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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와 <송서>에 등장하는「왜」& 신묘년 기사
    잃어버린 왕국 '왜' 2020. 9. 14. 00:43

     

    왜가 본래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나라라는 것을 앞서 여러 경로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이번에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송서(宋書)>의 기록을 통해 '한반도의 왜'를 조명해보기로 하겠다. 거기에 실린 아래의 기록들 역시 왜(倭)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생겨나기 어려운 기록들이다. 4세기의 일본열도에는 통일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겨우 원시시대를 벗어난 문명이었으므로 한반도를 침공할 만한 세력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왜는 한반도에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물론이요 우리나라의 역사조차도 이 '왜'를 바다 건너의 왜라고 기술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일본의 역사 왜곡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를 놓고 일본에 끌려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니, 문제의 신묘년 기사부터 우선 짚고 넘어가보자.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일본학자들은 이 내용을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해석하고 진구왕후(신공왕후)의 삼한(한반도 남부) 정벌 증거로 여기고 있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I - 신라를 침략한 왜인'그리고 우리가 마땅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위 내용과 <송서>를 토대로 임나일본부설이 탄생하였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일본부'라는 통치기구를 세우고 식민지화했다는 학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みまなにほんふ)

    일본의 고교 교사용 역사자료에 실려 있는 4세기 말의 한반도 지도

     

    <임나일본부를 알고 있습니까>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

     

     

    우리가 밀리고 있는 위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도 왜가 한반도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는 팩트를 그대로 대입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석되니, 재차 나의 해석을 디밀자면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신라 땅에) 오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새긴 글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당연히 광개토대왕일 터, 왜가 엉뚱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할 이유가 없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뜬금없는 소리가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다를 건넌 주체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의 수군(水軍)이 되겠다.

     

    전에도 말했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391년(광개토왕 1년) 7월에 석현 등 10성을 빼앗고, 이어 10월에는 군사를 7개 방면으로 나누어 수군으로써 관미성(關彌城)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킨 바 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域四而蛸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백제도 곧 반격을 시도하여 393년(아신왕 2년) 8월에 백제장군 진무(眞武)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미성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의 국방상의 중요성은 고금(古今)이 같으니 백제 임진강 방어선 붕괴는 결국 수도 한성 함락으로 이어진다.

     

     

    파주 오두산성은 백제 관미성으로 비정된다. 

     

    오두산성이 관미성인 이유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이 '사면이 가파른 절벽에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다'(其域四而蛸絶 海水環繞)고 되어 있다. 이 같은 입지는 밀물 때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오두산성의 환경과 연결된다.(지금은 정상에 오두산 전망대가 있다)

     

     

    오두산성 주위 전경(오마이뉴스 사진)

    김정호의 대동지지 교하편에는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라는 기록이 있다.(臨津漢水交合處 本百濟關彌城) 파주의 옛 지명인 교하(交河)는 강이 만난다는 뜻으로 곧 한강과 임진강을 말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삼국사기>와 <송서>에 나오는 '왜'의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신라 흘해이사금(재위: 310-356) 때의 기록

     

    재위 3년째 되는 해 3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처를 구했던 바,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飡急利女送之)

     

    재위 35년 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했다고 사절하였다.(倭國遣使請婚 辭以女旣出嫁)

     

    재위 376년, 왜병이 풍도와 금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내물마립간(재위: 356-402) 때의 기록

     

    재위 9년째 되는 해 4월에 왜군이 크게 쳐들어왔다.(倭兵大至)

     

    ※ 이 시기는 혼란의 시기로서, <일본서기> 신공 46년기(366년)에 의하면 그 2년 전인 364년에 백제와 왜 사이에도 전투가 벌어진다. 이후 응신 18년(397년)에는 백제 독산성주가 3백 명을 데리고 왜에 투항하지만,(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응신 20년 9월에는 왜 한직의 초대 주지사인 아시 사주와 그 아들 도가 사주가 자신들에게 속한 17현을 이끌고 백제에 귀의한다.(倭漢稙祖 阿知使主 基子都加使主 並率己之黨類十七縣而來歸焉)

     

    재위 38년 5월, 왜군이 와서 금성(경주)를 포위하고 5일간이나 풀지 않았다.(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 사서를 종합하면 왜는 무려 27 차례나 신라를 공격했다. 특히 399년, 왜의 공격에 무너진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청했고, 광개토대왕은 서기 400년, 5만의 군사로써 그들을 몰아냈던 바, 이에 관한 광개토대왕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九年己亥百殘爲誓與倭和通王巡下平壤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特遣使還告以密計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다시)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순시하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나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서 성들을 파괴하며 노객(신라왕을 낮춰 이르는 말)으로 하여금 왜의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니 이에 태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이 그 충성심을 긍휼히 여겨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고구려군이)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곧 항복하였던 바, 그 성에 파수병과 주둔병을 두었다. 신라성 염성 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고 성안 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나주 반남리 왜왕 무덤

    백제왕의 능묘보다 큰 왜왕의 능묘이다. 

     

     

     

    위 무덤에서 출토된 왜왕의 금동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어느 곳에도 없는 양식의 관모이다.

     

     

    <후한서> 동이전의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송서> 이만(夷蠻)열전 왜국조의 기록

     

    무제(재위: 363-422년) 때의 기록

     

    443년, 왜왕 찬(讚)이 1만여리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조공을 바치니, 멀리서 정성을 다함이 예의에 밝다 하겠다. 제수(除授)를 내림이 옳다.(倭讚萬里修貢, 遠誠宜甄, 可賜除授)

     

     

    문제(재위: 424-453년) 때의 기록

     

     425년, 찬이 또다시 사마(司馬) 풍달(曹達)을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이 죽고 그 아우 진(珍)이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자칭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 하였다. 표를 올려 정식으로 제수를 구하므로, 안동장군·왜국왕을 제수하였다.(讚死, 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443년,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파견해 봉헌(奉獻)하므로 다시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삼았다. 451년에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를 더하였으며, 안동장군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 아울러 23인에게 군(軍)·군(郡)을 제수하였다.(

    倭國王濟遣使奉獻 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加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 安東將軍如故. 幷除所上二十三人軍·郡)

     

    ※ 군(軍)은 장군의 호칭, 군(郡)은 지방 수장의 호칭으로 생각된다.

     

     

    순제(재위: 477-479) 때의 기록

     

    478년, 왜왕 무(武)가 사자를 보내 표를 올리고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는 작위를 요청하였다.(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조서를 내려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제수하였다.(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 이른바 '왜5왕'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가 부강해진 왜가 백제 신라 임나 가라(加羅) 진한 등의 영토를 크게 잠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아래의 지도에 넓게 표시된 임나일본부의 영토이다. 이에 송나라에서는 왜가 요구하는 7국 중에서 백제를 제외한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이라는 작위를 내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이때 송나라가 (비록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백제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 남조와 유대가 돈독했던 백제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송나라가 최소한 백제의 위상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만, 그 반면 외교 관계가 없었던 신라, 임나, 가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어서 왜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두번 째는 왜가 지배권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지역이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으로 모두 한반도 남쪽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다. 즉 당시의 왜는 일본열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반도 내의 왜일 뿐이다. 그리고 이때 왜는 지배권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지역에 이미 없어진 진한과 모한이라는 나라까지 집어넣어 세 불리기에 애쓴다. 그러면서도 구슈(九州) 등으로 짐작될 법한 일본열도의 지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 일본에서는 왜왕 무(武)를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유라쿠천황(雄略天皇, 재위: 456~479)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송서>에 보이는 이른바 '왜5왕'의 행보는 <일본서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편이다.

     

     

    4세기 말 확장된 왜의 영역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녕왕)의 지석

    무녕왕은 512년과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521년 양 무제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외교관계를 보여준다. 

      

    무녕왕릉 입구에서 오수전과 함께 발견된 지석

     

     

     

     

    * 왜국(고대 일본)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임을 주장하는 책들 

     

    <바다를 건너온 고대 왜왕>

     

    <한반도에서 온 왜국>

     

    소설 <왜왕의 후예>

    '일본 국가 탄생의 수수께끼와 로망'-일본의 원류는 한반도로부터 온 기마만족이 세운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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