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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민족 다문화 국가 고구려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6. 17. 00:00

     

    우리 민족의 뿌리가 예맥(濊貊)족인가, 한(韓)족인가의 문제는 이제 정리가 된 듯하다. 북쪽의 예맥족과 남쪽의 한족이 합쳐 지금의 한민족이 형성됐다고 보는 지금의 관점은 꽤 무난하다. 그런데 예맥족이 한 족속인가, 아니면 예(濊)족과 맥(貊)족의 별개의 족속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쟁점인데 그저 다른 지역에 살던 같은 족속으로 보면 그 역시 무난할 것 같다. 정약용이 맥은 종족 명칭이고 예는 지역명(혹은 강 이름)이라고 한 것이나, 대만 사학자 능순성(凌純聲)이 예는 예수(濊水)지역에 거주했던 맥족이라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여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학자들은, '사서의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맥은 종족명을 나타내고 예는 지명으로 쓰인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예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기》, 《삼국지》, 《후한서》 등의 중국 사서들이 어떨 때는 예족과 맥족을 별개의 족속으로 쓰고, 또 어떨 때는 예맥으로 쓰는 일관성 없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인데, 그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주나라의 《일주서(逸周書)》이다.

     

    《일주서》는 주문왕에서부터 경왕(景王)까지(문왕, 무왕, 주공, 성왕, 강왕, 목왕, 려왕, 경왕)의 제도와 왕의 언행들이 실려 있는 책으로 칭회대학 소장 죽간이 공개되며 알려졌다.

     

     

    《일주서(逸周書)》
    《일주서(逸周書)》의 본래의 이름은 《주서( 周書)》이나 경서(經書) 《주서 》 및 북주의 역사책 《주서》와 구별하기 위해 《일주서》로 불린다. 구성은 총 70편이나 그중 11편은 전해지지 않으며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희발(姬發, 주무왕)의 은나라 정벌과 주나라 건국에 대해서는 앞서 '태공망 여상과 육도삼략(六韜三略)'에서 자세한 설명을 마쳤다. 그런데 《일주서》의 <왕회(王會)>편을 보면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후 수도 호경(鎬京, 지금의 서안)에서 주변의 방귀 좀 뀌는 오랑캐들을 불러 개국(開國) 축하연을 겸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모임을 개최하니 그것이 이른바 '성주지회(成周之會)'이다. 그런데 이때 초대받은 나라 중에 고구려인이라는 주석이 달린 고이(高夷)가 있고, 또 예(濊)가 있어 눈길을 끈다.(사실 이는 놀랄만한 일이다) 

     

    이 고구려가 우리가 아는 고구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뿌리임은 확실할 듯하다. 아울러 고구려는 맥족의 나라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주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1046년 경에는 예족과 맥족이 별개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말하자면 위의 《일주서》가 발견됨으로 인해 기원전 천년 경의 고구려와 예족의 나라가 세상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니,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세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정확히 1009년을 앞서는 기록이다.

     

     

    주나라 건국 당시의 예족과 맥족

     

    그런데 이쯤되면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그때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방금 말한 대로 이 기록은 우리가 아는 고구려 건국연도와 무려 천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가 기원전 57년에 세워진 신라보다 늦게 건국됐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믿기 힘들다. 그렇지만 이를 부정하고 한껏 끌어올린 북한학계의 기원전 277년 건국설을 끌어들여도 700~800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고구려는 우리가 아는 그 고구려가 아니라고 말해야 옳겠지만 아래의 《한서지리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기록을 보면 대요수(大遼水, 지금의 요하로 추정됨) 근방에는 적어도 기원전 107년 이전 '고구려현'이라는 곳이 존재했으므로 생판 부정하기도 어렵다. 아니 뭔가 있긴 있었던 것 같다. 한사군이 설치된 기원전 107년 이전, 고조선 땅에 적어도 고구려라는 지명은 있었으니 어쩌면 맥족의 고이(고구려)가 예족의 (고)조선과 한판 붙었다가 왕창 깨져 그 밑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한서지리지》 고구려 관련기록

     

    둘이 싸웠다는 언급은 없지만, 고조선 내에는 여러 거수국(渠帥國, 일정 자치권을 가지며 고조선의 통치를 받는 나라. 요즘의 기미국 개념)이 있었으며 그중에 고구려와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 것을 보면(단국대학교 윤내현 교수) 어찌됐든 고구려의 역사가 상향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자리는 고구려의 기원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므로 그 기원과 건국에 대해서는 차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민족 구성만을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요점은 고구려인이 맥족의 단일민족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주나라 이북의 민족, 그러니까 지금의 산서성, 하북성, 내몽골자치구, 요녕성 일대에 살던 산융(山戎), 동호(東胡), 예(濊)를 모두 맥족의 일파라 보았다. 말하자면 전한(前漢)시대까지 맥은 흉노와 더불어 북방민족의 범칭이었던 셈이다.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맥은 세분되니 《후한서》에서는 고구려 민족에 대해 '맥족의 별종(別種)이며 소수(小水)라는 강에 의지해 사는 까닭에 소수맥(小水貊)이라 부른다. 좋은 활을 만들어내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고구려가 맥족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맥족의 일파가 분명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반면 부여는 예족의 나라이다.(☜ 왕충의 《논형》) 그런데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시조인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적시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고구려의 지배층이 예족임을 짐작케 해준다. 즉 추모(주몽)는 북부여로부터 독립해 졸본 서쪽에 있는 산 위에 성을 쌓고 나라의 수도로 삼았으나 그 나라가 고구려라고 하는 언급은 없다.(☜ 광개토대왕비) 다만 졸본주에 도읍을 삼았다 해서 졸본부여로 불려지는데 그 2대 왕인 유리왕 때 이르러 위에서 언급된 한나라 현토군 고구려현을 공격해 빼앗는다.(☜ 《삼국사기》)

     

     

    졸본부여 당시 의 수도로 여겨지는 오녀산성
    구리시 광개토태왕 광장의 광개토대왕 복제비

     

    그 예족 사람들은 현토군의 일부인 고구려현을 점령한 뒤 비로소 고구려라는 국호를 갖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가 AD 14년이다. 하지만 북한학계는 이를 부정해 추모왕과 유리왕 사이에 중국 사서에서 찾아낸 다섯 왕을 더 끼어넣었다. 따라서 유리왕은 2대 왕이 아니라 6대 왕이 되었고, 고구려의 역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240년이 올라가게 되어 기원전 277년 건국설이 제공된다.

     

    여기서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 없다. 그 어느 쪽을 택해도 북부여 출신의 예족 일파가 현토군내의 고구려현을 점령하고 예족과 맥족을 아우르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사실은 변함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국가의 명칭이니 그들은 국호를 점령지의 지명을 빌려 고구려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방인인 예족이 점령했지만 이 나라는 맥족의 나라, 고이족의 나라인 고구려임을 천명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추모왕의 매우 휼륭한 통치술임을 말하려는 것인데, 어쩌면 예·맥의 두 종족이 합심해 한족(漢族)을 몰아내고 그곳을 지명으로 하는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을 수도 있다. 

     

    아무튼 고구려는 그후 예족의 나라인 동예와 옥저는 물론, 예족의 뿌리인 동부여, 이민족 거란과 한(漢)의 세력까지도 병합하는 왕성한 정복욕을 보이며 근동의 강자로 떠오른다. 나아가 읍루, 말갈, 숙신이라 불리던 다른 맥족의 나라들도 흡수해 삼한(三韓)은 물론이요 저 중국도 무서워하는 동방의 강국으로서(중간 중간 한족과 선비족에 얻어맞기는 했지만) 적어도 7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동방의 패자로 군림한다.(반면 중원에서는 이렇다 할 강자 없이 수없이 주인이 바뀐다)

     

    그런데 고구려가 이토록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남긴 벽화에 그 해답이 있는데, 아래의 무용총(舞踊塚)과 각저총(角抵塚) 그림 속에 그 답 중의 하나가 있다. 만일 이 그림을 보고 고구려인의 무용(武勇)이 그 답이라고 생각한다면 반(半)만 맞춘 것이다.

     

     

    무용총의 수박희(手搏戱, 태껸)
    각저총의 각저(角抵, 씨름)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각저총과 무용총(앞쪽) 전경 / 쇠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 들어가기는커녕 접근조차 어렵다는 기사를 달았다(출처: 오마이뉴스)
    각저총 입구/ 지금은 들어갈 수도 없지만, 들어가도 거의 훼손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현지에서 나최고님이 보내온 사진)

     

    위 무용총과 각저총은 각각 400년 무렵과 410~420년대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두번 째 수도 국내성이 있던 길림성 집안시 통구 무덤군에서 북서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한다. 위치적으로는 국내성보다는 환도산성에 가깝지만 환도산성 관광코스에서 배제된다. 가봐야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철망이 둘러쳐져 가까이 가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이드들조차 가봐야 괜히 욕만 먹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한다니 한국 땅에 없던 홍길동의 무덤이 여기에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무덤의 명칭은 1935년 이곳을 조사한 도쿄대학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와 교토대학의 우메하라 스에하루(梅原末治)가 무덤 안의 춤 추는 벽화와 씨름하는 벽화를 보고 붙였다. 하지만 지금 중국학자들은 이 일대를  우산묘구(禹山墓區)로 정리하며 각저총은 우산묘구 457호, 무용총은 우산묘구 458호로 지정했다. 우리 조상의 무덤임에도 우리 말 이름은 한 번도 붙여지지 못했으니 그 둘 중 하나는 홍길동의 무덤임에 틀림 없다.

     

    지금은 그렇듯 얄궂은 운명이 됐지만 이 무덤들은 과거 예족과 맥족, 그리고 서역인이 한데 어울려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며 살던 다민족 다문화의 나라 고구려를 증언한다. 여기 씨름과 수박희를 하는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은 분명 예맥족과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서역인인 것이다. 고구려는 그만큼 서역인이 흔했고 선비족 또한 흔한 인터내셔널한 국가였던 바, 을지문덕은 울지(蔚遲) 성을 가진 선비족 귀족 가문에서 귀화한 선비족일 가능성이 있고,(서울대 김원룡 교수 주장) 평원왕 때의 온달(溫達, 온다르)은 우즈베키스탄인(소그드인) 왕족 온(溫) 씨 사내와 고구려 여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연세대 지배선 교수 주장)

     

    고구려인은 아니나 신라 김춘추의 호위무사였던 온군해(溫君解) 역시 옛 강국(康國,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소그드인일 가능성이 큰 바, 경주 원성왕릉 서역인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주머니는 자신이 소그디안임을 증언하고 있다. 고구려와 고대 우즈베키스탄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벽화는 이미 여러 번 소개했지만 여기서 한번 더 우려내도 무방하리라 본다.^^ 그 아래 사진들은 신라를 정벌하러 왔던 온달 장군이 전사했다고 하는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과 출토유물, 그리고 평양 청암리사지 출토 와당이다.

     

     

    경주 원성왕릉 좌우의 서역인 상
    산낭(算囊)이라 불리는 소그드인 고유의 주머니를 달고 있다.
    소그디아 위치
    고구려 사신 그림 앞의 문재인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아프라시압 궁전 고구려 사신도 상세

     

    아차산성 망대 자리 성벽의 밖과 안
    아차산성 망대 자리 일대에서 나온 유물
    와당
    청동거울 조각과 철제 말
    평양 청암리사지 출토 붉은 기와 와당 / 서역인 얼굴이 돋을새김된 와당으로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되돌아왔다.(서울 유금와당박물관)
    평양 청암리사지 출토 귀면와(서울 유금와당박물관)
    평양역사공원에 복원된 청암리사지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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