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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
    잃어버린 왕국 '왜' 2020. 6. 5. 20:22

     

    광개토대왕비문에 기술돼 있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붙은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

     

    우리나라 전래의 역사 기록이 박약함은 앞서 '기록의 중요성'에서 충분히 떠들었다. 그 중 몇 줄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뿌리 고조선은 이렇듯 중국과는 고대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어왔지만 서로 독립적인 관계였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이 강성해지며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속했던 모든 나라를 자국의 역사 안에 편입시키 위한 공식적인 역사 왜곡 작업을 시작했으니, 그중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가 존재하던 동북쪽 땅에 대한 중국 역사로의 편입 작업이 이른바 '동북공정'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역사 왜곡 작업에 우리가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것은 이를 반박할 만한 '우리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사실이니,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대한민국 고대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한서(漢書)》〈지리지〉, 《삼국지》〈위지(魏志) 동이전〉을 위시한 중국 측 사서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사단은 우리의 기록이 없는 까닭이니, 그 결과 지금 이 같은 수모를 당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교 다닐 때 빈출문제로서 달달 외우다시피한 고구려의 <유기(留記)>와 <신집(新集)>(AD 600년), 백제 고흥 박사의 <서기(書記)>(375년)와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신라 진흥왕 때의 재상 거칠부가 편찬한 <국사(國史)> 등이 그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전란(戰亂) 등으로 분실되어 전해지는 기록이 없을 뿐이다. 모르긴 해도 부여와 예국(濊國, 동예와 옥저) 등에도 자국의 역사서가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속의 김거칠부

     

     

    고구려는 일찍부터 자신들이 천손(天孫)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바,(☜ 광개토대왕비) 이와 같은 자부심이 기록된 역사서를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필시 전래의 <유기> 70권에는 그들의 천하중심적 시각에 입각한 역사가 피력돼 있었을 것이다.(소수림왕 때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 이후 영양왕(재위 590~618년) 때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편찬한 <신집> 5권에는 문자 그대로 <유기> 이후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모아놓았을 것이다.

     

     

    고구려인의 선민사상이 적혀 있는 모두루 묘지명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물의 신 하백의 손자이고 일월(日月)의 아들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 같은 선민 사상은 <광개토대왕비> <위서 고구려전>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집안(集安) 모두루 무덤(사진 출처: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앞서 말했듯 이 모든 기록들은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같은 아쉬움을 조금을 달랠 수 있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광개토대왕비이다. 무슨 근거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려 초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신집>의 내용을 빌려왔다고 하는데 당연히 동의하기 힘들다. 아울러 김부식은 요동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도 몰랐던 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켰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혹자는 김부식이 지독한 사대주의자이며 신라 김씨의 후예이기에 일부러 이 내용을 누락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전혀 설득력 없는 소리다. 당시 김부식이 사대를 했다는 어떠한 근거도 없으며 당시는 사대를 할 대상도 마땅치 않았다. 이는 오직 조선시대 사대관(事大觀)의 소급일 뿐이다. 다만 그가 신라 왕족인 경주김씨의 후예인 것은 맞는데,(경주김씨 계림군파인 필자의 족보에 김부식이 중시조로 올라 있다) 그렇다고 그가 망한 나라 신라를 위해 있는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없는 것처럼 만들 이유도 없다.

     

    김부식은 그저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를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아무도 몰랐으니 이것이 고구려 비(碑)라고 알려지게 된 것은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封禁)을 해제한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비문의 발견 일화와 단재 신채호의 족적, 그리고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가 주장해 크게 화제가 됐던 이른바 '신묘년 기사'(일반적으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되는) 변조설은 다루지 않으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이미 '왜(倭)는 한반도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고,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사실도 말한 바 있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I) - 신라를 침략한 왜인

     임나일본부의 정체(II) - 나주 옹관 무덤의 주인은?

     임나일본부의 정체(III) - '왜'는 어디에 있었나?

     

    따라서 이른바 신묘년 기사가 놀랄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 그저 신묘년(391)에는 고구려가 수군을 동원해 백제와 왜를 쳤구나 생각되어질 뿐이니, 일단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자.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신라 땅에) 오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

     

    왜가 한반도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는 팩트를 그대로 대입하면 비문의 해석은 위와 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여타 아무런 문제점도 발생하지 않는다.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동원해 백제와 왜를 물리친 후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은 것이다.(<삼국사기>의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이에 앞서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둘러쌓인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바 있다)  

     

     

    오두산성

    파주 오두산성은 백제 관미성(關彌城)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미성은 ‘사면이 초절하고 바닷물이 둘려있는데,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7도(道)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관미성 입지적 조건이 밀물 때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오두산성의 환경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 호우

    신라에서 광개토대왕을 제사 지낼 때 쓰던 그릇으로 신라가 고구려의 신하국이었다는 결정적이 증거가 되겠다. 1946년 아래의 무덤에서 발견됐다.

     

    호우 바닥의 글씨

    '#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문양은 오래 전, 작가 최인호가 '왕도의 비밀'에서 광개토대왕의 엠블럼으로 언급한 이후 주목받아 왔으나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의 사후인 415년(장수왕 3년)이며 마지막 열 십(十)자는 '열 번째로 만든 호우'의 뜻으로 여겨진다.  

     

    경주 호우총

    위의 호우가 출토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노서동 고분군 왕릉 곁에 있으며 제사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1946년 은령총과 함께 한국인의 고고학적 첫 발굴이 이루어진  무덤이다.

     

     

    그 한반도 남쪽의 왜는 복수를 위해 갑진년(404년)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때 왜도 수군을 동원해 대방지역(황해도)에 상륙하였는데 이에 놀란 광개토대왕은 급히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해 맞서 싸우니 바야흐로 한반도의 패권을 건 대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왜·고(倭·高) 전쟁의 발단인 391년의 신라 구원과 400년의 1차 전투, 그리고 왜·백제 연합군의 침공으로 촉발된 404년의 2차 전투에 관한 내용은 광개토대왕비 제 2면 6행에서부터 3면 4행에 걸쳐 매우 길고 자세히 서술돼 있다. 반면 왕이 북진하여 염수(鹽水, 시라무렌 강)의 거란 3개 부족 600~700영을 격파하고 가축들을 노획해 돌아온 일은 사실 서두 몇 줄에 불과하다.(☞ 염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광개토왕 동상에 대한 유감' 참조)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에는 주목하고, 정작 길게 서술돼 있는 왜와의 싸움, 그리고 한반도 남쪽까지 밀고 내려가 왜의 세력을 척결한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바, 나로서는 그저 괴이할 뿐이다. 이에 더 이상 긴 말 않고 그 비문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집안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있던 길림성 집안에 있는 비석으로,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응회암 비의 4면에는 대략 1,80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중 141자는 마모되어 읽을 수 없다. 6.39m의 세계 최대 비석이다.

     

    구리시 광개토광장의 복제비

    2008년 구리시에서 서수 단국대 교수의 고증을 바탕으로 세웠다. 국내 복제비 중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九年己亥百殘爲誓與倭和通王巡下平壤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特遣使還告以密計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다시)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순시하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나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서 성들을 파괴하며 노객(신라왕)으로 하여금 왜의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니 이에 태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이 그 충성심을 긍휼히 여겨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고구려군이)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곧 항복하였던 바, 그 성에 파수병과 주둔병을 두었다. 신라성 염성 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고 성안 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安羅人戍兵新羅城□□其□□□□□言□□□□□□□□□□□□□□□□□□□□□□辭□□□□□□□□□□□□□殘倭潰□以隨□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至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家僕句請□□□朝貢


    안라에 파수병과 주둔병을 두었다. 신라성(이하 비문이 지워져 알 수 없음)의 남은 왜적들이 궤멸되어 달아났다. 옛적에는 라 매금(왕)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였고 감히 부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와서 부탁을 하니 (태왕께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였고) 이에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 조공하였다.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兵□石城□連船□□□王窮率往討從平穰□□□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


    영락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왜가 수군을 이끌고 석성을 공격하자 이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히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王師四方合戰斬殺蕩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 □城□城那□□□□□城

     

    영락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파견시켜 합전하였는데, (왜군의 본성을) 사방 포위하여 파하고,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시켰다.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그밖의 군수물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성, □성 등을 파하였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가 돌아오는 길에 파한 사구성과 누성 등은 당연히 백제성이다. 그리고 이때 왜는 당연히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그래도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었으니 여전히 한반도 남쪽에서 세력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562년 진흥왕의 대규모 복수전으로 한반도 남부의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 결국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앞서 설명을 마쳤다.

     

    이미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전래되는 삼국시대의 역사서가 없어 고대사 연구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중국측 사료에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료비판도 없는 듯하니 그저 '내도해파'의 몇 자 안 되는 비문 내용에 벌벌 떨고, 일본군이 비문에 석회를 발라 변조했다는 불명확한 사실에 의존하는 현실이 나로서는 그저 딱하게 여겨질 뿐이다.(다행히도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은 지금 사라졌다. 아무리 석회를 단단히 발라도 바바람에 견딜 재간이 없었을 터인데 100년 가까이 그대로였다니.....?)

     

    이 모든 것이 숲을 보지 못하고 눈 앞에 보이는 나무에만 매달린 까닭이니 지금이라도 대의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면 한다. 다시 얘기하거니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616년 전, 한반도에서는 그 전체 패권을 좌우할 왜·백(왜 백제) 연합군과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한판 전쟁이 벌어졌던 것인데, 그 왜는 한반도 남부 영산강 유역을 거점으로 하던 호전적인 나라였다.

     

     

    길림성 집안시의 광개토대왕비

    비의 높이는 약 6.39m,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1.46m지만 자연석을 다듬은 까닭에 고르지 않다. 

     

    비면의 각자

     

    비의 서쪽 면

     

     

     비의 탁본을 뜨는 사진(1918년)

     

     

    비의 대석

    1918년 8월 구로이타 가쓰미가 3.35X2.7m의 대석을 발견했다.

     

    왜왕의 무덤

    옛 백제 지역인 나주 지역에는 백제왕의 능묘보다 큰 무덤들이 즐비하다.

     

     

     

    나주 반남리 왜왕의 무덤

     

    위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백제식도 신라식도 아닌 이 왕관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임나일본부의 정체 II - 나주 옹관 무덤의 주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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