 그와 같은 다민족이 다문화를 융합함으로써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온달전'을 보자면 그와 같은 다민족의 나라에서도 피부색이 완연히 다른 소그디아인은 배척받은 것 같다. 그러나 온달은 고구려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이 땅의 많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도 영웅이 되기를 기원한다.  

     

     

    서울에서 느낄 수 있는 삼국 쟁패의 현장 아차산성
    아차산성의 위치
    아차산성과 고구려 보루군
    아차산 횡혈식 고분 (앞)
    혹시 온달의 무덤? (뒤)
    다문화가정 어린이 사진을 게재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어머니들 사진으로 대신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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