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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왕 동상에 대한 유감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18. 2. 18. 04:48


    가끔 우리에게 고구려란 뭘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민족의 영원한 제국? 잃어버린 첫 사랑? 민족의 자존심? 돌아갈 수 없는 동경의 땅? 깨고 싶지 않은 꿈? 넘사벽? 대충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 사람마다 고구려에 대한 단상은 다양할 것인데, 오래 전 만난 동생은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근데 고구려가 우리 민족 맞아요? 고구려가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맞냐구요?"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내가 반문했다. 

      "그게 뭔 소리야? 그럼 중국사냐?"

      "그건 아니구요. 고구려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그냥 변방 새외(塞外)민족사로 분류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왜, 많잖아요? 말갈, 거란, 읍루, 여진, 숙신..... 고구려도 뭐 그런 변방 새외민족이 아니냐구요?"


    동생의 말은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서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알든 모르든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 같다. 예전에는 아는 자, 모르는 자 누구든 이런 말이 없었는데, 스멀스멀 이 같은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이 또한 중국이 집요하게 들이댔던 동북공정의 영향인 듯하다. 비가 많이 오면 아무리 우산을 잘 써도 어딘가는 비에 젖기 마련이듯..... 그때 내가 따로 긴 얘기를 한 기억은 없지만 다음 말 한마디는 확실히 전한 것 같다. 


      "아니.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고, 한민족의 역사에 편입되는 게 맞아. 우리가 예맥족의 후예가 맞다면 말야. 부여나 고구려가 예맥족이라는 건 우리가 말하는 게 아니라 중국측 사서에서 나오는 건데, 백제는 자신이나 고구려인들이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잖아? 그렇게 보면 그들 예(濊)족과 맥(貊)족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한(韓)족과 결연해 이룬 민족이 우리 한민족이 되는 거지. 한반도 중동부에 있었다는 동예(東濊)라는 나라가 아마 그 연결고리 쯤이 될 거야. 동예는 동쪽의 예족 나라라는 뜻이니까." 



    (濊), (貊), (韓)족의 위치.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이렇게 주장하는 미친넘들도 있는 거 같은데,


    한사군(왼쪽 붉은 실선) 및 백제가 남으로 와 한강 변에 자리잡은 기원전 1년경의 지도는 이쯤 보면 될 것 같다. 강원도 지역에 위치한 동예를 주목해보자.(지도는 둘 다 일부러 중국측 자료에 의거했다)




    기원전 1세기경 예맥족의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그 고구려는 차츰 강성해져 서기 121년 태조왕이 위 그림 왼쪽 위에 위치한 선비(鮮卑)족의 군대와 연합해 중국 후한(後漢)을 공격한다. 이어 동천왕과 미천왕 때에도(242/311년) 중국을 공격하는데, 미천왕 때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켜 옛 고조선의 땅을 회복하며 동북아의 강국으로 군림한다. 그리고 그 절정기는 잘 알다시피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시절로 그 시호 자체가 영토를 크게 넓힌 왕이라는 뜻이다. 그는 영락(永樂)이란 멋진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살아생전에는 영락대왕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살아생전 얼마나 넓은 영토를 개척했던 것일까? 그에 대한 기록이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비에 남아 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이 수도 집안시에 세운 그 자연석 비에서는 부산·부산(富山·負山)을 넘어 염수(鹽水)에 이르렀다는 등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중첩된 산을 넘어 도착한 염수, 즉 소금 강은 지금도 염분의 물이 흐르는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시무렌 강으로 알려져 있다. 대왕은 그곳 일대 거란족의 600~700 여 개의 성을 정복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 양 말을 노획한 것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7세기 청나라 고증학자인 고염무의 '수문비사'를 근거로 '부산·부산'을 a지역의 와룡산과 아랍선산으로, '염수'를 b지역의 소금 호수인 길란태 호라고 주장했다. 



    반면 KBS '한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이 시라무렌 강 너머 거란족의 본거지인 파림좌기를 공격해 크게 승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염수를 염분이 많은 강 시라무렌 강으로 비정한 것인데, 어느쪽이 됐든 대륙의 내륙 깊숙히 진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비에는 대왕이 후연(後燕) 정벌에 나서 숙군성(宿軍城)과 연군(燕郡)을 공격했다고 되어 있는데, 연군은 놀랍게도 지금의 북경 인근 지역이다. 대왕은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를 넘어 후연의 중심지까지 쳐들어갔던 것이다. 그밖에도 대왕은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5만을 이끌고 한반도 남쪽으로 와 신라를 공격한 왜(倭), 즉 가야 연맹의 세력을 패퇴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한반도의 왜를 일본 열도로 내쫓아 동북아의 지도를 바꿔놓기도 하였다.(* '백발 인물열전/천자문의 저자는 누구인가?' 참조)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당시의 고구려 영역은 얼마나 됐을까? 마침 김영동 교수님의 블로그 '고전 & Life'에 걸맞은 지도가 있어 전재한다. 



    중국측 자료에 나타나 있는 후연의 위치.(오른쪽 아래 화살표) 후연과 북위의 위치를 알면 고구려 역사에 대한 이해가 편하다. 이후 후연은 망하고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해 남북조시대를 연다.


    412년 광개토대왕 당시의 고구려 지도.


    440년 북위 당시의 남북조 시대 지도. 


    609년 수나라 지도.

    남북조의 중국은 589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고 고구려는 수·당제국과의 오랜 전쟁을 겪게 된다. 통일중국과의 싸움은 598년 고구려 영왕왕의 요서지역에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수나라는 598년 개전 이래 612년, 613년, 614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살수대첩은 612년 수양제가 거느린 113만 군대와 싸워 이긴 승첩이었으며, 수나라는 이 원정 실패의 여파로써 618년 멸망한다. 



    광개토대왕은 이와 같은 정복군주로서 한민족 최대의 강역을 확보하였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했던 정복군주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412년, 불과 39살의 나이로 서거하는데, 그 짧은 생애로 볼 때 대왕은 재위 기간의 거의 모든 시절을 전장에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따라서 대왕의 일생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오직 말 위에서의 생이 될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아래의 동상은 그의 일생과는 무관해 보인다. 작가가 광개토대왕의 일생과 업적을 모를 리는 없을 터이다. 따라서 작가는 분명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었겠지만 그 의도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위 동상과 광개토대왕 비는 구리시 광개토광장에 있으며 지난 2009년 구리시의 노력으로 건립된 역작(力作)이다. 구리시가 대왕의 동상과 비석을 건립하게 된 동기는 지난 1997년 이후 구리시 아차산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기 때문으로, 이에 시 당국은 '남한에서 고구려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도시'로서의 홍보에 힘을 기울였던 바, 위 동상과 비석도 그에 관한 일환으로 건립되게 되었다. 그 역사적인 근거는 영락 6년(396년) 대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아단성(지금의 아차산성) 등 58성을 획득하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비문의 내용에 의거하였다.  


    광개토대왕 비석은 만주 집안시에 있는 비석의 복제품이지만 우리나라의 복제비 중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고, 문제의 '신묘년(辛卯年) 기사'인 내도해파(來渡海跛百殘□□□羅以爲臣民)의 문장도 그래로 새기되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인데도 아직까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왜는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왔다. 그래서 □은 백잔과 □를 공파하고 신라는 □하여(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새로운 해석의 설명문을 따로 세워놓아 무난하다는 평을 받았다. 아울러 비석의 재질과 형태, 그리고 각자(刻字)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의 세심한 고증을 거쳤던 바, 나무랄 데 없는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다.




    구리시 광개토광장의 광개토대왕 비석. 구리시 홍보 자료에서 발췌한 사진으로, 박영순 (전)시장, 단국대 서영수 교수, 이재순 석장, 한국금석문각자예술연구원 전홍규 원장의 뒷 모습이 보인다. 


    비문 번역문


    신묘년 기사 번역문

    사실 정확치는 않다. 정확한 해석을 원하시는 분은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 참조

     



    다만 개인적 시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위 동상으로, 이 동상의 대왕의 얼굴은 지난 2003년 미술해부학 전문가인 조형가가 중국에 살고 있는 고구려 장수왕의 후손 및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이주해 살았다는 전북 익산시의 대학생 표본, 강원도 횡성 고씨 종친회원, 일본 사이타마 현의 고구려 후손 등을 두루 조사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삼았을 만큼 고증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표현된 바는 사뭇 엉뚱하였으니, 동상의 형태는 대왕의 기백 넘치는 웅자가 아니라 무슨 교주가 수정구슬 같은 것을 들고 서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왕이 쓰고 있는 관도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관모가 아닌 창작품과 같은 형태인데, 그 고증은 차지하고서라도 고구려 고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그 많은 투구를 왜 외면했는가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대왕의 손에 들린 구체(球體)도 생뚱맞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작가가 뜻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도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 구체는 무엇일까? 대왕이 정복한 땅을 과장한 지구본일까? 그 또한 너무 과하기는 하지만 그밖에 달리 생각나는 것은 없다. 천자문에 나오는 웅의료나 수호지에 나오는 고구처럼, 아니면 수산리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농환(弄丸) 재주꾼처럼 광개토대왕도 공놀이의 달인었을까? 분명 그건 아닐 텐데 왜 그와 같은 것을 들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작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없다. 



     




    게다가 동상은 미학적으로도 전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미'에는 주관적인 개념이 포함되는 바, 이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겠다. 다만 그 동상의 모습에 대왕의 기상이나 일생이 표현돼 있지 않음은 내내 불만이니, 아래의 또 다른 광개토대왕 동상과 같이 말을 탄 그 멋진 모습은 왜 표현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이 너무 흔하기에 좀 더 개성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형이상학적인 개성을 추구했던 것일까? 하지만 워커힐을 지나 구리시로 들어오는 그 어떤 사람이나 구리시에서 광장동으로 나가는 그 어떤 사람도, 동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라 여길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쉽다.




    천안시 국학원 내의 광개토대왕 동상 



    심하게 말하자면 이 동상의 작가는 조형가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망각한 것이다. 초현실주의가 개입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면 작가는 대상의 되는 인물의 생애를 표현하고자 애썼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 봐도 그 동상에서는 대왕의 기백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이 미술사가이자 비평가인 로잘린드 클라우드의 말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고전주의 작품에서는 보는 이가 투명하게 대상의 내적 구조를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초현실주의 설치 미술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작가는 그와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아울러 담당 공무원의 안목도 아쉽다. 지금껏 국가에서도 그렇고 지방자치단체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국민적 영웅이라 할만한 광개토대왕의 동상을 제작한 적이 없다. 그렇게 힘들게 세워진 광개토대왕의 동상이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동상이 되어버린 것인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구리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것이 내내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 미련감에 나폴레옹의 역동적인 모습의 동상 사진 몇 개를 추려보았다. 듣자하니 동상의 제작에도 규범이 있어, 전장에서 죽거나 다친 장수가 아니면 말의 앞 발을 들 수가 없다는데, 나폴레옹은 천수를 다했는데도(귀양가서 죽기는 했지만) 그의 동상들은 이와 무관하다. 물론 맨 아래 사진처럼 네 발을 다 딛고 서 있는 동상도 있긴 한데, 어찌됐건 별 이상한 규범도 다 있다. 











    ―실망하지 마시라.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이 훌륭한 동상이 있다.

       (아래의 글은 '논산공보뉴스' 등에 실린 것을 그대로 옮겨왔다)


    구자곡초등학교 19회 졸업생들이 주축이돼 십시일반 모금으로 현재위치에 모셔진 계백장군 동상은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듯한 얼굴,삼지창을 손에 쥔 근엄한 모습 ,금새라도 적진을 향해 짓쳐들어갈 기세로 주인의 명을 기다리는 준마의 모습 등에서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느껴지고 갑옷을 을 입고 어깨에 맨 활과 전통 등의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다. 1966년도에 당시 백제중학교 미술교사이던 윤석창 선생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동상은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한 언론이 전국에 산재한 동상들을 상대로 한 작품 콘테스트에서 인천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에 이어 2위에 오를 만큼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한 계백장군의 동상은 1966년 7월 31일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까지 참석한 가운데 지금의  부여군청 앞 광장에 세워 졌었다. 그러나 동상이 구자곡 초등학교에 이전 안치된지 40년 가까이 부식방지 처리 등 동상관리에 소홀해 현재 구자곡초등학교에 모셔진 계백장군의 동상은 그부식의 정도가 심화되고 말의 배와 두다리 부근이 심하게 균열되어 복원작업이 시급한것으로 나타났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kr,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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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