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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발견된 한반도 왜왕의 무덤잃어버린 왕국 '왜' 2021. 4. 22. 22:02
올해 벽두에 전남 해남에서 고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기가 발굴됐다. 전방후원분은 문자 그대로 앞쪽은 네모지고 뒤쪽은 원형인 무덤 형태를 말하는데, 까닭에 장고형 고분이라 하기도 하고 열쇠구멍형 고분이라 불리기도 한다.(아래 광주 월계동 고분 참조) 이번에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그간 발견된 전남지역 13여 기의 전방후원분 중 가장 큰 규모(봉분 길이 82m 높이 9m)로 발굴의 성과 역시 가장 기대되는 무덤이었다.
오랫 동안의 수수께끼였던 그 무덤은 오래전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껏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학술 조사가 없어 많은 그간 사람들이 무덤이 열리기를 고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덤이 관계 기관에 의해 발굴되었다.(2020년 10월~2021년 2월) 하지만 발굴결과는 공개되지 않았고 무덤도 다시 흙에 덮여버렸다. 까닭에 무덤이 열린 사실조차 알 수 없었고, 다만 현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 지난달 한겨레 신문에서 그 사실을 보도하며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말한 대로 이 수수께끼의 무덤은 소리 소문 없이 열렸다 닫혔다.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겨레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유는 간단했다. 무덤 내부가 5~6세기 일본 고분과 너무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발굴을 담당한 고고학자들은 긴장했고 얼마 후 작업이 중단되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괜히 섣부른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우파 세력에 이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다시피 임나일본부는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학설로 일본 우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까닭에 왜색(倭色) 짙은 이 무덤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으로 작용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으니, 2019년 한반도 남부의 고대 전방후원분에 대해 대서특필한 요미우리 신문과, 1996년 충남 보령에서 한반도에서는 드문 (반면에 일본에서는 흔한) 주구묘(봉분 주위에 도랑을 두른 무덤) 형식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일본 NHK에서 헬기까지 띄워 특집으로 다룬 사실은 한반도의 왜색 무덤에 대한 일본 우파의 관심을 실증한다.(☞ '임나일본부의 정체 II - 나주 옹관 무덤의 주인은?')
이번에도 그런 걸 경계했을지 모른다. 말한 대로 이 무덤은 1990년대 두 차례 도굴을 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번 발굴에서 개배(뚜껑 달린 접시) 10점과 그 안에 든 조기 등의 생선뼈와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육류 유기물 덩어리가 검출되었는데, 이에 발굴자였던 조근우 연구원장(마한문화연구원)의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는 언급이 있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와의 관계를 아주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울러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는데, 무덤 내부에 판석을 마련하고 할석(깨뜨려 다듬은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드는 형식은 일본 북(北) 규슈와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대 석실분의 형식이었다. 게다가 천장과 벽체에는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의 주칠 흔적이 남아 있었던 바,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의 한겨레신문 보도에 주목했다.
한국이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는 고대 무덤의 존재에 대해 일본에 쫄리는 이유는 임나일본부에 대항하는 논거를 아직 마련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무덤을 서둘러 덮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언제까지 모르쇠로 버틸는지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한심하고 딱하기 그지없다. 이와 같은 행보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니, <삼국사기>는 가짜이고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하는 일제시대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의 주장에 맞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셈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앞서 말한 대로 본래의 왜국(倭國)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는 것뿐이다. 아울러 이것은 그간의 왜곡됐던 역사를 바로 잡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고대의 왜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고,(아래 지도) 그러한 까닭에 신라를 빈번히 침범할 수 있었으며,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의 진실이기도 하다.(☞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의 한판 승부')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 <후한서> 동이전
한은 대방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瀆盧國與倭接界) - <후한서> 동이전
* 바다를 보고 마주하고 있으면 접(接)이나 계(界)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접'은 '접해 있다'는 뜻이고 '계'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 전문 보기
즉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동원해 백제와 왜를 쳤던 것이니, 앞서도 말했거니와 왜가 한반도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는 팩트를 그대로 대입하면 비문의 해석은 따로 연구할 것도 없고 왈가왈부할 것도 없다. 아래와 같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신라 땅에) 오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
*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 전문 보기
그럼에도 우리의 사학계는 그저 숨기기에만 급급하고 임나일본부를 내세우는 일본의 공격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팩트를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통설이 모두 뒤집히게 되는 바, 말할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오게 되고, 지금까지의 무지와 나태, 왜곡된 역사와의 타협 등을 인정해야 하므로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류 사학계의 버티기는 이제 한계에 이른 듯하다.
* 이른바 재야사학자라는 사람들도 북방영토를 넓히는 데만 몰두해(그래서 지금은 어느덧 시베리아까지 진출했다) <일본서기>와 같은 1차사료의 연구에 소홀하다. 상대를 공격하려면 상대에 대해 연구해야 하거늘 웬 이상한 자료들만 잔뜩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 학계도 별 다를 게 없는 바, 까닭에 작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야심적으로 개최했던 가야 특별전은 임나일본부의 선전장으로 변모해 지탄을 받았고, 예정된 일본 순회전시도 취소되는 망신살 뻗치는 일이 생겨났다.
앞서 말한 이마니시 류는 동경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한 사람으로 조선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교육한 조선사편수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자였다. 또 조선사편수회의 회장이었던 아리요시 쥬이치(有吉忠一)와 고문이었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위에서 말한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 발굴에 모두 참여했고, '대일본 황조(皇祖)의 발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 축조된 이 무덤군이 만세일계(萬世一系, 왕계가 한 뿌리로 이어짐) 일왕가(日王家)의 발상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3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던, 그리하여 중국에 그 점령지를 자신의 속국으로 인정해 달라는(언감히 백제까지 포함하여) 국서를 중국 송나라(중국 남조의 송, 420~479년)에 보내기까지 했던(☞ '<삼국사기>와 <송서>에 등장하는「왜」& 신묘년 기사') '왜'는 한반도에 있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대일본 황조(皇祖)의 뿌리라고 말했던 3세기 후반에 축조된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왜왕 무덤은 어불성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에 그들은 조선의 역사에서 '왜'를 아예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왜는 전설의 '신공황후(神功皇后)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세운 식민지, 즉 임나일본부로 만들었으니 신화가 역사로 둔갑하는 저자거리 재담꾼의 저급한 사례를 엘리트 학자가 답습한 것이었다.
그런 자들이 '한반도의 왜국'을 가르칠 리 만무했을 터, 그들에게 배운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두계(斗溪) 이병도( 1896~1989) 이하의 모든 학자들이 '한반도의 왜국'의 존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배운 후학들 역시 '왜'의 존재를 알 길 없었는데, 가끔 튀어나오는 '한반도의 왜'는 위처럼 애써 무시했다.(지금 펼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왜'는 분명 한반도에 있었고 3세기 말~4세기에 걸쳐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앞서 말한 해류를 타고 자연스럽게.
※ 이에 대해 영남대 인류문화학과 정인성 교수는 다음과 같은 반박의 글을 SNS에 올렸다.
한겨레 기사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자 일파민파가 되었다.
마치 한국 학계와 당국이 호남의 전방후원분을 발굴 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고 주장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피장자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있을 뿐 한국학계에서는 이를 정확히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평가한다. 이를 주제로 해마다 국제학술대회를 주최하는데 은폐라니..저 고분도 조사후 고분 연구자들에게 아낌없이 공개 되었다. 다만 코로나 시국이라 공개행사가 축소된 것 뿐이었다.
발굴이 끝난 고분은 활용 방침이 정해질 때까지 발굴구덩이를 복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뒷처리이다. 최근에 발굴된 쌍릉이고, 함안이고 창녕이고 모두 조사 후 복구처리하였다. 특히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판 고분은 안전상의 이유로 즉시 복구하는 것이 관례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 했는데 이 역시 엉터리이다.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 중에서 비교적 큰 고분이라 해야한다.
삼국시대에 영산강 유역권에 일시적으로 전방후원분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학계의 상식이다. 반면 당연한 것처럼 일본열도에도 많은 수의 고인돌과 한반도식 목관, 목곽묘가 축조된다.
오히려 반성해야 될 것은 이러한 교류와 상호작용의 고고학적 흔적을 학자들이 앞장서 침략과 식민지배의 당위로 삼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100년전 영산강 유역에서 처음 전방후원형 고분을 발굴했던 야쓰이는 이를 근거로 즉각 왜인을 소환하고 왜의 시대를 주창했다. 이마니시 등은 경주에서 신공황후를 열망하고 영남전역에서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아서 과몰입하지 않았던가. 제국군대가 남대문을 차지한 것이 자랑스럽고 1500년전의 영광이 재현된 것이라 광분하지 않았던가. 신라고분의 기원이 일본에 있다는 주장에는 말을 잃게 된다.
지금의 한국학계를 폄하하기 이전에 이런 일본인 관학자들의 비학문적인 태도를 먼저 지적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잃어버린 왕국 '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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