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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시태그는 광개토대왕의 상징부호였을까?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9. 6. 22:19

     

    이처럼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해시태그가 발견되는 것은 이 문양이 고구려에서 널리 쓰였다는 방증일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얼마큼이나 보편적으로 쓰였는지 알 수 없을 뿐인데, 아래 심광주 박사의 고구려 집안 탐사기는 중국정부가 얼마나 고구려에 대해 민감한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고구려에 무심한가를 말해준다. 앞에서도 인용한 소설보다도 더 재미 있고 실감나는 심광주의 중국 탐사기 <광개토대왕과 '#'의 비밀>의 한 쪽을 같이 한번 읽어보자.

     

    촬영과정은 극도의 긴장감과 열악한 환경 때문에 너무도 고달팠다. 유적이 있는 곳은 대부분 시골이라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고, 아직 중국이 철저한 통제사회로부터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면 바로 공안에 신고를 해서 몇 번이나 촬영을 중단하고 황급히 그 곳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중국 비자기간은 30일이었지만 심신이 고단해서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못하게 하는 것을 몰래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긴장되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심양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마을의 중국 할머니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 고구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자 그 할머니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그런건 난 잘 몰라.. 그렇지만 여기는 우리땅이 아니야, 고구려땅이야. 지금은 우리가 살고 있지만 언젠가 고구려가 다시 돌아올거야..." 할머니의 말은 조용하고 힘이 없었지만, 천둥소리 처럼 들렸다. 우리 모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중국정부에서 역사속의 고구려에 대해서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알게 되었다. 주된 촬영지는 물론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이었다.

     

    집안을 촬영 할때도 집안시내에 숙소를 정하면 바로 공안으로부터 감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집안에서 120km 떨어진 통화에 숙소를 정하고 3시간을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집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안에서 24km 거리에 있는 채석장을 촬영하고 집안으로 접근하면서 장군총과 태왕릉, 호태왕비, 국동대혈 등을 촬영했다. 깜깜한 밤에 도둑고양이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촬영을 하기도 했으며 무심한 개 짖는 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집안촬영 당시 고구려 도성의 방어성인 환도산성을 촬영할 때였다. 8시면 공안이 출근하기 때문에 새벽 4시에 출발하여 산성에 도착하니 7시 20분이 되었다. 촬영시간은 30분밖에 없었다. 왕궁터는 경작지가 되어 있었고 밭고랑 사이에는 고구려 왕궁의 주춧돌과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편이 널려있었다. 최인호씨는 인터뷰를 하고 나는 밭고랑 사이를 다니며 유물을 수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내 앞에는 기와편 한점이 절반정도 땅위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우리가 찾던 그 ‘井’자 부호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정말 기적이었다.

     

    집안박물관 연구원의 말에 의하면 수만 점의 토기조각 중 그런 부호가 새겨져 있는 것이 한 두 점 있는 것 같다는 말만 들었는데 10분 만에, 그것도 촬영 도중에 이 유물을 수습하게 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것을 최인호씨가 찾는 것처럼 재현하면서 촬영을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이쳤다. 최인호씨가 들고 있던 기와표면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시작했다. 당시에는 그 천둥소리가 정말 광개토대왕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흥분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56도 짜리 중국술을 마구 마셨지만 쉽게 취하지도 않았다.

     

     

    심광주가 환도산성에서 찾아낸 # 문양 기와편

     

    환도산성(산성자산성)과 산성하 고분군

     

    파괴된 산성하 고분군

    2005년 조사에서 총 1,881기의 고구려 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고분은 1,248기이다.

     

    일부 복원된 환도산성

     

    환도산성과 광개토대왕비는 멀지 않다.

     

    집안 광개토대왕비

     

     

    해시태그 기와편이 발견된 환도산성과 광개토대왕비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해시태그 문양은 광개토대왕의 상징부호였을까? 작가 최인호에게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묻고 싶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문필로 일세를 풍미하던 그는 2013년 침샘암이라는 희귀병으로 67세의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대신 심광주의 글을 보면 최인호의 생각이 꽤 일리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적 같은 일은 국내촬영을 하면서 또 한번 경험하였다. 충주 중원고구려비 남동쪽에 누암리 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은 신라고분인데 출토된 토기 중 ‘井’자 문양이 많이 찍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현장을 촬영 중이었다. 때는 7월 하순, 장마가 막 끝난 후였는데 나는 밭고랑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눈앞에 들어온 것은 직경 5cm 정도 땅위로 노출된 토기편 한 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노출된 부위에 ‘井’자가 있었다. 정말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촬영을 하고 주변을 정리해 보니 파괴된 고분 바닥에 있던 20여점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그중 ‘井’자 문양토기는 10점이 넘었다.

     

    심광주가 말한대로 # 문양 토기가 발견된 누암리 고분군과 중원 고구려비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1979년에 발견된 이 비는 집안 광개토대왕비의 쌍둥이 비로 불려질 만큼 그것과 유사한 모양과 형식을 하고 있어 발견 당시 지대한 관심과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왜 이제껏 우리가 이 비를 몰랐던가 하는..... 하지만 초반의 관심과 달리 비문에 관한 연구는 발견 당시 이후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작년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3D 스캐닝과 RTI 촬영 등 첨단장비를 동원해 비석에서 '영락칠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의 여덟 자를 새로 판독해냈다.

     

    잘 알다시피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서, 영락 7년 정유년은 397년에 해당한다. 이는 기존의 짐작에서 짧게는 52년, 길게는 109년이 앞당겨지는 숫자였다. 기존 학계에서는 비석의 내용을 추정해 건립 연대를 449년(장수왕 37년) 12월 22일, 480년(장수왕 68년) 12월 23일, 506년(문자왕 15년) 12월 23일 등으로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고광의 연구위원의 판단이 옳다면 이 비석은 414년(장수왕 3년)에 세운 광개토대왕비에 17년 앞서 세워진 고구려비가 되며 그것도 광개토대왕 당대에 건립한 비석이 된다. 누암리 고분군에서 찾아낸 # 문양 토기와 광개토대왕비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광주가 누암리 고분군에서 찾아낸 # 문양 토기

     

    안개 속의 중원 고구려비(오마이뉴스 사진)

     

    중원 고구려비 탁본

    정면과 좌측면.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소장본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위 중원 고구려비의 내용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이 397년 경 군사를 몰고 내려와 중원지방을 차지한 것, 나아가서는 지금의 포항 영일만 일대까지 점령해 다스렸음은 지금도 남아 있는 고구려계 고분군들이 증명하나 그들이 반드시 광개토대왕의 군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또 이성산성과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 문양 토기(☞ '하남 위례성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해시태그')는 장수왕 시대의 것일 확률이 높으니, 그곳에서 # 문양 토기를 발굴했던 심광주 박사는 한성 백제 함락의 그날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그려낸다.

     

    서기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은 정예병 3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다. 평양을 출발한 고구려군은 예성강과 임진강을 건너 양주를 지나 한강을 건넜다. 백제군은 전력을 다하여 방어를 하였지만 고구려군은 7일만에 북성인 풍납토성을 함락시키고, 남성인 몽촌토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이 몰려오자 몽촌토성에서 이를 지켜보던 백제 개로왕은 지금의 올림픽파크텔이 있는 서문으로 도망하다가 고구려군에 잡혀서 아차산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남하를 계속하여 서쪽으로는 금강 상류지역부터 동쪽으로는 영일만 지역에 이르는 곳까지 진출했다.

     

     

    개로왕이 참수된 서울 아차산성

     

    포항 대련리의 고구려계 무덤

    포항 냉수리에 이어 무려 10기나 되는 5세기 고구려계 굴식 돌방무덤이 포항-부산간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발견됐다.(사진출처: '분홍이의 Travel & Beauty')

     

     

    위 무덤에서 나온 고구려계 귀걸이와 은팔찌

     

     

    이렇게 보면 해시태그가 반드시 광개토대왕에 국한된 상징부호였다고 하기 힘들다. 더욱이 환도산성(산성자산성)에서 수습된 아래의 해시태그 문양 기와는 환도산성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바, 광개토대왕 시기인 5세기를 훨씬 상회한다. <삼국사기>에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기록된 이 성의 추정 건립시기는 서기 3년(유리왕 22년)으로 졸본성(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수도 방어기지의 역할로써 위나암성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도산성이 본격적으로 수축된 것은 산상왕 원년인 197년으로 위나라에서 독립한 공손탁(公孫度)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이듬해인 198년, 위나암성을 크게 증축하고 환도산성으로 불렀다.(<삼국사기>) 이후 환도산성은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동천왕 시절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공격에 함락되었으며, 고국원왕 12년 전연(前燕) 모용황의 침입에 재차 함락되었다.* 아래의 기와는 유리왕 시절의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고국원왕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 이때 모용황은 국내성을 함락시켜 궁궐을 불태우고 고구려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았으며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쳤다. 이후 모용황은 환도산성을 허문 후 미천왕 시신과 태후 주씨, 백성 5만과 보물들을 노획해갔던 바, 고구려 최대의 위기였다.

     

     

     

     

    환도산성 2호문지에서 수습된 # 문양 기와편

     

    일부 복원된 환도산성

     

    환도산성 망루지

     

    흔적만 남은 국내성 성벽

    2004년 7월 국내성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후 성곽 보존 작업이 일어 지금은 평균 2m 정도로 높아졌다고 한다.

     

     

    이상 설명한 해시태그에 대한 결론을 내기 전, # 부호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기에 고구려 사람들은 사방에 그와 같은 표식을 남겨둔 것일까? 이에 대한 답 역시 심광주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광개토대왕과 '#'의 비밀>에 실린 그 흥미진진한 내용의 한 대목을 다시 한번 빌려보자.

     

    우리는 고주몽이 오녀산성에서 보았을 일출을 찍고 싶었다. 그곳에서는 혼강의 흐름과 환인시내가 한눈에 조망되었다. 환인에서 멀리 떨어진 신빈에 숙소를 정하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현장에 도착하니 구름이 끼어 있어서 계속 실패하고 드디어 4일째 되는 날은 하늘이 맑았다. 오녀산 정상부의 좁은 바위틈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녀산 정상부에 올라 환인댐 너머로 황홀하게 떠오르는 일출과 산성내의 유적을 촬영했다. 만족감에 취한 우리 모두는 약간 긴장감이 풀어진 상태로 산 밑에 내려와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출발하는데 이미 모든 도로를 공안이 봉쇄하고 있었다. 오녀산성을 촬영하고 내려와 식사하는 사이에 마을 주민이 공안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 신고가 아니더라도 공안에서 이미 은밀하게 우리 뒤를 추적하다가 결정적인 기회에 우리를 일망타진한 것이었다. 촬영에 참여한 모든 사람과 장비가 실려 있는 버스채로 우리는 환인현 공안국으로 이송되었다. 중국공안원들은 능구렁이처럼 아무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때로는 호통을 치며 화를 내다가 순식간에 미소를 띠면서 자백을 할 것을 강요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짐 속에서 이동경로와 촬영내용을 모두 찾아내었고, 우리가 찍었던 40여개의 테이프와 모든 돈을 압수했다. 우리가 조사받는 동안 수십 명의 공안국원들은 오녀산성을 샅샅이 조사하며 도굴의 흔적이 있는지 조사했다.

     

    다행히 우리는 외국인이고 촬영테이프를 모두 압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48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후 심양공항을 통하여 추방되었다. 이후 우리를 도와주었던 조선족들은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고 심양의 형무소에서 1년이 넘게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사건은 환인현 공안국이 생긴 이래 최대의 문화간첩사건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모든 짐을 뺏기고 여권만 돌려받은 채 귀국한 우리는 한동안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다. 잠도 오지 않았고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촬영한 테이프를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보름 정도 마음고생을 하다가 백두산 촬영을 강행하기로 했다. 불안감은 있었지만 연변공항으로 가면 입국은 가능할 것 같았다. 연변을 통하여 백두산에 도착했을 때는 9월 18일. 일찍 찾아오는 추위 때문에 이미 일반 관광객은 없었다. 우리는 온천이 나오는 여관에 자리를 잡고 일주일 동안 백두산을 촬영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집안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내가 발견한 장군총의 두침(頭枕) 방향이 백두산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장군총 두침, 즉 무덤 머리 쪽 방향과 백두산과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여기서 다시 글의 앞 부분을 옮겨야 한다.

     

    (심광주)는 평소 고분의 두침 방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덤의 머리 방향은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정보이다. 예컨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는 무덤의 장축 방향이 강과 평행하고 있으며, 머리 방향은 강의 하류방향으로 두고 있다.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 인들은 물과 관련된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고신라의 경우는 한결같이 동침(東枕)을 하고 있다. 동쪽은 바로 그들의 조상이 배를 타고 온 해가 뜨는 방향이다. 신라의 이 동침 습속은 이후 적석목곽분이 석곽분으로 바뀌고 불교가 도입되면서 두침 방향이 일제히 북쪽으로 통일되지만 신라의 지배자들은 6세기경까지도 끈질기게 동침을 고수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적석총의 두침방향은 동침도 북침도 아닌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북한이나 중국자료에 보면 단순히 묘실의 입구가 남서향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에 대해 평소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현장을 답사하면서 두침 방향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답사할 때였다. 장군총 현실의 석침 방향이 남-북에서 53° 편동(偏東)하고 있었다. 장군총 뒷편에 있는 배총의 현실 방향도 똑같았다. 동쪽도 북쪽도 아닌 53°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는데 문득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 ‘혹시... ’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고 숙소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려 길림성 지도를 펴놓고 집안에서 53°를 그어보았다.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백두산이었다. 정말 백두산이라니..... 그 흥분을 달랠 길이 없었다.

     

     

    53º로 놓여진 장군총 두침이 가리키는 방향은?

     

    백두산 천지

     

     

    즉 심광주 박사는 고구려 해시태그 문양이 백두산 천지, 즉 '하늘의 우물'을 의미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빌리자면 해시태그(#)는 '하늘의 우물'에 더도 덜도 아니다. 그는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결집력이 자신들의 선민사상, 즉 '日月之子 河伯之孫'(하늘의 아들이요 물의 신 하백의 손자)이라는 우월적 믿음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에서도 언급됐듯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시조인 동명성왕(주몽)이 물의 신 하백의 손자이고 일월(日月)의 아들임에 자부하고 있고* 자신들 역시 그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그 표시가 바로 #자 문양이고, 그것은 곧 하늘의 우물인 백두산 천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 광개토대왕비, 모두루묘지명, 위서 고구려전 등에 이 같은 선민사상이 담겨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천제지자 하백지손(天帝之子 河伯之孫)'이라고 써 있다.

     

    그림에서 보여지듯 이 주장은 무척 설득력있다. 다만 앞서 주장했듯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무덤이 아니라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이다.(☞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일 턱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대충 답이 나온 듯하다. 고구려인은 시조왕  동명성왕이 하늘의 아들이요, 물의 신 하백의 손자임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장소로서 백두산 천지를 선정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들 고구려인은 자신들이 그 후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또한 자랑스럽게 여겼으니 해시태그는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의 표식이었다. 말하자면 해시태그는 고구려의 혼이 담긴 국기(國旗)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 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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