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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의 정체(III) - '왜'는 어디에 있었나?잃어버린 왕국 '왜' 2020. 3. 23. 00:07
* '임나일본부의 정체(II) - 나주 옹관 무덤의 주인은?에서 이어짐
그 옹관묘 묘제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3~6세기의 약 400년 동안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다. 그들의 체구가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작았음일까, 이웃 나라인 고구려, 신라, 백제 사람들은 그들을 왜인(倭人)라고 불렀다. 왜소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체격과는 무관하게 용감했으니 백제의 아신왕은 자신의 아들 전지를 볼모로 잡히고 고구려와의 전투에 원병을 청했고,(396년) 신라 역시 왕자 등을 볼모로 보내 그들의 자비를 구했다. 왜인들이 쉴새없이 신라를 침입해 노략질을 하는 까닭이었다.
~ 중국도 그들을 왜인이라 불렀으니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과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전(韓傳)에서 말하는 그들의 영역을 I편에서 이미 설명했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 이 영역은 앞서 말한 그들의 특별한 묘제인 주구묘와 옹관묘가 발견되는 지역과도 놀랍도록 일치한다. 사서의 이 명확한 영역을 무시하고 '왜'(倭)를 설명하면 어느 것 하나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다.(한반도 남쪽의 '왜'를 억지로 열본열도에 갖다붙이니 말이 될 턱이 없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왜는 400년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임나가라(任那加羅) 성이 함락되며 힘을 크게 상실하였고, 562년 진흥왕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의 세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열도로 철수하게 된다.
1. 박제상의 일화
앞서도 말했지만 4~5세기 신라가 왜의 공격을 받은 횟수는 무려 27회나 된다.(<삼국사기>) 그중 실성 마립간 4년(405) 왜가 명활성을 공격하자 실성 마립간은 왕족인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실성 마립간에 이어 왕위에 오른 눌지 마립간은 왜에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고자 하니 그가 자신의 친제(親弟)인 까닭이었다. 이에 그 임무를 띠고 파견된 사람이 바로 박제상이었다.(<삼국사기> 418년, <삼국유사> 425년)
박제상은 거짓 귀순을 하여 왜왕을 안심시킨 후 틈을 봐 미사흔을 탈출시키지만 자신은 붙잡히고 만다. 이때 왜왕은 포용력을 발휘하여 진심으로 항복하면 후한 포상과 벼슬을 내리겠다고 하였으나, 박제상은 '계림의 신하가 어찌 왜인의 개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거절한다. 이에 박제상은 고문 끝에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를 알 길 없는 그의 아내는 치술령 고개에 올라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望夫石)이 된다. 이것이 유명한 망부석 설화, 즉 박제상과 그의 아내 이야기이다.
그런데 박제상의 이야기는 충절의 일화로서 당시에도 꽤 유명했던 듯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많은 분량이 할애돼 실려 있고, <일본서기> 진구기(神功記)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의 성이 김 씨이고, 일본서기에는 모마리시찌(毛麻利叱智)로 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박제상의 이명(異名) 모말에 관직명인 질지를 붙인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볼모인 미사흔이 미시고치 하토리간키(微叱己知波珍干岐, 미사흔 파진찬)라고 적혀 있는 것과 같은 경우로 보면 될 것 같다.
<일본서기>를 보면, 왜왕은 박제상을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박제상과 함께 간 사자들도 옥에 가둬 불태워 죽이고, 군사를 몰고와 초라성(草羅城)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 돌아간다.(<일본서기>의 한 해설서는 초라성이 부산 남쪽 다대포와 멀지 않은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そうして新羅に行き、蹈鞴津(たたらのつ釜山の南の多大浦)に宿泊し、草羅城(さわらのさし)を攻め落として帰還した)
이 이야기에서도 왜는 한반도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가 일본열도에 있다고 하면 박제상의 아내가 망부석이 된 곳이 치술령(경주 울산의 경계)이라는 사실이 어울리지 않으며,(울산 앞바다나 감포 앞바다가 망부석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 박제상에 속은 왜왕이 대선단을 꾸려 바다를 건너와 한 짓이 겨우 성 하나를 짓이기고 간 것이라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2. 신라와 왜의 전통적 경계인 치술령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라가 왜에 지속적으로 볼모를 보내고 있는 점이다.(반면 왜에서는 한 번도 볼모를 보낸 적이 없다) 문제는 4~5세기의 일본열도에 백제나 신라가 왕자를 보낼 정도로 강력한 정치 세력이 있었는가 하는 것인데, 이에 답이 될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까놓고 얘기하자면 신발은 물론이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미개한 원주민들이 살던 시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열도에서 야마토 왜의 통일정권이 나타나는 시기는 7세기로, 그전에는 100여 개의 소국이 서로 치고 받고 하던 시절에 불과하다. 외부로 눈을 돌릴 여력도 마인드도 가지지 못할 시절이다. 하지만 그래도 '왜'는 일본열도에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고정관념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도저히 깨지 못하므로.....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많은 기록이 의미 없게 되며 신라와 왜가 전통적으로 지켜져 왔던 국경의 개념도 상실되게 된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AD 208년) 때의 기록을 들 수 있다.
(208년) 여름 4월에 왜인(倭人)이 국경을 침범해 왔으므로,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왜인을 막게 하였다.(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湌利音將兵拒之)
원문에서 국경을 침범했다는 뜻의 '범경(犯境)'은 육상의 경계를 침범했다는 뜻이지 바다의 경계를 침범했다는 뜻이 될 수 없다.(당시에 남북한의 NLL과 같은 해상 국경선이나 경제적 주권을 주장하는 EEZ 같은 수역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때 국경을 지킨 장수 이벌찬 석이음(昔利音, ?~220년)은 내해이사금의 아들로 석우로(昔于老) 왕자의 동생인데, 이때 그가 지킨 국경은 필시 치술령일 것이다.(석우로는 AD 253년 침공한 왜인들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또 이렇게 되면 금번 국립중앙박물관 가야 특별전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가야사를 올바로 연구해 달라는 국정지시를 내렸고, 이번 전시회 '가야본성, 칼과 현'은 그 연구의 발표회장 같은 것이었으나, 결과는 임나일본부의 공식 선전장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에 분개하고 반발해 마련된 학술대회 겸 국민간담회의 자리에서도 특별히 나온 무엇은 없었다. 그들의 사고에서도 왜는 일본열도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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