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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III)-고구려의 후예 묘족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7. 9. 00:40

     

    중국 역사에서 묘족(苗族)이 출현 한 건 송나라 이후이다. 단언컨대 송나라 이전의 역사 책에서 묘족이 출현한다면 그것은 동남공정을 꾸리는 어용 역사학자들의 창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묘족은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중국으로 강제 이주됐던 많은 고구려인들이 현지에서도 계속적인 저항을 하다 남방 끝까지 쫓기고 쫓겨 와 현지인과 어울려 만들어진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의 국경을 넘기도 하고 중국 내에 머무르기도 했는데,(당시는 지금처럼 국경선에 명확한 게 아니었으므로) 중국 내의 고구려인들이 터전을 잡은 곳이 지금의 귀주성(貴州省)이다.*

     

    * 2000년 중국의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중국 내의 묘족 인구는 894만 116명으로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4위이다. 주로 양쯔강 이남 9개 성에 분포하며 귀주성의 묘족 인구는 429만 9,954명으로 전체 묘족 인구의 반 정도(48.1%)를 차지한다.

     

     

    귀주성의 위치

     

     

    동방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귀주성 진원고진(鎭遠古鎭) 

      

    고구려인의 후예가 가장 많이 산다는 강서(江西) 천호묘채(千戶苗寨)

     

    살아 있는 고구려 마을 강서 천호묘채(볼 만함!)

     

     

     

    고구려인의 상무정신과 저항의식은 고구려 패망 이후에도 이어졌던 바, 그곳 남방에 터전을 잡은 후에도 중앙의 압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중국 역대 왕조들은 묘족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으니 20여년 전, 소위 '날아다니는 홍콩 무협영화'가 판을 칠 때 그 정점에 있었던 '동방불패'(東邦不敗)라는 영화는 바로 동방불패(임청하 분)가 이끄는 묘족의 반란을 그린 영화였다. 물론 설명은 없지만 1300년 전에 사라진 고구려 왕국 부활하여 한족과 싸우는 스토리이니 그야말로 동방불패(Never Lost in the East)를 그린 영화였다고나 할까?

     

     

    '동방불패'의 포스터

     

    동방불패 역을 맡았던 임청하

     

     

    귀주성 일대의 묘족이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사실은 김인희 연구원*이 지난 10년 간 현지를 수차례  답사하여 얻은 성과를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이라는 책으로 발간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지난 2000년 학술대회 참석 차 들른 중국 묘족 마을에서 고구려인의 바지인 '궁고'를 입은 묘족을 발견한 후 중국 소수민족이 왜 고구려인의 궁고를 입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이후 지속적인 고문헌 연구와 현지답사 등을 통해 마침내 고구려 유민과 묘족과의 관계를 밝혀낸  것이다.

     

    * 김인희는 전북대 '쌀··문명연구원' 전임연구원으로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언어인류학을 공부했으며 한장어(漢藏語)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쉐량 교수의 지도를 받아 쓴 논문 <한국과 먀오족의 창세신화 비교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무용총 벽화 속의 궁고를 입고 춤추는 남자들.

    삼각형의 바대를 댄 바지를 입어 엉덩이 부분이 뾰족하게 나와 있다.

     

    짧은 궁고를 입은 삼실총 인물도

     

     

    쪼우라는 바지를 입은 흰바지야오족

    바지 뿐 아니라 선을 두른 윗저고리까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들 역시 귀주성에 사는 소수민족으로 그들의 전통복장 흰바지는 그대로 민족명이 되었다.

     

    무용총 벽화 속의 궁고를 입은 남자들

     

    궁고와 비슷한 바지를 입은 묘족 남자

     

     

    문헌으로는 중국 송나라 때의 책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의 기록에서 이 같은 주장의 근거를 찾았다. 이 책에는 '가뤼'(가로우)라는 민족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고구려의 국호였던 '고려'가 중국 남방 민족 언어의 영향을 받아 '가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또 주변의 다른 소수민족의 경우 모두 송나라 이전 문헌에 등장하지만 묘족만이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가뤼'라는 민족이 바로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 때 통제를 받다 산속으로 이동해 묘족을 형성했고, 중국의 한족 문인들이 반란을 일삼는 그들을 야만인이라는 뜻에서 묘(먀오)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밖에 묘족이 남방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쌀'과 ''와 같은 도작 용어를 사용하는 점,(묘족도 쌀을 쌀이라 한다) 고구려 주몽 신화와 마찬가지로 시조가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 신화를 갖고 있는 점, 체질 인류학적 특징이 한국인과 흡사한 점 등 총 19가지 증거를 들어 고구려 유민이 묘족의 뿌리라고 주장하는데, 앞서 말한대로 묘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  만주족 다음으로 한국인과 유사한 DNA 구조를 보이고 있다. 신기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니, 묘족은 고립어를 쓰는 중국인들에 둘러싸였으면서도 우리나라 말과 같은 교착어를 사용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묘족의 언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같다는 것인데,  특이한 것은 '가'(高)를 이름 앞에 붙이면 부모라는 뜻과 존칭을 표시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 귀중한 물건 앞에는 접두사로 '가'를 붙인다. 고구려의 '고'는 '높다', '존귀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가'를 이름 앞에 사용해 존경의 의미로써 사용하는 것은 고구려 국명이나 왕족의 성씨인 '고'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김인희 연구원의 추측이다.

     

    오랜 기간 현지인과 동화되었음에도 묘족의 풍습에서는 아직도 고구려의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남쪽 민족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난생 설화를 필두로, 고구려의 동맹과 비교되는 고사절(鼓社節) 축제도 거행되며(이때 부여의 영고처럼 북을 모셔오는 의례가 행해진다) 이 축제 때 고구려 · 신라의 것과 같은 새날개 모양의  은제장식구를 머리에 꽂는다.(남자들은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한다) 아울러 여자들은 평소 주름치마를 입는다. 

     

     

    수산리 벽화 속의 주름치마를 입은 부인과 시종

     

     

    일본 벽화 속의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

    고구려계 고분인 다카마쓰 고분에서 발견된 그림으로 나라 정창원에서도 고구려계 주름치마가 실물로써 발견됐다.

     

    주름치마를 입은 묘족 여인

    중국 남방민족들은 주름이 없고 통이 좁은 치마를 입으나 묘족만이 고구려와 요나라 계통의 주름치마를 입는다.

     

    묘족 주름치마

     

    한복 주름치마

     

     

     

    묘족의 은각

     

    천마총 출토 새날개형 관식

     

    황남대총 출토 새날개형 관식

    신라 관장식과 묘족 관장식은 둘 다 새날개형이며 중앙의 뾰족한 부분을 관에 꽂아 고정시킨다.

     

    은각을 쓴 묘족 처녀들

    묘족의 명절인 고사절에 이 은각을 쓰고 민속춤을 춘다. 묘족은 또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묘족 출신의 연예인 차오 루

     

     

    혼례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대표적 문화 특질인 데릴사위제(처가살이)와 형사취수제(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음)가 행해지며, 장례에 있어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시신을 집 안에 묻으며 망자의 영혼을 고구려 땅으로 돌려보낸다.( 김인희 연구원은 이와 같은 사실을 포함해 19가지의 증거를 들어 묘족의 중심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임을 증명했는데, 처음부터 "만약 고구려 유민과 묘족의 관계를 부정할 증거가 발견된다면 언제든지 이 연구를 그만두려 했다"는 학자적 책임감도 함께 피력했다)

     

    김 연구원에 의하면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이듬해인 669년, 20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유민이 중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 그중 중국 남방으로 끌려갔던 약 10만명의 유민이 묘족을 형성한 중심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민족정신과 반항심을 강렬히 드러내 중앙정부의 통치와 압제에 저항하는 봉기를 여러 차례 일으켰던 바, 중국인들은 "묘족은 30년 마다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60년 마다 큰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고, 반면 묘족은 "돌을 베게삼을 수 없고 한족은 친구로 삼을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이와 같은 한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은 당연히 그간의 지속된 억압과 민족말살 정책(원나라 때위 토사제도, 명나라 때의 개토귀류)에 대한 저항감의 표출이리라. 아울러 현재 중국 공산당 정부의 민족말살 정책 또한 극성이어서 만주족과 내몽골인은 거의 중국화됐고, 장족(짱쭈)과 위구르 족 또한 무너져가는 마당에 묘족이 그 정체성을 면면히 이어가는 것은 은근과 끈기라는 한민족 특질의 표출로도 여겨진다.

     

    이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인류학자 게디스(W. R. Geddes, 1916-1898)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역사에는 끝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낸 두 개의 민족이 있다. 그중 하나는 묘족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다."

     

    김 연구원은 번외로 "당나라에 의해 조직적으로 진행된 고구려 유민 이주정책은 현재 중국 정부가 자신의 영토에서 발생한 모든 고대사를 중국사로 환원하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중국의 애국주의가 거세질수록 고구려는 인화성이 큰 민감한 주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현재의 불안감을 회피하게 해주는 판타지가 돼서는 안되며, 동북공정과 같은 외부의 도전에 맞서는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중국은 현재 중국 영토에서 발생한 고대사는 곧 중국사에 환원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따르자면 고구려사 또한 중국사에 포함된다. 중국의 학자들과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할 때마다 그들의 한결 같은 견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한 역사관이 아닌가? 그 논리대로라면 앞으로 다른 국가가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 영토 내에 국가를 세운다 해도 당신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중국 영토 내에 세운 국가이니 어차피 중국사가 될 것이 아닌가." 중국 학자들은 이러한 나의 문제제기에 대해 침묵으로 대신했다.

     

    지금 고구려 유민이라는 주제를 다시 꺼내는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고구려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은 여전히 소수자이며 주변인이자 이방인으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십년 동안 고구려 유민의 행적을 좇아 답사하고 문헌자료를 찾는 동안 종종 가슴이 먹먹해져 한참을 망하니 있곤 했다. 이들이 과거의 영광을 환기시켜줄 '고구려'의 후손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살펴야 한다는 당위의 차원도 아니었다. 뿌리를 떠난 민족의 삶이 너무나 참담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실패한 민족은 단 한 뼘의 땅도 허락받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역사였다.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서문에서 발췌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푸른역사)

     

    위 책의 저자 김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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