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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남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해시태그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9. 4. 01:48

     

    한성 백제의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가는 우리 역사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여태껏 그 위치가 설왕설래되고 있다.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도 그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로서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서 언급한 이래 한치윤의 <해동역사>, 그의 조카 한진서의 해동역사속(海東歷史續, 해동역사 부속 지리서)에서도 위례성의 위치로 비정됐고, 이후 고산자 김정호,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 천관우, 이병도, 윤병무 교수 등의 꾸준한 지지를 받았다.(지금도 그곳은 하남 위례 신도시라고 불린다)

     

    그 추정의 중심에 있는 곳이 하남 이성산성으로, 백제 궁(宮)이 있었다는 춘궁동의 지명과 함께 지금도 1,925m에 이르는 성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산성 이름인 이성(二聖)이 비류와 온조를 일컫는다는 속설도 따라붙는데, 해발 209m에 불과하지만 막상 오르자면 숨이 제법 헐떡여지는 경사이고, 정상에 오르면 조망도 빼어나다. 까닭에 이성산성은 건국 초기의 방어용 수도 성으로서 어울릴 법도 한데, 언뜻 보면 전체적인 구조가 고구려 초기 수도 성인 졸본성(오녀산성)과도 흡사해 비류와 온조가 그곳을 모방했을 법한 상상도 불러일으킨다. 굳이 비교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성산성의 모양새
    이성산성
    오녀산성(졸본성)
    이성산성 오르는 길
    오녀산성 오르는 길
    이성산성 제 1 저수지
    오녀산성 천지(天池)
    이성산성 동문지와 성문 기둥 초석(문 지공석)
    오녀산성 서문지
    오녀산성 성문 기둥 초석(문 지공석)
    이성산성 장방형 건물지
    오녀산성 1호 건물지
    이성산성의 또 다른 장방형 건물지
    오녀산성 2호 건물지
    이성산성 정상 / 풍납&middot;몽촌토성 및 남한산성이 조망되며 멀리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오녀산성 장대지인 점장대 /&nbsp; 환인 지역은 물론 국내성이 있는 집안 지역과 혼하(渾河)가 조망된다.
    제천의식지로 추정되는 이성산성 9각 건물지 / 오녀산성에는 멀지 않은 곳에 제천의식지인 국동대혈(國東大穴)이 있다.
    9각 건물 복원도 / 훗날의 천단(天壇)이나 환구단이 연상된다. 이곳을 제천의식지로 생각하는 것은 이성산성 건물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아울러 9가 고대의 완전수이기 때문인데, 고대에 9각을 어떻게 각도할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하다.

     

    그러나 발굴 결과는 달랐다. 지난 1986년 한양대 박물관 팀과 하남시가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을 시작한 이래 11차례의 발굴 기간 동안 백제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니 출토된 3천여 점의 유물은 신라 유물 일색이었다. 특히 3차 발굴 때 저수지 자리 뻘 층에서 발견된 목간의 글씨, 즉 '戊⾠年 正⽉ 12⽇ 南漢城 道使.. 須城 道使村主.....'의 내용은 그간의 갑론을박에 종지부를 찍었던 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진흥왕 14년(553년) 이후에 쌓은 성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것은 또 이성산성이 (백제 초기 성의 형태인 판축 형태의) 토성이 아니라 석성인 이유까지 설명해 주었다.

     

     

    저수지 뻘 층에서 발견된 죽간 30여 자의 글씨 중 약 20자가 판독됐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 주장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랄만한 고구려 유물이 2점 발견되었다. 하나는 고구려 집안(集安)오회분(五盔坟) 벽화에서 보이는 장구 모양 악기 요고(腰鼓)였다. 이는 고구려가 이 성을 점령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 있었는데, 훗날 이보다도 더욱 관심을 붙들어놓게 되는 것은 토기의 파편에서 발견된 해시태그(#) 문자였다. 이를 맨처음 주목한 사람은 발굴단장인 심광주 박사(토지주택박물관장)로, 그는 이 심상치 않은 표식에 강한 흥미를 느낀 나머지 그에 대한 의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부호가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청동호우에 새겨진 문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발굴 보고서에 그 두 장의 사진을 대비시켜 놓았다. 

     

     

    하남역사박물관 특별전의 타이틀이 된 요고
    복원된 요고 / 전체 길이는 42.8cm, 한쪽 지름이 17.5cm이고 반대쪽은 17cm이다.
    고구려 벽화 속의 요고 (가운데 악기)
    발굴&nbsp;보고서의 사진
    이성산성에서 처음 발견된 해시태그가 그려진 토기
    해시태그(hashtag)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사용되는 새로운 정보 공유법이다. SNS에 글이나 게시물을 남길 때 # 뒤에 특정 단어를 붙여 쓰면 그 단어에 대한 정보들을 모아 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 대한 글이라면 #KOREA로 표현한다. 고대국가 중에서 해시태그 문양을 사용한 나라는 오직 고구려 뿐이다. 고구려는 분명 말하고픈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에 관한 정보를 모른다.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
    호우에 새겨진 글자 '#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이 그릇이 경주의 무덤에서 발견되어진 이유는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에서 설명했다. 하지만 해시태그에 관해서는 아직도 미궁 속이다

     

     

    심광주는 이후 구리시 아차산과 망우산, 수락산 등지에서 고구려 보루성을 발견하고 또 토기를 발굴해내는 성과를 거두며 남한 땅에서도 고구려의 자취가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다. 아울러 그는 이성산성 토기에 새겨진 문양을 서울 몽촌토성과 구의동 출토 고구려 토기에서도 확인한다.(이후 그는 경기도 여주, 충청북도 충주와 영동, 경상북도 경주,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에서도 그 문양을 찾아낸다) 과연 이 해시태그 문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심광주가 마치 거짓말처럼 거듭해 출현하는 그 수수께끼 문양 앞에서 고민할  즈음, 한 사람이 그를 찾아온다. 소설가 최인호였다.

     

    당시 최인호씨는 조선일보에 백제의 고도를 찾는 내용의 <왕도의 비밀>을 연재하고 있었다. 최인호는 이성산성에서 발굴된 #자 문양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심광주를 찾아온 것인데 그는 그것을 광개토대왕의 상징부호로 생각하고 있었다. 심광주는 자신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 문양이 새겨진 유물관련 자료를 주었다. 그러자 그 다음 주부터 소설의 내용이 바뀌어 갑자기 주인공이 # 부호의 비밀을 추적해 가기 시작하였다. 심광주가 자료를 찾아주면 주인공은 다음 부호를 찾아 나서고 사무실 일로 바빠서 몇 주동안 새로운 자료를 주지 못하면 주인공은 버스를 타고 계속 회상 속에 잠겨야 했다. 주인공을 버스에서 내리게 하려면 새로운 자료를 찾아줄 수밖에 없었다.(<광개토대왕과 '#'의 비밀> 심광주)

     

     

    이성산성의 심광주 박사.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동문 터에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이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사진과 글: 동아일보)
    심광주가 아차산에서 발굴한 고구려 토기들
    복원 후 구리시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 부호가 뚜렷한 고구려 토기
    서울대 발굴 보고서의 # 부호 토기 그림
    심광주가 찾아낸 # 부호 기와

     

    이후 심광주는 최인호의 권유로 해시태그의 비밀을 풀기 위해 중국여행을 떠나게 된다. 비용은 당시 <왕도의 비밀>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던 샘터사에서 부담했던 바, 심광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옛 고구려 땅인 집안에 도착해 최인호와 함께 고구려 환도산성을 탐사하던 중 밭 가운데서 또 다시 해시태그 문양이 새겨진 기와편을 발견한다. 스스로도 말했듯 가히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욱 놀라운 두 가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하나는 매우 통탄스런 일이었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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